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지심도 일본 포병에게 동백꽃은 어땠을까?

김훤주 2015. 6. 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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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으로 이름높은 섬 거제 지심도. 아울러 일제 군사시설 잔재가 가장 밀집돼 있는 데가 바로 이 지심도이기도 합니다. 제가 여태 나름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이렇게 여러 가지가 빼곡하니 남아 있는 일제 군사기지 유적을 다른 데서는 보지 못했습니다.

 

일본은 러·일전쟁(1905년)을 앞두고 진해만 일대를 장악했습니다. 지금 창원시 진해구 우리나라 해군 시설이 있는 데는 물론이고 거제도 일대가 모두 포함됩니다. 방어와 공격에서 요충임을 알아챈 일본은 1903년 거제 송진포에 방비대를 설치한 이래 거제 전역을 군사 지역으로 설정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지심도에는 원래 살던 조선 사람들을 죄다 쫓아내고 1936~38년 3년에 걸쳐 포대(100명 규모)를 설치했습니다. 2003년인가에 이를 말해주는 일본군 문서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적산(敵産) 건축물들은 모두 이 때 지어졌습니다.

 포대장=중대장 관사. 동백하우스. 현관 들머리가 아주 권위롭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정황은 이렇습니다. 일제는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켰고(괴뢰 만주국) 1937년 중·일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으며 1941년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가운데 들어선 지심도 포대는, 조선 방어용이기도 하고 일본 본토 방어용이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고려시대 왜구에서 조선시대 임진왜란까지 남해 바다는 오랜 옛날부터 침략의 바다였고 방어의 바다였습니다. 미래에도 이런 침략과 방어는 충분히 벌어질 수 있습니다. 제주도 강정 해군군사기지 설치가 이를 말해줍니다. 이처럼 전쟁이 넘치는 바다는 동시에 평화를 바라는 바다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지심도는 일제 강점기 당시도 돌아보고, 임진왜란과 그 이전 왜구까지 떠올리며, 미국·일본·중국·러시아가 맞붙을지도 모르는 미래 바다까지 아울러 볼 수 있는 전쟁 역사 전망대인 동시에 평화 역사 전망대입니다.(물론 그런 미래가 오지 않도록 바라고 애써야 하겠지만.)

 

이런 뜻에서 본다면 지심도 포대 유적을 단순한 일제 잔재로만 여기기는 어렵습니다. 여기를 4월 22일 둘러봤습니다. 두 달 가량 지나 기억이 희미해진 대목도 있습니다. 당시 현지에서 보고 주민들한테 들은 바를 최대한 그대로 옮긴다고 했습니다만, 행여 잘못이 있으면 그 책임은 모두 제게 있습니다.





포진지 유적입니다. 모두 네 군데 있었습니다. 아마 대포를 올려놓고 사방 360도 돌릴 수 있도록 이렇게 콘크리트로 시설을 만들었나 봅니다. 지금은 이렇게 옆으로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나 있지만 당시는 이렇게 두지 않고 시야 확보를 위해 나무를 베어냈었겠지요.


탄약고입니다. 포진지 가까운 데 두 군데 있었지 싶습니다. 둘 가운데 하나는 내부에 이런저런 사진과 설명글을 달아놓고 볼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말 그대로 탄약을 비롯해 포탄 총알 따위를 여기에 재어놓았을 것 같습니다. 




방향표지석입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가운데 동그랗게 돼 있는 자리에 밤에는 아마도 서치라이트가 놓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180도로 방향을 표지했을 것입니다. 절영도는 지금 이름이 영도(부산)입니다.


서치라이트(탐조등) 보관소.



배급소=포대 식당. 숲 속의 향기. 그런데 지금 모습은 그냥 흉내만 정도인 것 같습니다.


사병 막사. 앞에서 본 중대장 관사랑 견줘보면 현관 위쪽이 다릅니다. 사병 막사의 그것은 빗발이나 햇살을 가리는 정도에서 멈출 뿐 권위로움과는 거리가 멉니다. 왼쪽에서 앞으로 달아내어 지은 건물은 일제 잔재가 아닙니다. 요즘 들어 민박용으로 새로 지은 건물입니다.(아래)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안내판에 태극기게양대라 적혀 있었고 실제로도 거기에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태극기를 올려야 할까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인데, 옛날 일본 포대가 욱일승천기를 올렸던 장소입니다. 저는 태극기가 학대받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전등소 소장 관사(위쪽 사진)에서 좁다란 오솔길 건너 바로 위에 사는 할매를 만났습니다. 아주 전망이 좋은 자리(아래 사진)인데 민박도 한다고 했습니다. 이 할매한테서 여러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할매는 시집을 지심도로 왔다고 했습니다. 


할매 말씀을 따르면 전쟁 중에 미군이 한국 사람을 데리고 와서 솰라솰라 하면서 발전시설을 뜯어갔다 했습니다. 한국 사람은 아마도 통역용으로 붙였겠지요. 발전시설은 아래 사진 두 장에서 뒤쪽으로 보이는 2층 건물 자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사진 속 건물은 요즘 새로 지은 것입니다. 


할매는 이런 얘기도 해줬습니다. 당시 발전을 수력(水力)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냥 막연히 다른 방도가 없으니까, 갖고 온 석탄이나 베어낸 나무를 갖고 화력발전을 했겠거니 여겼는데 아니었습니다. 할매는 섬이 작아도 여기 이 자리는 사철 끊임없이 물이 난다고 했습니다.(아래 사진 세면대)


오고가는 가운데 한 켠에 있는 콘크리트 시설물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예전에는 눈여겨 보지 않았지만 일제 지심도 군사기지 건설 얘기를 듣고 보니 보였습니다. 물길 같은데요, 물이 잘 빠져야 길도 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군사시설로서 길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이런 군사시설이 끼치는 느낌이 나름 있었지만 아름답지는 못했습니다. 역시 아름다움은 자연의 몫이었습니다. 4월 하순이지만 동백은 이미 동백이 아니고 춘백이었습니다. 지지 않은 채 나무에 매달린 꽃도 예뻤고 이미 져서 바닥을 뒹구는 꽃들도 예뻤습니다. 




당시 여기 와 있던 포대 장졸들도 이런 꽃을 봤을 텐데, 과연 감흥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듯이, 또 일부 일본 인사들이 얘기하듯이, 당시 극한상황에서 극악한 생각만 했을 수도 있겠고 단체생활 규율이 다른 생각을 못하게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순간 떨어지는 꽃잎에 마음이 출렁출렁 흔들이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는지, 또 쏟아지는 햇살에 동백 빨간 꽃잎 푸른 잎사귀가 반짝일 때 같이 반짝인 것이 그 100명 그 마음 가운데 단 한 순간도 없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과연 일본군대 장졸들은 수풀이 가득히 그늘을 내려주는 길을 걸으면서도 전쟁 생각만 하고 사람 죽일 생각만 하고 영미(英米) 귀축(鬼畜) 때려잡을 생각만 했을까요. 아무래도 모를 노릇입니다. 저 푸른 바다 시린 끝으로 눈길을 던지면서도, 두고온 친구나 애인 생각에 눈물 흘리는 일은 아예 없었을까요.



이러거나 저러거나 동백숲은 동백숲이고 대숲은 대숲이었습니다. 햇살은 그 사이를 가르며 바닥까지 들어왔습니다. 사람만 난리를 칠 뿐 대도 동백도 꽃도 잎도 햇살도 빗발도 그냥 그대로 스스로(自) 그러할(然) 뿐인 것 같습니다. 전쟁이 무엇이냐 승패가 무엇이냐 되묻는 자연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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