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루트

 

운암영당→34.6km 화개장터 →6.4km 쌍계사 →2km(왕복 4km) 불일폭포 →5.2km 범왕리 푸조나무 →바로 시내 건너편 세이암

 

유·불·선에 두루 고루 능했던 고운 최치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을 두고 옛적부터 사람들은 신선이라 일러 왔습니다. 아마도 죽음이 확인되지 않았기에 가능한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진성왕 8년(894년)에 시무 10조를 올리고 6두품으로서는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관직인 아찬(兒飡)이 됐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개혁안을 임금은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세상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이 이어지자 벼슬을 버리고 곳곳을 떠돌았습니다.

 

<삼국사기>를 따르면 그 뒤 최치원은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숨어 살다가 말년을 마쳤습니다. 아무런 경계도 매임도 없이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돌았던 신선과 같은 그이의 자취는 전국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불일폭포 가는 길에 있는 불일암 평상.

 

정말 이렇게 많은 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어쩌면 후세 사람들이 그의 높은 이름을 빌려 빼어난 풍경을 덧붙이지 않았을까, 의문을 품어봄직은 합니다. 어쨌거나 최치원이 지금조차도 그런 대접을 받고 있는 데에는 유·불·선 모두를 아우르는 그이의 사상이 크게 작용했다고 봐야 맞을 것 같습니다.

 

고운은 <계원필경(桂苑筆耕)>(886년)을 비롯해 많은 시문을 남겼습니다. 12살에 중국 유학을 가서 18살에 빈공과에 장원급제했다. 25살 되던 881년에는 당시 반란을 일으킨 지 7년만에 당나라 수도 장안까지 점령했던 황소에게 보내는 격문을 썼고 이 격황소서(檄黃巢書)가 명문으로 알려지면서 크게 이름을 얻었습니다.

 

또 우리나라 유학(儒學)의 시조라고도 하지요. 세상을 떠난 지 10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인 고려 여덟 번째 현종 시절 공자 사당에 모셔졌고(1020년) 널리 알려진 시호 문창후(文昌侯)도 1023년에 내려졌습니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도 최치원을 일러 신라 말기 이름난 유학자(羅末名儒)라 했습니다.

 

최치원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당대 고승들의 비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최치원이 실제 지은 비문은 매우 많았겠지만 지금껏 남아 있는 것은 넷이라 합니다. 이른바 ‘사산비명(四山碑銘)’인데 조선 광해군 전후 철면(鐵面)노인이 최치원의 문집 <고운집(孤雲集)>에서 가려 뽑아 붙인 이름이라 합니다.

 

불교를 배우는 이들이 읽어서 익히는 독본 교과서가 됐을 만큼 내용이 그럴 듯하답니다.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대공영탑비, 만수산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초월산 숭복사지비,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등입니다.

 

쌍계사에 있는 진감선사대공탑비.

 

불교를 깊이 이해하고 나아가 선종에는 공감하는 태도까지 보이지만, 사상 표현보다는 문장 수식에 더 많이 공을 들였다고 합니다. 도교에 대해서도 나름 깊이 있게 알고 있었다고 말해집니다.

 

<삼국사기>는 진흥왕 37년 원화(源花)를 다루는 기사에서 최치원이 지은 난랑비 서문을 끌어쓰고 있습니다. “나라에 심오하고 미묘한 도가 있는데 풍류라 한다. ……삼교(三敎)를 포함한 것으로 여러 백성을 교화했다. 들어가면 집안에서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함은 공자의 뜻이요, 자연 그대로 행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함은 노자가 주장한 요지며, 모든 악한 짓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함은 부처의 교화다.” 풍류=화랑도의 내용을 논하면서 유불선이 합일함을 짚은 대목이랍니다.

 

반면 그이가 지은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두고는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가 나오기는 합니다. 신라에 고유한 임금 명칭인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이사금(尼師今)·마립간(麻立干)을 쓰지 않고 죄다 ‘왕(王)’으로 바꿨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김부식은 <삼국사기> 지증마립간 기사에서 스스로 묻고 답했습니다. “행여 말이 야비해 족히 부를 것이 못 된다는 까닭일까? <좌전>·<한서>는 중국 역사 서적이지만 오히려 초나라 말과 흉노 말 등을 그대로 남겨두었으니, 이제 신라의 일을 기술함에 그 나라말을 남겨두는 것은 또한 마땅하다.” 한 사람이 모든 방면에서 두루 다 좋을 수는 없는 모양인가 봅니다.

