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뷰징. 남용, 오용, 학대 등을 뜻하는 단어인 abuse에서 파생된 단어라고 한다.(엔하위키 미러)
'기사 어뷰징'이란 말도 있다. 언론 전문지 <미디어오늘>은 "실시간 검색어 위주로 의미 없는 기사를 보도하거나 이를 반복 전송하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지난 4일 아내와 함께 태국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새벽 0시 50분 제주항공 여객기를 탔다. 이륙 직전 승무원의 안내방송이 좀 이상했다. 의례적이고 딱딱한 방송이 아니라 경상도 토박이말(사투리)이 섞였고, 무엇보다 "오늘도 우리 비행기는 186석 만석이네예. 덕분에 제 월급도 문제없이 받을 수 있겠네예."라는 대목이 웃음을 자아냈다.
어! 재밌네? 곧바로 아이폰을 켜고 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4시간 30분이 지나 김해공항에 착륙할 때도 톡톡 튀는 기내방송은 이어졌다. 이 또한 아이폰 영상으로 촬영했다.
내릴 때 해당 승무원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1976년생 대구 출신 이정아 씨였다. 흔쾌히 받아주었다. 이는 아이폰 음성메모 앱으로 녹음했다.
제주항공 승무원 이정아 씨.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그날 오후 두 영상에 서툰 실력으로 자막을 넣어 유튜브에 올렸다. 그리고 저녁 7시 좀 넘어 내 페이스북에 링크하고 반응을 살펴봤다. 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다음날인 5일 블로그에 이정아 승무원의 기내방송 전문을 정리해 올렸다. 그러나 SNS에 링크하진 않았다. 자료 정리 차원의 포스팅이었으니까.
그리고 신문 지면용 기사를 새로 써서 편집국에 넘겼다. 영상도 두 개를 합쳐 자를 부분은 자르고 제목과 자막을 추가해 1분 51초 짜리로 재편집했다. 이는 경남도민일보 유튜브 계정에 올렸다.
6일 아침 신문 4면에 기사가 실렸다. 아울러 경남도민일보 인터넷신문에도 기사가 떴다. 그런데 당초 제목이 좀 그랬다. '목적지까지 즐겁게 모시겠습니데이∼"라는 제목이었다. 인터넷 기사 제목으로는 최악이었다.
편집자에게 제목수정을 지시하고 포털에서 검색해보니 위키트리에 우리 기사를 베낀 글이 올라와 있었다. '제주항공 승무원의 신박한 기내방송'이라는 제목이었고, 내 개인 유튜브 계정에 올렸던 두 개의 동영상을 삽입해놓고 있었다. 그러나 출처 표기는 그냥 '유튜브'였다.
포털에 우리 기사의 제목이 '제주항공 승무원 톡톡 튀는 코믹 기내방송 눈길'로 수정된 후, 오후 5시 30분쯤 쿠키뉴스에 '[이거 봤어?] "빵 터지셨습니다~" 제주항공 여승무원의 독특한 기내방송'이라는 기사가 떴다. 영락없이 우리 경남도민일보 기사를 보고 베낀 것이었다.
베꼈다는 증거는 확실하다. 영상에 담긴 이정아 승무원의 말만 쿠키뉴스 기사에 실렸다면, 그냥 '유튜브 영상을 보고 기사를 썼구나'라고 봐줄 수도 있다. 그러나 미처 영상에 담지 못한 앞부분의 "오늘도 우리 비행기는 186석 만석이네예. 덕분에 제 월급도 문제없이 받을 수 있겠네예. 제가 원래 고향이 대구거든예. 그런데 (항공사에) 입사해보니..."라는 말까지 쿠키뉴스 기사에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기사나 내 블로그 글을 베끼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뿐만 아니다. "이씨의 안내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비행기에서 내리던 승객들은 출입문에서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던 해당 승무원에게 “즐거웠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라는 문장은 경남도민일보 기사에만 나온다. 그걸 보지 않은 쿠키뉴스 기자가 승객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지 무슨 수로 알 수 있나.
그런데 포털 다음은 천연덕스럽게 베껴쓴 쿠키뉴스 기사를 뉴스 메인에 썸네일 사진까지 박아서 노출했다. 실시간 검색어 순위가 올라가기 시작한 건 당연. 나는 보지 못했지만 한 때 1위까지 올랐단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베껴쓴 어뷰징 기사들이 봇물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코리아데일리, 코리아재팬타임스, 뉴스퀵, 브리핑뉴스, 티브이데일리, 뉴스엔 같은 생소한 인터넷신문부터 헤럴드경제, 민중의 소리, 민주신문 등 별의별 신문들이 어뷰징 대열에 동참했다.
특히 민중의 소리는 '제주항공 기내방송, 입담은 김신영급 외모는 박신혜급?' '제주항공 기내방송, 센스도 미모도 만점!' '제주항공 기내방송, 미술과 악기연주까지...특화 서비스 눈길' '제주항공 기내방송, 아리따운 여성의 입에서 어떻게...‘남심 흔들’' 이런 제목으로 비슷한 어뷰징 기사를 반복 전송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베끼기 기사, 어뷰징 기사에 내 블로그나 경남도민일보라는 기사 출처 표시는 없었다. 저작권 침해에다 기사 도둑질이다. 법으로 걸려면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그걸 피해가려고 내가 직접 찍은 승무원 이정아 씨 사진은 사용하지 않았다.(유일하게 코리아데일리는 그 사진을 썼다. 이건 걸면 바로 걸린다.) 대개는 유튜브 영상만 이용하고 이정아 씨 사진은 과거에 어떤 개인 블로거가 올린 것을 무단으로 가져다 썼다. 유튜브가 어차피 공개된 영상 공유 사이트라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좀 있다 보니 언론매체뿐 아니라 개인 블로그들도 어뷰징 포스트를 줄줄이 올리기 시작했고, 영상도 허락없이 퍼가서 판도라TV, 다음TV팟, 네이버 블로그 등에 올리기 시작했다.
이를 본 독자들이 열을 받았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어뷰징 기사를 비판하는 글과 댓글들이 올라왔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나는 이렇게 답변을 올렸다.
"치사하죠. 그런데 이런 베끼기 기사나 쓰고 있는 기자들은 자신이 얼마나 한심할까요. 위에서 시키니 어쩔 수 없이 쓰겠죠."
※이번 일에서 얻은 교훈.
1. 유튜브에 영상을 올릴 때 가급적 '퍼가기 금지'로 올린다.
2. 저작권 표시를 '표준 유튜브 라이선스'로 하지 않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저작자 표시'로 한다.
3. 공식 인터넷판에 올릴 때 제목을 처음부터 제대로 단다.
4. 영상에 반드시 '경남도민일보' 로고를 박는다.(사실 이번에도 넣으려 했으나, 동영상 편집자인 박민국 기자가 출장 중이어서 넣지 못했다. 내가 아직 로고 넣는 방법을 전수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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