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곽재우 이병철 생가 탐방과 세월호 유병언

김훤주 2014. 8. 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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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의령에 갔더랬습니다. 담장과 건물이 모두 의젓한 정곡면 중교마을 이병철 생가도 들르고 현고수와 은행나무가 장한 유곡면 세간마을 곽재우 생가도 들렀습니다.

 

30분 남짓씩 머물렀는데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습니다. 의병장 곽재우 생가를 찾는 발길은 드문드문 이어졌습니다. 삼성그룹을 창업한 이병철 생가는 보수 공사로 공개조차 되지 않는 상황인데도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찾았습니다.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터지자 본가·외가 재산을 모두 털어 의병을 모으고 전투에 나섰습니다. 기강나루전투와 정암나루전투에서 왜적을 무찔러 낙동강 서쪽 영남 내륙과 호남을 지켜냈습니다.

 

원래부터 본거지였던 의령은 물론 창녕·합천 등지에서도 용맹을 떨쳐 그이와 관련된 숱한 전설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곽재우 생가.

 

전란이 끝난 뒤 행적 또한 반듯합니다. 벼슬을 멀리해 임금이 불러도 나가지 않았고 억지로 나갔다가도 핑계를 대어 곧바로 물러났습니다. 재산을 모두 쓴 때문에 먹고살기 어려웠습니다.

 

당대 지역 공동체가 실제로 그렇게 대접하지는 않았겠지만, 패랭이를 삼아 입에 풀칠을 했다는 얘기가 지금껏 남아 있을 정도랍니다.

 

그이는 이렇게 낙동강가 망우정에서 가난하게 말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런 삶을 산 데는 사정이 여럿 있었겠고 곡절도 많이 있었겠지요만, 말하자면 자기 한 몸 부귀영화를 좇지는 않았습니다.

 

이병철은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지금 아들 이건희가 회장으로 있는 삼성그룹은 이병철 시절에도 대한민국 으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이나 유럽 같은 데서와 마찬가지로 자산가로서 사회에 이바지한 바가 많을 수도 있을 텐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노조 부정, 정경유착, 사카린 밀수, 뇌물수수, 재산 편법 상속 등등 사회에 끼친 해악이 더 컸습니다.

 

이병철 생가. 보수하느라 이렇게 높이 둘러친 탓에 담장 구경만 할 수 있었습니다.

 

돈만 된다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는다는, 우리 사회 자본주의를 더욱 천박하게 만드는 악영향까지 끼쳤다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병철 이병철 하면서 그이 생가를 많이 찾습니다.

 

제가 보기에 원인은 간단합니다. 우리 마음 속 돈 욕심입니다. 이병철만큼은 되지 못하더라도 아낌없이 펑펑 쓸 만큼 많이 돈 벌고 싶은 마음에 거기 생가를 찾아 풍수지리인지 무엇인지에서 말하는 그런 기운을 조금이나마 받아 제것으로 삼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이가 저지른 악행은 떠올리지도 않으며, 누가 옆에서 그런 말 할라치면 돈 버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었던 무엇이라 타박까지 합니다.

 

동시대 인물과 견주면 어떨까요? 같은 의령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나선 안희제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병철보다는 스물다섯 살이 많습니다. 그이 생가는 부림면 입산마을에 있는데 찾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알려진 정도가 이병철이나 곽재우에 훨씬 못 미치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병철과 마찬가지로 자산가였던 안희제는 무역을 해서 번 돈을 중국 상해임시정부에 조달했습니다. 이병철이라면 생각도 못했을 일을 했고 그렇게 나라 독립을 위해 나선 탓에 일제 고문을 받아 죽고 말았습니다.

 

안희제 생가.

 

사람들이 드문드문 찾는 곽재우 생가, 줄줄이 발길이 이어지는 이병철 생가, 거의 언제나 쓸쓸한 안희제 생가. 자본의 욕망을 내면화한 지금 이 시대 우리들 징표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공공의 이익을 위한 말과 생각과 행동을 우리는 이렇게 푸대접을 하고, 세상에 해악을 끼치면서까지 자기 앞으로 부귀영화를 쌓은 말과 생각과 행동은 칭송하고 본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니 세월호 참사를 불러온 장본인으로 손가락질받는 유병언의 돈 욕심을 어떻게 나무랄 수 있을까요. 또 공적 지위에 있으면서도 공동선보다는 사리사욕을 더 위하는 그런 고위 공직자를 어떻게 탓할 수 있을까요.

 

현고수(懸鼓樹). 곽재우가 의병을 모을 때 북을 매달아 놓고 쳤다는 나무입니다.

'나'도 그이들처럼 자본의 욕망을 내면에 장착했음이 분명하고, 그래서 그이들 차지한 자리에 '내'가 앉았어도 별반 다르지 않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했을 텐데 말씀입니다.

 

김훤주

 

※ 8월 19일치 경남도민일보에 데스크 칼럼으로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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