 

사람들이 고운을 신선으로 여겼음을 일러주는 운암영당 영정

 

 

최치원을 두고 후세 사람들이 신선이라 여겼음을 알려주는 그림이 있습니다. 경남 하동군 양보면 운암영당 ‘고운선생 영정’(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87호)입니다. 고운 최치원의 자취를 따라 떠나는 이번 여행길이 여기서 시작되는 까닭입니다.

 

운암영당.

 

 

오른쪽 위에 문창후최공지진영(文昌候崔公之眞影)이라 적혀 있는 여기 고운 영정은 문신상입니다. 대체로 신선으로 그려져 있는 다른 고운 영정과는 크게 다른 것입니다. 오른편 문방구가 놓인 탁자와 왼편 촛대 받침을 두고 뒤로 구름 속 대나무를 배경으로 삼았습니다.

 

비단 바탕에 당채(唐彩)로 그려진 이 전신상은 관복을 입고 검은 사모까지 쓰고는 두 손을 맞잡은 채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데 풍만한 느낌을 줍니다. 가슴 흉배는 화려하고 허리띠는 단순하게 처리함으로써 사대부와 유학자로서 엄숙한 풍모를 그려내 보였다 합니다.

 

운암영당 고운 영정. 국립진주박물관.

 

그런데 이 영정의 숨은 비밀이 2009년 밝혀졌습니다. 아울러 만들어진 시기까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됐습니다. 국립진주박물관이 조사한 결과였습니다. 오른쪽과 왼쪽 탁자와 받침이 그려진 부분에 X선을 쬐자 아래에 다른 그림이 확인됐습니다.

 

고운영정에 가려져 있었던 동자승.

 

동자승 둘이었습니다. 최치원을 신선으로 인식하고 그렸음을 알려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아래쪽에는 화기(畵記)도 나타났습니다. ‘건륭(乾隆)58년’ ‘하동 쌍계사’. 그린 사람과 시주한 사람 이름도 나왔습니다. 건륭 58년이면 1793년이랍니다. 당시까지는 1860년 제작된 청도 고운영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66호)이 최고(最古)였습니다.

 

청도 고운영정. 해인사본 최치원입니다. 신선으로 그려져 있지요.

 

이 고운 영정은 옛날 선비들이 최치원을 단순한 문인이 아닌 신선으로 여겨왔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만합니다. 푸른 학이 노닌다는 지리산 청학동. 역사상 으뜸 문인으로 꼽히는 최치원이 청학동에 숨어들었다는 전설이 만들어진 이후 많은 선비들이 발걸음을 거기로 돌렸습니다. 그이들도 신선이 되기를 꿈꿨는지는 모르겠으나 최치원은 오래 전부터 그들 마음 속에서 이미 신선이었던 것입니다.

 

영당 벽에 그려진 고운 행적들.

 

사람 발길이 잦지 않은 시골길 한 편에 자리잡고 있는 운암영당은 고즈넉합니다. 들머리에 길게 늘어서 있는 잘 자란 나무를 따라 올라가면 금방 영당이 나온답니다. 고운영정이 지금 이 자리에 놓이기까지 여러 곳을 떠돌았습니다.

 

 

처음엔 쌍계사에 있다가 순조 25년(1825) 같은 하동의 화개 금천사(琴川祠)로 옮겼고, 고종 5년(1868) 금천사가 없어지자 하동향교로 옮겨온 다음 1902년 횡천영당을 거쳐 1924년 운암영당으로 왔습니다. 한 평생을 떠돌며 곳곳에 자취를 남겨 놓은 고운 생전 행적과 많이도 닮았습니다.

 

고운 영정을 횡천영당에서 옮겨왔다는 기적비.

 

고운 최치원의 자취를 따라 가는 길에 걸음을 붙잡는 곳이 화개장터입니다. 경남과 전남을 이어주는 화개장터는 해방 전만 해도 우리나라 5대 시장 가운데 하나였다 합니다.

