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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보리밭에서, 경남엔 경관농업 왜 없나?

김훤주 2015. 5. 14.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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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풀뿌리환경교육센터와 경남도민일보가 함께 진행하는 '2015 경남도민 생태·역사기행'은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이 지원하고 있습니다.

 

습지를 비롯한 생태자연의 아름다움과 생태자연이 사람에게 끼치는 바람직한 영향을 몸으로 누리는 한편 지역사회에도 나름 알리는 일을 하자는 취지로 4년째 진행하고 있습니다.

 

5월 6일 떠난 올해 두 번째 생태역사기행은 전북 고창으로 향했습니다. 2003년 우리나라 제1호로 학원(鶴苑)관광농원이 일궈낸 경관농업이 고창군 공음면 선동리 일대에 있기 때문입니다.

 

봄이면 청보리, 여름이면 해바라기, 가을이면 메밀을 심어 농사도 알차게 지으면서 그 꽃과 잎사귀가 만들어내는 멋진 풍경까지 즐기게 하는 것입니다. 올해로 열두 번째인 청보리밭축제는 4월 18일 시작해 5월 10일 끝났습니다.

 

고창에는 또 선운사가 있습니다. 오래된 천연기념물 동백숲이 이 오래된 절간을 감싸고 있습니다. 게다가 건물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있는 '자연스러움'도 보통 미덕은 아니고요 선운천이 흘러내리는 둘레 풍경도 빼어나답니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축대가 대표하는 소박함 또한 놓칠 수 없는 매력이라 하겠습니다.

 

선운사 대웅보전과 육층석탑. 석탑이 원래는 구층이었답니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아침 8시 창원 만남의 광장을 출발해 11시 20분 조금 못 미쳐 선운사 들머리에 닿았습니다. 개울을 끼고 오르는 진입로는 여름철 피어나는 꽃무릇과 가을철 물드는 단풍으로 이름나 있습니다.

 

8월에 잎이 지고 나서야 붉게 꽃이 피기 시작하는 꽃무릇은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서로 그리워만 한다 해서 상사화(相思花)라 한답니다. 여기 단풍나무는 가을을 맞으면 흐르는 냇물에 되비치면서 이름값을 한껏 드높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 없는 봄철에 갔어도 진입로는 좋았습니다. 미나리냉이 하얀 꽃, 애기똥풀 노란 꽃, 개불알풀 자주 꽃 등등이 곳곳에 피어 있어 고개 숙여 살쳐보지 않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새롭게 돋아나 푸른빛을 더해가는 단풍나무들도 잎사귀 싱싱함이 멋졌던 것이랍니다.

 

자연 속에 들앉은 선운사의 '자연스러움'은 대웅보전 맞은편 널찍한 만세루가 대표합니다. 하지만 대웅보전 오른편 관음전도 뒤지지는 않습니다. 오래되지는 않았어도 세로로 세운 기둥은 물론 가로로 걸친 목재조차 인공을 더하지 않은 채 구불구불한 원래 몸매 그대로이거든요.

 

관음전.

 

게다가 불전이 아니라 여염 살림집처럼 들마루를 내어 임의롭게 아무나 엉덩이를 걸칠 수도 있게 해 놓았습니다. 그 마음씨가 넉넉하지 않습니까. 이름은 관음전이지만 안에 모신 주불이 지장보살(관음보살은 요즘 들어 탱화로 모셨음)인 점도 색다릅니다.

 

좌우로 넓고 앞뒤로 좁아 느낌이 한결 여유로운 대웅보전은 자연석 축대 위에 있습니다. 더없는 지혜를 뜻하는 비로자나불이 주불이고요, 좌우협시는 아픈 사람 고쳐주는 약사불과 죽은 이 서방정토로 이끌어주는 아미타불이 맡았습니다.

 

1633년 그러니까 임진왜란이 끝나고 40년이 채 안 된 시점에 조성된 불상임을 떠올리면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모신 뜻이 좀더 간절하게 다가옵니다. 엄청난 전란으로 죽거나 다친 일반 백성들을 위했던 것입니다.

 

일행은 대웅보전과 관음전을 지나 팔상전과 산신각까지 둘러보면서 그 자연스러움을 눈과 카메라에 담느라 바쁩니다. 몇몇은 기둥이나 가로로 쓰인 목재들을 손으로 쓰다듬어 봅니다.

