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기쁨을 아는 몸과 고통을 아는 몸

김훤주 2015. 7. 2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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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률'을 읽었습니다. 아직 두 달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우리와 함께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나라에 핵피폭자가 2만 명 넘게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습니다. 그이들이 낳은 자식(핵피폭2세)이 적어도 1만 명 가까이 되는데 그들 또한 ‘핵피폭에 따른 유전 (위험)’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습니다. 


이들 핵피폭1세와 2세에 대한 실태조사가 거의 전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는 사실 또한 제게는 처음이었습니다. 이런 사정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하나씩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폭탄이 터진 나라 일본도 마찬가지라 합니다. 


김형률은 핵피폭2세입니다. 1970년 태어나서 서른다섯 해 살다가 2005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 김봉대는 1938년 합천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이곡지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1940년 조선 사람을 부모로 삼아 태어났습니다. 

 

1. 핵피폭 1세의 존재


어머니는 1945년 8월 6일 미군이 핵폭탄을 히로시마에 떨어뜨렸을 때 부모 일터에 있다 핵에 노출됐으며 아버지와 언니까지 여의야 했습니다. 함께 피폭된 어머니는 어린 곡지와 여동생 하나를 데리고 해방된 뒤 외가가 있던 합천으로 돌아갔습니다. 버지가 없는 탓에 친척들 눈칫밥을 먹어야 했던 어머니 이곡지는 그나마 일본에 있는 외숙부 도움으로 국민학교는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이와 달리 합천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마쳤으며 군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김형률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얼굴도 모르는 상태로 결혼을 했습니다. 군대 있던 아버지는 어느 날 “신부감을 찾았으니 그리 알거라” 하는 연락을 부모로부터 받았고, 곧이어 ‘합천읍장 직인이 찍힌 결혼증명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맺어진 김봉대·이곡지 부부는 60년대 들어 부산 수정동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자식을 여섯 봤습니다. 김형률을 중심으로 얘기하자면 형이 둘이고 누나가 하나, 여동생이 또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김형률은 넷째 자식이면서 셋째 아들입니다. 

 

2. 대를 이어 유전되는 핵피폭


김형률에게 쌍동이 동생도 하나 있었는데, 태어난 지 1년 반만에 폐렴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건강했지만 김형률은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원인은 ‘핵피폭에 따른 유전’이었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감기 등 때문에 심하게 앓아야 했고 커가면서는 그런 고통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김형률은 국민학교와 중학교만 그것도 겨우겨우 마칠 수 있었을 뿐 고등학교 진학은 포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김형률은 주저앉거나 멈추지 않았습니다. 몸이 아프면서도 대학 입학을 목표로 1989년부터 야학에 나갔고 열심히 공부하고 어울리고 생활했습니다. 어떤 여자를 두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기도 했으나 자기 건강하지 못함이 상대방한테 해로움과 괴로움이 될까봐 꾹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견뎌야 했습니다. 


짐작건대, 김형률의 몸은 김형률 본인한테도 굉장한 의문거리였지 싶습니다.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회에 나가서 일하고, 결혼해서 애를 낳는, 누구나 다 하고 사는 생활을 할 수 없는지?” 


그런 의문을 풀 실마리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1995년 25살 김형률은 폐렴으로 세 번이나 병원 신세를 졌습니다. 부산침례병원 특별 혈액검사 결과 ‘면역글로불린M 증가에 따른 면역글로불린 결핍증’이 병명이었고 증상은 면역력이 신생아와 차이가 없을 정도로 약해 폐렴이나 기관지확장증 등 갖은 합병증을 앓을 위험이 언제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핵피폭자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수 있으나 병원은 그 이상 얘기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몸이 이런 정도라면 보통은 몸도 마음도 다함께 지치고 잦아들어서 그냥 흘러가는대로 지낼 법도 하지만 김형률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3. 핵피폭2세의 '열정페이'


몸을 적게 움직이면서도 일을 할 수 있는 분야로 컴퓨터 관련을 꼽고 대학 진학을 위해 애썼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했으며 졸업반 시절에는 학과 연구실에서 일할 기회를 잡아 스스로 학비도 벌면서 컴퓨터 실력도 키워나갔습니다. 


그런 덕분인지 1999년에는 창원 한 벤처기업에 들어가지기도 했습니다. 업무용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였습니다. 집이 있는 부산에서는 버스를 갈아타고 두 시간 거리였습니다. ‘일정 기간 무보수로 일하는’, 요즘 말로 ‘열정페이’ 취직이었습니다. 


