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가는 문화유산 여행길

김훤주 2014. 7. 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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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루트

 

거제대교 한산대첩 승전지 견내량 통영타워 전망대 →29.8km 칠천교 칠천량 해전 → 칠천도 일주도로를 따라 한 바퀴(13km) →17.1km 옥포대첩기념공원 →9km 옥포대승첩 기념탑(대우조선해양 동문 둘레 아양공원) → 56.2km (구조라 학동 여차 등 남부해안도로를 타고) 거제현 관아 →27.2km 이순신 공원 →2.1km 통영시 문화마당(통영 중앙시장, 삼도수군통제영 병선마당) →1.2km 통영 서호시장·통영 여객선 터미널 →배 타고 25분 내린 다음 1km 통영 한산도 제승당(돌아나온 다음 여객터미널) →1.3km 세병관 →0.7km  충렬사 → 36km 고성 당항포(이순신이 왜군을 속여 당항만으로 들게 만들었다는 까닭으로 붙은 속개라는 마을(지금 소포)이 있는 지점인 동진대교까지는 가던 그대로 8.8km를 더 가면 된다) → 51.2km 국립진주박물관 →52.1km 남해 이락사

 

한산대승첩과 친천량 대패가 교차하는 거제도

 

23전 23승, 그이는 싸움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고 이런 그이를 두고 우리는 ‘불멸의 이순신’이라 합니다. 우리나라 역사 인물 가운데 세종대왕과 더불어 이순신에 대한 관심이 유독 많은 까닭이랍니다.

 

업적 못지않게 인간적인 면모도 크게 한 몫을 합니다. 사령관으로서 카리스마와 백성과 부하에 대한 애정, 부모에 대한 효성에 이르기까지가요. 여기에 더해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이순신 유적지 성역화가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고 말았답니다.

 

통영타워에서 내려다보는 견내량.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가는 문화유산 여행길’은 통영 견내량(見乃梁)에서 시작됩니다. 통영에서 거제로 가는 길 끝에 두 다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옛 거제대교이고 또 하나는 거제대교입니다. 거제대교 입구에 그럴듯한 건물이 서 있는데 통영타워 전망대(입장료 1000원)입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견내량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견내량은 경남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를 잇는 좁은 해협으로 옥포해전과 한산대첩의 현장이랍니다. 한산대첩(閑山大捷)은 조선 수군의 제해권을 확립하고 전라도 곡창을 지킨 전투였습니다. 이로써 조선은 왜군에 맞설 수 있는 뒷심을 갖추게 됐습니다.

 

1592년 음력 7월 8일 학익진으로 전투에 나선 조선 수군은 왜군을 전멸하다시피 만들었답니다. 작전은 여기 견내량에 있던 적선을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내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견내량의 왜선 76척 앞으로 이순신은 13척만 보냈고 그것을 병력의 전부로 착각한 왜군은 곧바로 추격해 너른 바다로 나오고 말았습니다.

 

견내량. 통영타워에서.

 

리 준비하고 있던 조선 수군은 왜선을 포위하듯이 하면서 전투를 벌여 적선 47척을 깨뜨리고 12척을 나포했으며 9000명 가까이 죽였으나 조선 수군은 고작 3명이 전사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1597년의 칠천도(七川島)는 엄청난 패배의 현장입니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7월 16일(음력)에 조선 수군이 여기서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김완은 <해소실기>에서 처음에 조선 수군을 공격한 왜군 병력이 단 두 척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김완은 칠천량해전에서 조방장으로 나섰으나 왜군에게 사로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 탈출해 돌아온 인물입니다.

 

칠천도는 2000년 1월 거제도와 연륙교로 연결됐습니다. 제대로 전투도 못해 보고 무너졌음은 <선조실록>에서도 확인됩니다. 1597년 7월 22일치 세 번째 기사에서 유성룡이 임금에게 아뢴 내용입니다.

 

칠천도 들머리 칠천량해전 안내비.

“칠천도에 도달했을 때가 밤 2경이었는데 왜적은 어둠을 틈타 잠입해 있다가 불의에 방포하여 우리 전선 4척을 불태우니 너무도 창졸간이라 추격해 포획하지도 못했고, 다음날 날이 밝았을 때에는 이미 적선이 사면으로 포위하여 아군은 부득이 고성으로 향했습니다. 육지에 내려보니 왜적이 먼저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우리 군사는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조선 수군의 손해는 엄청났습니다. 거북선을 비롯해 판옥선 100척 남짓이 침몰됐으며 군사 2만명 정도가 목숨을 잃거나 포로가 됐고 경상우수사 배설이 갖고 달아난 전선 12척이 전부였습니다. 반면 왜군은 100명 안팎만 죽거나 다쳤고 전선 피해는 없었습니다. 제해권은 왜군에게 넘어갔습니다.