 

대웅보전 옆에서 동백숲을 바라보는 일행들.

 

뒤편에 우거진 동백숲은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어 그 꽃그늘에 들어가 보는 호사는 이제는 누리지 못하는 옛날 일이 됐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곳곳에 송이송이 매달린 붉은 꽃잎은 멀리서 봐도 선연했습니다.

 

이어서 강당 건물인 만세루에 올라 차탁을 앞에 두고 앉으니 어디서 보살이 한 사람 나타나 차를 권합니다. 선운사 자생 차나무에서 딴 찻잎으로 만들었다는데요 향기가 독특하고 또 짙었습니다.

 

만세루에서.

 

느긋한 마음으로 한 모금씩 머금고 심신이 흐뭇해져 있는데 같은 일행이 또 어디서 흰떡을 상자째 얻어와서는 나누기 시작합니다. 다들 웃음을 한 입씩 베어무는데 누가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아따, 누가 보시를 오지게 한 모양이구먼!" 만세루 트여 있는 앞뒤로 시원한 바람이 소리없이 흐릅니다.

 

절간 들머리 빛고을식당에서 마주한 청국장 비빔밥은 아주 맛깔스러웠습니다. 배부르게 먹고는 30분가량 걸려 청보리밭 축제장으로 옮겨갔습니다.

 


보리를 심는 밭은 물을 담지 않는다는 점에서 벼를 기르는 논과 다르지요. 논은 물을 담아야 하기에 평평해야 하지만 밭은 그렇지 않아 제 멋대로 울퉁불퉁해도 그만이랍니다. 축제장으로 마련된 고창 청보리밭이 그랬습니다. 높은 데는 높고 낮은 데는 낮았습니다.

 

황토가 뒤덮은 언덕배기에서 그대로 자라나는 청보리였습니다. 높고 낮음이 있고 튀어나오고 들어가는 입체감이 있어서 밋밋하지 않고 다채로움이 있었습니다. 논은 드넓게 펼쳐지는 광활함이 매력이라면 밭은 이와 같은 입체감이 매력이겠습니다.

 

사람들은 청보리밭으로 흩어져 들어갔습니다. 사방이 온통 푸른 보리는 이제 막 이삭이 팼고요, 틈틈이 자리 잡은 유채에는 조금씩 지고 있는 꽃이 노랗게 매달려 있습니다.

 

두 갈래 탐방 루트를 따라 걷던 이들이 노란빛과 푸른색이 어우러지는 데를 골라 단체로 또는 혼자서 사진을 찍습니다. 셀카봉을 높이 쳐든 사람도 있고 예술 사진을 찍듯 여러 각도 맞춰가며 카메라를 들이대는 축도 있습니다.

 

 

걸음은 다들 느긋하고 표정 또한 한껏 여유롭습니다. 보리밭 사잇길을 가르며 둘씩 셋씩 짝지어 얘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이들도 있고 군데군데 마련된 긴의자에 앉아 양산을 활짝 펴 햇살을 가리고는 서로 어깨를 기댄 채로 나지막하게 노래를 흥얼대는 이들도 있습니다.

 

노란 양산을 배경으로 삼아 예복을 입은 채 결혼 사진을 찍는 남녀 한 쌍은 꽤 많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청보리밭 한가운데를 이리저리 거닐고 뽕나무 감나무 따위를 지나면 작은 연못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사람들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풍경을 감상하거나 사진을 찍었습니다.

 

 

10년 전 15년 전에 경관농업의 가치를 남먼저 알아보고 푸른색 여울지는 청보리밭을 가꾼 이 지역 사람들이 고마웠습니다. 이런 가운데 몇몇은 다시 가게로 스며들었습니다.

 

동네에서 빚어낸다는 동동주가 파전·두부와 함께 나왔습니다. 동동주는 특별하지 않았고 파전은 여느 지역에서도 쉽사리 맛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두부는 손맛이 남달랐습니다. 지역에서 거둔 두부를 지역 사람들이 만들었다는데요, 간간한 맛이 조금 센 듯하면서도 살이 부드럽고 씹는 맛이 고소했던 것입니다.

 

 

지형에 알맞게 작물을 기르는 농업이 남부럽지 않은 경관을 창출했고 그 경관은 다시 주민들에게 이렇게 수익을 안기는 것입니다. 오후 3시 30분, 경남에도 이처럼 경관과 농업과 수익이 공존하는 그런 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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