 

지리산 화전민들은 고사리·더덕·감자 등을 팔고, 전남 구례와 경남 함양 같은 내륙 사람들은 쌀보리를 팔았습니다. 전국을 떠돌던 보부상들도 생활용품을 지고 왔으며, 전남의 여수·광양이나 경남의 남해·삼천포(사천)·충무(통영)·거제 등에서는 뱃길로 미역·청각·고등어 따위 수산물을 싣고 왔습니다.

 

화개장터는 김동리 소설 <역마>의 무대이기도 하답니다. 체 장수 영감과 딸 계연 그리고 주모 옥화와 성기의 얽히고설킨 인연과 운명을 그려냈습니다. 거스르지 못하고 결국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 져야 할 운명인지 스스로 극복하는 것이 운명인지를 묻는 작품이랍니다.

 

고운 최치원과 그의 삶은 운명에 순응한 것일까요? 아니면 스스로 극복한 것일까요? 느닷없이 떠오르는 조금은 뜬금없는 생각이기는 하지요.

 

화개장터 대장간.

 

화개장터도 옛날의 시골 정취를 온전히 느끼기에는 시절이 많이 변했습니다. 국밥집, 재첩국집, 주막이 늘어서 있고, 엿장수 엿판이나 대장간 앞에 관광객이 북적이지만, 지금 이 화개장터가 예전만 못한 것은 거기에 삶의 절실함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글씨로 사람을 맞는 쌍계사의 고운 최치원

 

여기서 쌍계사(경상남도 기념물 제21호)까지 이어지는 십리벚꽃길. 봄이면 넘쳐나는 벚꽃이 굉장하지만 여름에는 그 꽃 진 자리에 무성하게 내려앉는 그늘이 장관입니다.

 

이 길 따라 쌍계사에 이르면 고운 최치원의 자취를 또 만날 수 있는데, 진감선사대공영탑비(국보 제47호)가 그것입니다.(입장료 어른 25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삼법화상이 당나라에서 혜능스님(중국 선종의 제6조, 남종선 시조)의 정상(頂相=머리)을 모시고 와서 봉안함으로써 비롯됐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난야(蘭若)라고 할만한 조그맣고 한적한 수행처였으리라 짐작되는데요, 진감선사(774~850)가 들어서 절간 모습을 새로 갖추고 옥천(玉泉)이라는 현판도 올렸습니다. 840년으로 짐작됩니다.

 

쌍계사 들머리 일주문.

 

쌍계사 이름은 헌강왕 1년(886) 왕명을 따라 바꿨습니다.(같은 지역에 옥천이라는 이름을 쓰는 다른 절간이 있으므로 헷갈리지 말라고)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1632년 벽암스님이 중창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무슨 대단하기만 한 절간 같지만 사실은 푸근한 구석도 많습니다. 이 푸근함 때문에 찾는 이들이 더 많을는지도 모른답니다. 절간을 푸근하게 해 주는 가운데 하나는 대웅전(보물 제500호) 바로 옆 투박한 불상입니다.

 

쌍계사 마애불(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호)이 정식 이름인데 원래부터 여기 있었음직한 커다란 바위 한가운데를 그냥 널찍하게 파내고 거기다 새긴 불상입니다. 앉아 있는 모습인데, 어째 부처님 같이 보이지가 않는답니다. 어쩌면 이웃 아저씨 같기도 하고 어쩌면 어린아이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찾아오는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듯합니다.

 

쌍계 석문.

 

또 다른 푸근한 물건은 들머리 쌍계 석문(雙溪石文)이랍니다. 바위 둘에 제각각 ‘쌍계’와 ‘석문’이라 새겼는데, 보통 사람 눈에는 그다지 잘 쓴 글씨로는 보이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오히려 편하고 만만하게 보이지 싶은데요, 어쨌거나 최치원이 여기를 지나는 길에 지팡이로 썼다고 합니다.

 

오른쪽 바위에 적혔습니다. 왼쪽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팔영루(八泳樓: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4호)도 그럴 듯합니다. 예전에는 건물 밑으로 오르내릴 수 있었지만 지금은 막아놓고 다른 용도로 쓰기에 옆으로 돌아 오르내려야 합니다. 하지만 바라보는 눈맛이 좋고 제대로 다듬지 않은 듯한 굵은 기둥들은 손맛을 더해줍니다.

