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들 중 자신의 선행이나 미담, 수상 소식이 신문에 실리는 걸 한사코 마다하는 사람들이 있다. 겸손의 의미도 있지만, 알고 보면 또다른 내막이 있다. 그런 소식이 보도되면 '복지'나 '봉사' '자선'을 앞세운 온갖 단체에서 찾아와 기부와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정말 훌륭한 일을 하셨군요"라고 치켜세우면서 도와달라는데 거절하는 게 참 난감하다는 것이다.
나도 그런 전화를 받아본 적이 있다. 제법 알려진 무슨무슨 재단이었는데 정기 후원이나 기부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별의별 홍보나 상품구매를 권유하는 스팸성 전화는 많이 받지만, 이런 전화를 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거절하자니 내가 나쁜 인간이 되는 것 같았고, 정말 후원을 하자니 내 자발성이 무시당한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사실 기부나 후원은 스스로 알아서 할 때 가장 흔쾌한 것이다. 어떤 분야, 어떤 단체 또는 누구에게 후원할지를 결정하는 데에도 각자의 철학이 작용한다. 스스로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엔 왜 이토록 대놓고 기부를 요구하는 자선단체가 많을까? 게다가 자선이나 봉사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사기꾼 집단인 곳도 많다. 아마도 그 이유는 국가가 책임져주지 못하는 복지 사각지대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복지를 국가의 책임으로 명확히 하고 있는 유럽의 복지국가들은 자선단체도 많지 않고 GDP 대비 자선 금액도 아주 낮다. 반면 의료보험도 제대로 안 되고 사회보장 시스템도 부실한 미국은 세계에서 자선과 기부 비율이 가장 높다. 석유 재벌 록펠러가 설립한 록펠러재단, 철강 재벌 카네기의 카네기재단, 빌 게이츠와 그의 아내가 만든 게이츠재단, 거기에 거액을 기부한 워런 버핏도 모두 미국 사람이고 미국의 재단이다.
그래서 미국은 국가가 저질러놓은 천민자본주의의 모순을 부자들이 기부로 덮어주고 있는 나라라고들 한다. 국제분쟁 전문기자 정문태는 최근 <한겨레>에 쓴 '아이스버킷, 가진 자들의 비정한 얼음물 놀이'라는 글에서 미국이란 나라를 이렇게 표현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정부가 복지를 맡았듯이 미국은 자본 자체가 중요한 사회 안전장치 노릇을 해왔다. 그게 기부다. 기부가 세제 혜택이니 기업 선전을 넘어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도구였다. 단 자본이 침해당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말하자면 미국에서 기부는 부의 재분배가 아니라 생산비에 포함되는 체제 유지 비용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미국에서는 그 기부를 세상에 알리고 인정받는 걸 아주 중요한 일로 여겨왔다. 그게 얼음물 놀이에 담긴 기부 방법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나경원 아이스버킷. 미디어오늘에서 가져온 사진.
우리는 어떤가? 유럽식 복지와 사회적 안전망도 없고, 미국식 기부나 자선도 세계 최하위권에 속한다. 이래저래 없는 사람들이 가장 살기 힘든 나라가 바로 한국이란 곳이다.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기본적으로 의료와 복지, 교육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에도 대놓고 기부를 요구하거나 공개적으로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문화까지 이식되고 있다. 정작 한국 재벌들은 미국처럼 내놓지도 않는데 말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한국 재벌들에게 게이츠나 버핏처럼 하라는 말은 아니다. 대신 그들에게서 그만큼 세금을 많이 걷으면 유럽식 복지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 정부는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걷기는커녕 담뱃값만 올리려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아이스버킷을 거부하는 대신 부자증세-복지국가 실현을 위해 투쟁하는 단체에 기부한다.
※경남도민일보에 칼럼으로 실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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