일이 바빠지자 자기 돈을 제법 들여서 회사 근처에서 자취까지 했습니다. 납품 기한을 맞추기 위해 밤샘작업도 마다하지 않았으나 결국 과로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김형률은 이렇게 해서 애써 얻은 직장으로부터 돈 한 푼 받아보지 못하고 퇴사해야 했습니다. 


김형률의 삶은 그 뒤로도 2005년까지 이어지지만, 그리고 이 때 삶이 훨씬 할 이야기가 많지만 저는 김형률 이야기를 이 정도에서 멈추겠습니다. 대신 제가 읽은 <나는 反核人權에 목숨을 걸었다-반핵인권운동에 목숨을 바친 원폭2세 故 김형률 유고집>의 책날개에 적혀 있는 일부를 옮기겠습니다. 

 

 

4. 핵피폭2세의 고통에 대한 최초 공개 증언


“어린 시절 시작된 잦은 병치레와 거듭된 생사의 고비들이 ‘선천성면역글로불린결핍증’이라는 병 때문이며, 그 원인이 원폭피해에 있다는 게 밝혀진 후 원폭피해2세 환우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 남은 생을 바쳤다. 2002년 3월, 국내 최초로 자신이 원폭후유증을 지닌 원폭피해자2세임을 공개하고, 이후 원폭피해2세환우회를 결성하여 한국 원폭피해자 문제를 세상에 알리는 일에 마중물이 되었다. 


2004년에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원폭피해자 실태조사를 이끌어냈고, ‘한국 원자폭탄 피해자와 원자폭탄2세 환우의 진상규명 및 인권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온 힘을 기울였다. 병약한 몸을 이끌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원폭피해자2세 환우들의 인권을 위해 애쓰던 중 지병이 악화되어 2005년 5월 29일 짧았던 생을 마감했다.” 


저는 우리나라 소설가 누군가가 이런 김형률을 소설로 다뤄 주면 좋겠습니다. 김형률은 잘만 형상화하면 이른바 ‘상품성’도 있다고 저는 봅니다. 시사성 또는 사회성은 물론 지나치게 풍부할 정도로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성’은 쓰는 작가가 스스로 담보할 수밖에 없겠지만 말씀입니다. 

 

5. 끔찍함이 유전된다는 끔찍함

 

김형률은 자기 삶을 통해 우리들 대부분이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지경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핵피폭2세의 삶과 죽음입니다. 핵피폭으로 말미암은 유전의 끔찍함입니다. 그것은 핵피폭 3세 4세 5세…… 이렇게 대를 이어 내려가는 끔찍함입니다. 


핵피폭2세에 대한 실태조사가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서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현실이 이런 끔찍함을 더욱 끔찍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또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사태 이후에는 그 끔찍함이 이제 핵피폭2세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괴로움입니다. 


김형률이 살아간 삶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합니다. 김형률 본인에게는 미안하지만 글감으로 아주 휼륭하다고까지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밋밋해 보일는지 몰라도 솜씨 있는 작가라면 충분히 또 훌륭하게 살려낼 수 있는 다이나믹한 구석이 있습니다. 

 

스물다섯 시절 김형률은 어떤 여자한테 뜨거운 연애 감정을 품었으면서도 자기 병약한 몸 탓에 그 뜨거움을 안으로 속으로 삭혀야 했습니다. 혼자 힘으로 살아남아 보려고 대학에 들어가고 취직도 하고 하려고 애쓴 처절한 청춘도 있습니다. 선천성면역글로불린결핍증이 영원한 병약함의 영원한 근원임을 알고도 절망하지 못하는 아픔도 있습니다. 


선천성면역글로불린결핍증이 핵피폭에 따른 유전 때문임을 알고 난 뒤 자기자신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핵피폭2세라고 밝히는 과정도 퍽 역동적입니다. 핵피폭1세와 2세 단체들은 김형률의 이런 커밍아웃을 반대했습니다. 

 

6. 하루하루 삶을 이어간다는 것의 피말림

 

1945년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핵폭탄을 맞은 피폭자와 그 자식들에 대한 세상의 편견과 무지와 무관심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형률은 아버지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자기가 바로 핵피폭2세라고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고상한 논리나 천상의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지상에서 날마다 치러야 하는 전투처럼 피말리는 생활 문제였습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병들어 있었던 몸과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돈이 김형률과 그 가족에게는 없었습니다. 