 

팔영루와 대웅전 사이에는 고운 최치원이 쓴 진감선사대공영탑비가 살짝 비틀어진 각도로 놓여 있습니다. 깨어졌다 다시 맞춘 듯 얇고 가는 철판으로 둘러놓았습니다. 죄다 한자로 돼 있어 내용을 알기 어렵고요, 안내문도 설명이 풍성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200자 원고지로 50매가 넘는 상당히 내용이 많기는 하지만 보고픈 이는 보라고 번역문이라도 좀 붙여 놓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진감선사의 한살이를 적었는데요, 쌍계사 관련 내용이 많습니다. 선사가 쌍계사를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이겠습니다. 드문드문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쌍계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진감선사대공영탑비 탁본.

 

830년 당나라에서 귀국해 처음 상주(尙州) 노악산(露岳山) 장백사(長栢寺)에 머물다 걸어서 강주(지금 진주) 지리산에 이르니 호랑이들이 이끌어 화개 골짜기 삼법화상이 세운 절의 남은 터에 당우(堂宇)를 꾸려 절간 모습을 갖췄습니다.

 

838년 민애왕이 진감선사한테 혜소(慧昭)라는 이름을 내렸고 몇 해 뒤 남령의 기슭을 얻어 선려(禪廬)를 지었습니다. 대통을 가로질러 시냇물을 끌어다 돌아가며 물을 대고 옥천(玉泉) 현판을 걸고 육조영당(六祖靈堂)을 세웠습니다.

 

850년 정월 9일 새벽 “장차 갈 것이다. 탑을 세워 형해를 갈무리하지 말고 명(銘)으로 자취를 기록하지도 말라” 하고는 앉은 채로 입적했습니다.

 

진감선사대공탑비.

 

대공탑비 기록을 따르면 진감선사는 “평소 범패(梵唄)를 잘해 목소리가 금옥 같았다. 구슬픈 곡조에 날리는 소리는 상쾌하면서도 슬프고 우아해 천상의 신불(神佛)을 환희하게 하였다. 먼 데까지 흘러 전해지니 배우려는 사람이 가득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범패를 했던 데가 팔영루라고 합니다. 바로 앞 섬진강 물고기를 보고 팔음률로 불교 음악인 어산(魚山)을 지었다고 팔영루라 한답니다.

 

쌍계사 뜨락.

팔영루에서 대웅전을 바라보고 서면 오른편에는 건물이 별로 없고 왼편에 많습니다. 금당 영역이랍니다. 혜능의 머리를 모셨다는 금당(육조정상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5호)에는 육조정상탑이 있고 육조정상탑·세계일화조종육엽(六祖頂相塔·世界一花祖宗六葉)이라 쓴 추사 김정희 친필 현판도 있습니다.

 

이밖에 팔상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7호)·영주당·봉래당·청학루(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5호) 등이 있습니다. 여기를 스님이 아닌 보통 사람들은 동안거·하안거를 하지 않는 때에만 들어가 볼 수 있습니다.

 

쌍계사 경내에서 불일폭포로 가는 길 가운데 최치원이 학을 불러 타고 날아갔다는 환학대(喚鶴臺)가 있는데, 여기서 진감선사대공탑비 비문을 지었다고 합니다. 잘 다듬어져 있는 길에서 신선이 살았다는 청학동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치원 이후 선비들은 푸른 학이 노닌다는 청학동을 찾아 다녔고 또 기록을 남겼습니다. 고려 때 이인로는 “지리산 속에 청학동이 있다. 길이 매우 좁아 겨우 다닐 수 있고, 몸을 구부리고 몇 리쯤 가면 넓게 확 트인 드넓은 곳이 나온다. 오직 청학만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조선 선비 김일손은 불일평전을 청학동으로 전해 듣고 찾아가 봤으나 찾을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이는 16일 동안 지리산을 탐방했습니다. 서산대사는 ‘두류산 신흥사 능파각기’에서 화개동천 동쪽 드넓고 푸르른 골짜기에 청학동이 있다고 봤다고 했습니다. 쌍계사에서 불일전대(佛日前臺)에 오른 1600년대 선비 미수 허목 또한 그 남쪽 골짜기에 청학동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불일평전 휴게소.

 

옛 사람들은 불일평전이나 불일폭포 둘레를 청학동이라 여겼지만 몸소 들어가 보고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청학동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번뇌와 망상이 사라진 마음자리 그 자체인지도 모릅니다.