 

이순신과 원균, 그 차이는 무엇일까

 

칠천량해전 당시 이순신은 군중에 있지 않았습니다. 앞서 선조 임금은 1597년 2월 6일 이순신을 잡아오고 원균과 교대시키라고 명령했습니다. 3월 13일 선조는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면서 신하들에게 처리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으며, 그러다 4월 1일에는 백의종군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순신은 4월 27일 도원수 권율이 머물던 순천에 도착했고, 이어 도원수부가 있던 경남 합천 초계로 갔습니다. 칠천량해전 소식이 전해진 7월 18일, 해안을 둘러보고 대책을 세우겠노라고 길을 나서 7월 21일 남해와 하동 사이 노량에 도착합니다.

 

임금이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삼으라고 명령한 날은 하루 뒤인 7월 22일이고, 이때부터 이순신은 남은 전선을 수습하는 등 제해권 회복을 위한 활동에 나섭니다. 칠천량해전 패배를 계기로 이순신은 복권됐습니다.

 

칠천량 바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지휘관으로서 제 몫을 다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원균을 두고 이런저런 평가가 나오고 있는 것은 물론입니다. 칠천량해전 당시 원균은 시기가 안 좋아 지금 싸우면 불리하다 했으나 권율이 곤장을 때리고 출병을 강요했다는 설이 그렇습니다. 일방적인 원균 매도는 이순신을 영웅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다 맞습니다.

 

하지만 이런 점은 분명히 짚을 수 있겠습니다. 원균은 칠천량해전에 앞서 7월 4일 부산포로 나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물을 얻으러 가덕도에 정박했는데요, 이 때 왜군이 기습하자 군사가 400명 정도 남아 있는데도 달아났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1597년 2월 13일 가덕도에서 ‘병사도 아닌’ 초동(樵童) 1명이 맞아 죽고 5명이 왜군에게 끌려가자 바로 공격해 왜군 14명을 죽이고 17명을 다치게 함으로써 이튿날 곧장 돌려보내게 만들었습니다. 원균과 이순신의 다른 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이순신 불패 신화의 시작 옥포해전

 

옥포해전(玉浦海戰)은 이순신이 이룬 조선 수군의 첫 승전입니다. 1592년 5월 7일 경남 거제 옥포 앞바다에서 도도 다카토라의 왜군 함대를 무찌른 해전으로 이순신 장군이 이룬 전승 신화의 시발점입니다. 불패신화의 시작인 셈이지요.

 

옥포대첩기녕공원.

 

옥포대첩기념공원 기념관.

 

옥포대첩기념공원 기념탑.

 

옥포대첩기념공원 앞바다. 오른쪽으로 대우조선해양이 있습니다.

 

옥포대첩기념공원 옥포루.

 

옥포대첩기념공원 효충사.

 

효충사 이순신 영정.

 

이런 옥포해전을 기념하는 옥포대첩기념공원이 거제시 옥포 2동에 있습니다. 기념관은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며 떠 있는 판옥선 모습입니다. 옥포루에 오르면 정면으로 옥포만의 푸른 바다를 볼 수 있고, 아래 파도가 거친 방파제에는 지금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기념공원보다 앞서 1957년에는 옥포만에 내려다보이는 당등산에 옥포대승첩기념탑이 들어섰는데요, 바로 여기에 대우해양조선이 들어섬에 따라 1975년 옥포정(1963년 세움)과 함께 지금 위치(대우해양조선 남문 옆 아양공원)로 옮겼다고 합니다.

 

옥포대승첩기념탑.

 

옥포정.

 

이순신 장군의 자취를 찾아가는 길은 거제도를 둘러보고 다시 통영으로 나갑니다. 빠른 길을 두고 남부 해안도로로 잡는 까닭은 아름다운 해안 풍경을 배부르게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남부해안도로를 타고 가며 보는 거제 바다.

 

수선화 같은 꽃으로 유명한 공곶이, 와현·구조라 해수욕장과 학동몽돌해수욕장을 지나 해안을 따라가면 잘 다듬어진 꽃길이 눈길을 끈답니다. 이른 봄 붉디붉은 동백 꽃길이 어느새 수선화 수국길로 이어집니다. 수채화 같은 광경이 펼쳐지는 일몰도 장관입니다.