병든 육체와 정신을 가난이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가난은 고단한 그 식구들까지 피고름을 쥐어짰습니다. 그래서 김형률은 자기가 핵피폭 때문에 유전병을 앓고 있는 2세임을 밝히고, 그를 바탕삼아 미국과 일본과 한국에 책임과 의무를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국은 핵폭탄을 터뜨린 나라입니다.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우리나라를 식민 지배하면서 조선 사람들을 징용 등으로 끌고간 나라입니다. 그리고 한국은 명색 국가를 참칭하고 있으면서도 여태껏 이들을 한 번도 제대로 보살피지 않은 나라입니다. 


이를 비롯해 당시 김형률을 안팎으로 둘러싼 여러 조건과 상황들도 잘 살펴보면 나름 예술적으로 그럴 듯하게 재구성할 수 있는 여지가 적지 않으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김형률이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찾았을 때 어쩐지 허전하고 무엇인가 빠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나치게 평화가 강조돼 있고 일본의 피해자 측면만 도드라져 보이도록 돼 있었으며 반전(反戰)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표현이 없더라는 얘기입니다. 아마도, 김형률은 거의 본능으로 이를 알아차렸을 것 같습니다. 


김형률은 자기 몸과 마음이 바로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도 바로 그 전쟁을 일으킨 책임이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진 책임에 대해 거의 말이 없는 평화기념공원입니다. 어쩌면 거기서 김형률은 머리로 생각이 거부하기 앞서 몸이 먼저 DNA가 거부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 또한 충분히 긴장감·현장감 있게 형상화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김형률이 삶을 마감한 마지막도 어찌 보면 기가 막힙니다. 2005년 5월 김형률 일정을 보면 건강한 사람도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김형률은 그야말로 ‘병구(病軀)를 이끌고’ 우리나라 여러 지역은 물론 일본까지 오가며 열성으로 활동을 벌였습니다. 


꼭 ‘죽기를 각오한’ 사람 같다는 느낌이 저는 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그이 몸 어디에 있는 어떤 에너지가 왜 하필이면 그 때 그렇게 용송음쳐 올랐을까……, 저로서는 아주 궁금한 대목입니다. 저는 제대로 된 소설가라면 이런 대목에서 감수성이 힘차게 작동해서 상상력을 풍성하게 펼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7. 기쁨을 아는 작가와 고통을 아는 작가


아울러 김형률 그리고 김형률의 삶이 일본 그리고 일본 사람들과 안팎으로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에서 끊어질 수 없도록 이어져 있는 대목도 눈썰미 있는 작가라면 제대로 알아보고 소설 창작에 시공을 뛰어넘는 훌륭한 모티브로 삼을 수 있으리라고 저는 여깁니다. 시간 배경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한정없이 열려 있고 공간 배경 또한 한국과 일본과 미국으로 마음껏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즈음에서 생각해봅니다. 소설가 신경숙이 표절했다는 표현 가운데 하나인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가 느닷없이 인기를 모으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고통을 아는 몸이 되었다’는 표현이 인기를 끌기를 저는 바랍니다. 물론 이는 가능하지 않은 바람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살아 꼼지락거리는 모든 존재는 기쁨을 좋아하지 고통을 즐기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학은-사실은 문학만이 아니라 세상에 가치로운 모든 일은- 불가능한 것에 대해 스스럼없이 자기를 내어놓는 데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저는 압니다. 나아가, 기쁨을 제대로 알려면 그에 앞서 고통을 제대로 아는 몸이 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는 反核人權에 목숨을 걸었다-반핵인권운동에 목숨을 바친 원폭2세 故 김형률 유고집>는 2015년 5월 18일 행복한출판사에서 1만원짜리로 출판됐습니다. 김형률이 세상을 떠난 지 10주기를 맞아 세상에 태어난 책입니다. 


지은이 김형률과 엮은이 아오야기 준이치(靑柳純一)는, 설령 누군가가 이 책 어느 대목을 표절한다 해도, 그 뜻이 나쁘지 않다면 그다지 문제 삼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소설가들에게만이 아니라 희곡작가들이나 시나리오작가들에게까지 두루두루 부탁드려 봅니다. 제대로 한 번 오지게 ‘고통을 아는 몸’이 되어 보시라고요. 


김훤주 


※ <경남작가> 제27호에 실은 글을 새로 조금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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