지역에서 본 세상

마산 다짐비가 소녀상이 아닌 까닭

기록하는 사람 2015. 9. 22.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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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자주 평화 다짐비 건립 과정에 대한 생각 


-애초 추진위원회 명칭에서 ‘추모조형물’ 대신 ‘추모비’라는 단어를 썼다. 그러다 보니 ‘비석’을 세우는 것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죽은 이를 추모하는 비석이라면 산이나 공원 등 외곽에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약간의 혼선이 있었다.


-그러나 터 선정 과정에서 있었던 잡음과 마찰은 결과적으로 다짐비에 대한 시민의 관심과 애정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SNS에서 많은 시민과 타 지역민들이 오동동 다짐비를 응원하며 좋아요를 눌렀고 널리 공유해주었다.


SNS를 통해 ‘마산 오동동에 일본군 ‘위안부’ 추모 조형물을 세운 까닭’을 올리고 공유한 것도 주효했다. 또한 발빠르게 조형물 앞에 ‘이곳에 세우는 의미’ 안내판을 세운 것도 적절했다. 많은 행인이 안내판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목격했다.



또 코아양과 맞은편 도로에 건립하려던 것이 무산된 것도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잘 되었다고 본다. 너무 좁고 복잡한 곳인 데다 주변의 시설물 등과 조화롭지 않아 천덕꾸러기가 될 수도 있었다.


추모조형물은 저잣거리에서 뭇 사람들과 만나야 한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영웅의 동상이 아니라 행인들과 같은 높이에서 마주보거나 어깨동무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마산합포구 해운동 방송통신대 학습관 옆 근린공원에 생뚱맞게 서 있는 부마항쟁 기념조형물을 보라. 왜 그것이 거기에 서 있는 지 아무도 모른다. 그 장소와 부마항쟁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데 왜 거기 서 있을까? 마땅히 세울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야말로 생뚱맞은 조형물이 됐다.


다짐비는 다르다. 학생과 시민과 취객들도 왜 다짐비가 오동동에 서 있는지 안다. 그래서 더 가슴아파한다.


-‘인권 자주 평화 다짐비’ 작명은 잘 되었다고 본다. 그냥 ‘다짐비’ 또는 ‘마산 다짐비’ ‘오동동 다짐비’ 등으로 자연스럽게 불려질 것으로 보인다.


‘평화의 소녀상’은 지역성이 드러나지 않는데다 타 지역의 소녀상과 변별력이 없다. 또한 ‘소녀’를 내세워 순결을 강조하려는 느낌이 있다. ‘순결하지 않은 여성은 인권을 유린해도 되는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민간인학살’도 애초에는 ‘양민학살’로 불렸다. 그러나 ‘양민’ 즉 착한 백성=빨갱이가 아닌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면 ‘빨갱이는 재판도 없이 저렇게 학살해도 되는가’라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민간인학살’로 통일하게 되었다.



-작명과 건립취지문, 안내판 문구 등을 다소 급하긴 했지만, 카톡방을 통해 회람하고 다수의 의견을 취합해 확정한 것도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건립 이후 잡음과 지적이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공모 방식을 ‘협상에 의한 계약’ 방식으로 한 것도 적절했다고 본다. 작품 선정이 아니라 작가 선정 방식도 효과적이었다.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들과 작가들이 수차례 만나 토론하고 협의하면서 건립 취지와 의미를 잘 살린 작품을 만들었다. 덕분에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역사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비장하고 결연한 의지’를 잘 표현한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


-다만 바닥이 애초에 계획했던 것과 달리 평평하고 밋밋하게 처리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안전사고 위험 때문이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안전성이 고려된 새로운 디자인을 사후에나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 잘 활용하고 잘 보전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경남도민일보가 #평화인증샷 이벤트를 하고 있는 것도 그런 취지다. 23일까지 받고 있으니 적극 참여해주시길 바란다.



#참고 자료 1 : 설립취지문


20세기 초 마산은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침략 기지이자 수탈도시였다. 또한 일제의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 동원을 위한 중간집결지였다. 경남 각지에서 끌려온 수많은 여성이 마산을 거쳐 중국과 동남아 등 일본군의 전쟁터로 배치됐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조선을 비롯한 전쟁점령지의 어린 여성들을 제국주의 군인의 성노예로 삼은 20세기 최대의 반인륜·반인권 국가범죄이다. 그렇게 인간의 삶을 무참히 유린한 일본 정부는 70년이 지나도록 사죄와 배상은커녕 인정조차 않고 있다. 한국정부와 사회도 그들의 피해와 고통을 외면해왔다. 


이러한 일본의 책임을 끝까지 묻고, 우리의 과오를 반성하면서,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며, 평화와 인권의 소중한 가치를 미래세대에 전하기 위하여,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는 이런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일제 수탈의 현장이자 반제국주의 항일독립운동은 물론 해방 후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중심지였던 이곳에 인권 자주 평화 다짐비를 세운다.


2015년 8월 15일 


일본군위안부창원지역추모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


조형물 안내


이 조형물은 일본군 ‘위안부’로 참혹한 고통을 겪은 소녀를 통해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역사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비장하고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고자 했다.

꽉 쥐고 있는 두 손은 지키려는 의지를 나타내며 천은 한과 희망,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연결을 의미한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우리 국민들의 제대로 된 이해를 바라는 뜻을 담았다.

얼굴 표정에서 발가락 끝까지 역사적 증인으로서의 긴장감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참여작가 : 하석원, 조란주, 윤귀화, 한경희


2015년 9월 21일 평가토론회


#참고 자료 2 : 인권 자주 평화 다짐비를 이곳에 세우는 의미


일제강점기 마산은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을 위한 중심 전진기지이자 중간집결지였다. 뿐만 아니라 이 일대는 일제시대 주민운동의 센터였던 마산민의소, 각종 혁신정당과 사회운동단체가 있었으며, 해방 후에는 3·15의거, 부마항쟁, 6월민주항쟁 등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사건들이 일어난 곳으로서 창원지역 그 어느 곳보다도 역사성이 깊은 곳이다.


또한 오가는 사람들의 눈에 쉽게 잘 보이면서도 차 없는 거리로 혼잡하지 않고 오동동 시민문화광장 입구로 시민과 늘 함께 할 수 있어 대중접근성이 높은 곳이다.


뿐만 아니라 바로 앞골목에는 3·15의거 발원지가 있고, 부마민주항쟁과 6월민주항쟁이 일어난 불종거리와 육호광장, 3·15의거탑, 김주열열사시신인양지 등 민주화의 상징적 장소 등과 인접해 있어 근현대사 탐방코스로 가치와 교육연계성도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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