 

여차몽돌해수욕장을 지나는 그 길에서 들르는 곳이 거제현 관아랍니다. 거제현 관아(巨濟縣 官衙)는 사적 제484호로 지정돼 있다. 거제기성관(巨濟岐城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1호)은 조선시대 거제부의 행정·군사를 통괄하던 기관의 중심건물입니다.

 

기성관.

 

이 또한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는데 당시 고현성이 함락되자 조정에서는 거기를 폐성하고 건물을 거제현으로 옮겨 거제현 객사로 썼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초등학교 교실로 쓰였습니다. 배흘림기둥에 단순·소박하게 공포를 뒀고 전체 9칸에서 가운데 3칸은 지붕을 높인 반면, 양쪽 3칸씩은 낮춤으로써 눈으로 볼 때 역동적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질청.

 

거제질청(아전들이 업무를 보거나 수령 자녀들이 공부하던 곳)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6호입니다. 조선 중기 지어진 우아하고 정중한 건축이라는데 ‘ㄷ’자 형태로 가운데 5칸은 대청이고 양쪽 5칸씩은 방들도 두고 있는 유별난 모습이어서 눈길이 절로 끌립니다.

 

이순신 시절부터 통제영의 고장이었던 통영

 

이렇게 해서 넘어온 통영입니다. 통영 중앙시장은 평일에도 북적일 만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답니다. 가까운 망일봉 자락에 통영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지는 풍광이 아름다운 이순신공원이 있습니다.

 

이순신기념공원에서 보는 바다.

 

이순신기념공원 장군상. 광화문 느낌이 팍 납니다.

 

중앙시장 앞 바다에는 통제영 거북선과 좌수영 거북선이 떠 있어 여기가 이순신의 고장임을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저녁 6시 이전에 여기 오면 내부 모습을 둘러볼 수도 있습니다.

 

통영 강구안 거북선들.

 

거북선 내부 모습.

 

중앙시장에서 조금만 가면 서호시장이 나오는데요, 중앙시장만큼이나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랍니다. 서호시장 도로 건너편에 통영 여객선터미널이 있는데 이곳에서 한산도 가는 배를 탈 수 있습니다.

 

시간마다 제승당이 있는 한산도를 오간답니다. 한산도에서 전남 여수를 잇는 뱃길(한려수도)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말을 듣는답니다. 한려해상국립공원입니다.

 

왼쪽부터 제승당 수루 비각.

 

한산도는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돼 있던 조선 수군의 근거지였으며 앞바다에서는 한산대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로 시작되는 이순신 장군의 시조로 유명한 ‘수루’도 여기 있답니다.

 

한산대첩 하면 누구나 학익진(鶴翼陣)을 떠올린답니다.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이라 붙은 이름인데 육지전투에서 쓰던 전형적인 포위·섬멸전 형태라 합니다. 사방에서 포위하고 한꺼번에 공격하는 것입니다.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는 한산도 앞바다는 배가 침몰됐을 때 헤엄쳐나갈 길이 없답니다.

 

한산도는 당시 무인도나 다름없어 상륙한다 해도 굶어 죽기 알맞았답니다. 왜선은 속도가 빠르기는 했으나 서둘러 회전을 하기는 어려운 구조였습니다.(바닥이 뾰족했거든요.) 그래서 뒤쪽에까지 전선을 배치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제승당.

 

제승당 내부.

 

 

왜군은 대부분 전사했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명 가량은 양식이 없어 13일 동안 바닷풀을 뜯어 먹다가 뗏목을 만들어 겨우 달아났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알듯이, 이순신의 한산대첩은 권율의 행주대첩, 김시민의 진주성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힙니다.

 

한산대첩 이후 한산도에 들어선 제승당(制勝堂:사적 제113호, 당시 이름은 운주당運籌堂)은 1593년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면서 삼도수군통제영 본영이 됐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해군작전사령관실인 셈이지요.

 

1948년 초중학생 성금으로 세운 제승당 한글비.

 

제승당에는 이순신 영정이 있는 영당을 비롯해 한산대첩기념비, 유허비, 많은 송덕비와 사정(射亭)인 한산정, 수루 등이 있습니다. ‘ㄷ’자 모양인 바다 건너편에 과녁이 있는데 이런 사대는 전국에서 하나뿐이라 합니다.

 

한산대첩 승전지를 일러주는 거북등대.

 

배를 타고 바다를 오갈 때 거북 등대가 보입니다. 등대라 하지만, 뱃길을 일러주는 것이 아니고 한산대첩 승전지가 거기임을 알리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제승당 수루에서 바라본 한산도.