 

불일폭포는 물이 풍부하게 넘쳐흐르지는 않지만 60m 높이에서 2단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볼만하며, 절벽 표면이 화강암 폭포의 그것처럼 매끈하지 않고 울퉁불퉁하답니다. 남명 조식은 지리산을 둘러보고 쓴 <유두류산록>에 불일폭포와 청학동을 읊은 ‘영청학동폭포’ ‘청학동’이란 시를 남겼습니다.

 

불일폭포.

 

지리산에서 고운의 마지막 행적은 지팡이 꽂고 귀 씻기

 

불일폭포에서 돌아나와 범왕리 푸조나무(경상남도 기념물 123호)로 발길을 돌립니다.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 앞에 있는 이 나무에는 최치원과 관련된 전설이 있습니다. 최치원이 지리산 신흥사로 들어갈 때 꽂아 두었던 지팡이에서 싹이 나서 자랐다는 나무가 바로 이 푸조나무입니다.

 

범왕리푸조나무.

 

고운 최치원은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나도 살아 있고 나무가 죽으면 나도 죽을 것이라 했다고 합니다. 푸조나무는 여태 살아 세월을 견디고 있습니다. 고운 또한 신선이 되어 어디에 살아 있는 것일까요?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에 잘 견딘다는 푸조나무는 소금기 없는 산골마을에 자리를 잡고 수호신처럼 든든하게 서 있습니다.

 

범왕리 푸조나무. 옆에 정자가 조그맣게 보입니다.

 

푸조나무가 내려다보는 마을 앞 냇가 건너편에 세이암(洗耳嵒)이 있습니다. 의신마을에서 내려오는 화개천이 여기서 너럭바위를 만나 넘쳐흐릅니다. 이 너럭바위에 한자로 세이암이라 적혀 있습니다. 바로 옆은 물론이고 맞은편 세워져 있는 바위에도 이런저런 글자들이 새겨져 있지만 최치원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마을에서 만난 할머니 한 분은 “(최치원이) 손가락으로 이래 적었다 아이가. 그만큼 신통력이 있었던 기라” 했습니다. 손가락으로 썼어도 바위가 움푹 파일 만큼 도력이 세었다는 얘기입니다. 이쯤 되면 여기 사람들에게는 최치원이 어김없는 신선입니다.

 

오른쪽 위에서 아래로 새겨져 있습니다. 왼쪽 글씨는 무슨 사람 이름 같습니다.

 

최치원은 세이암에서 속세의 더러운 말을 들은 귀를 씻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됐습니다. 여기는 물이 맑고 바위가 많아 게가 살기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도 게가 없다고 합니다. 최치원 때문이라 하지요.

 

여기서 몸을 씻고 있는 최치원의 발가락을 게가 물었습니다. 최치원은 게를 잡아 멀리 던지며 “다시는 여기서 사람을 물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뒤로 게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왼편 너럭바위가 세이암입니다.

 

세이암.

 

비슷한 이야기는 경남 함양의 상림숲에서도 전해집니다. 상림은 고운 최치원이 태수로 있던 시절 만든 마을숲이지요. 어느 날 최치원의 어머니가 상림에 나갔다가 뱀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얘기를 들은 최치원은 곧바로 숲으로 달려가 “모든 해충은 다시는 이 숲에 들지 말라” 했고 그 때부터 뱀이나 벌레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최치원은 어째서 지금까지 신선으로 남아 있게 됐을까요? 그이가 대단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라는 데에는 다른 말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이의 학문은 유교에만 머물지 않고 불교와 도교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더욱이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남겨 놓은 자취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신선이 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높은 학문을 가졌음에도 당대에 뜻을 펴지 못한 불우함에 대한 사람들의 동정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최치원을 마음에 품음으로써 최치원과 자기 또는 자기 부류를 동일시하고자 하는 무지렁이 백성들의 은근한 바람도 작용했을 듯 싶고요.

 

그렇다면 요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신선으로 섬김을 받고 있을까요. 이미 지금은 신통력이 거의 모든 부분에서 사라져 버린 세상인지라 마음에 신선으로 품음직한 대상은 아예 없어져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훤주

 

※ 2012년 출판된 문화재청 비매품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을 조금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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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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