 

수루는 이순신과 관련해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에 담고 있는 장소랍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閑山島明月夜 上戍樓撫大刀 深愁時何處 一聲羌笛更添愁)” 하는 ‘진중시’의 탄생지이지요.

 

수루.

 

왼쪽 위에 진중시가 걸려 있습니다.

 

또 1491일치 난중일기 가운데 1029일치가 여기서 쓰여졌답니다. 이순신은 여기서 시도 많이 남겼습니다. 사람들은 이순신을 ‘성웅’이라고 일컫습니다. 겉으로는 강직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적인 그이가 고민과 갈등과 외로움을 여기 수루에서 시와 일기로 달랬을 뒷모습이 그려지는 듯합니다.

 

제승당 충무사.

 

이순신 영정.

 

세병관(洗兵館:국보 제305호)은 선조 37년(1604) 이경준 제6대 통제사가 이리저리 떠돌던 통제영 본영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완공한 그 뒤 1895년 모든 군영이 없어질 때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중심 건물이었답니다. 앞면 9칸·옆면 6칸 크기로 더없이 웅장합니다.

 

 

세병관.

 

네 면이 모두 트여 있고 안쪽에도 막힌 데가 하나도 없이 기둥만 가지런합니다. 우리나라 목조건물 가운데 서울 경복궁 경회루, 전남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평면 면적이 가장 넓은 건물로 꼽힙니다. 소설가 박경리를 비롯해 등 통영 출신 유명 인사들이 ‘국민학교’를 다닐 때 학교 건물로 쓰였답니다.

 

통영 충렬사.

 

임진왜란 최후 전투 노량해전에 바쳐진 목숨

 

통영 충렬사(統營 忠烈祠:사적 제236호)는 세병관 가까이에 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위패를 안치하고 제사를 지내는 목적으로 세워진 사당이랍니다. 선조 39년(1606) 제7대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왕명으로 세웠고요, 현종4년(1663) 남해 충렬사와 함께 충렬사 현판을 하사받았습니다.

 

해마다 역대 통제사들이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충무공의 주된 활동 무대가 한산도를 비롯한 통영 근처였기 때문에, 이순신이 숨진 장소인 남해 관음포 이락파와 이곳 두 군데에 사당을 세웠던 것입니다.

 

통영에서 고성 당항포까지는 30정도 걸린답니다. 고성군 회화면과 동해면 사이 당항만은 이순신장군이 선조 25년(1592년)과 27년(1594년) 두 차례에 걸쳐 왜선 57척을 수장한 전승지입니다.

 

당항포해전관.

 

당항포 해전과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지명이 몇몇 남아 있습니다. ‘속싯개’는 당항포 일대를 일컫습니다. 월이라는 기생이 왜군 첩자의 지도에다 실제와는 다르게 그려넣어 당항만이 막힌 만이 아니라 트인 바다로 알도록 속였다는 전설에서 나왔습니다.

 

‘잡안개’라는 지명은 왜군을 잡았다는 ‘잡은개’에서 바뀐 말이라 합니다. 당항리 동쪽 ‘핏골’은 당시 피로 물들었다 해서고요, ‘도망개’는 왜군이 도망한 길목이라 해서고요, 당항만에 들어오는 좁은 해협을 이르는 ‘당목’은 닭의 목처럼 길고 좁다 해서 붙은 이름이랍니다.

 

충무공당항포대첩기념비.

 

당항포 해전이 있었던 옆에는 당항포관광단지가 들어서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당항포해전관·거북선체험관·충무공디오라마관·승충사 등이 단장돼 있습니다. 여기서는 오토캠핑도 할 수 있는습니다.

 

이밖에 고성자연사박물관·고성수석전시관·공룡엑스포주제관·공룡캐릭터관·빗물체험관·공룡나라식물원·레이저영상관·생명환경농업체험관·한반도공룡발자국화석관·공룡콘텐츠산업관·수영함도 있습니다. 입장료(어른 6000원, 청소년 4000원, 어린이 3000원)가 헐한 편이 아니니까 만약 들어가게 된다면 빠짐없이 두루두루 돌아보는 편이 낫겠다 싶습니다.

 

국립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 최대 격전지인 진주성에 있는,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이랍니다. 특정 인물 중심 영웅사관이나 순국사관에 매몰되지 않고요, 임진왜란이 일본이 일으킨 참혹한 침략전쟁인 한편으로 조·명·일 국제전쟁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국립진주박물관.

 

이순신의 격전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길의 마지막은 남해 이락사(李落祠) 일대랍니다. 정식 이름은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南海 觀音浦 李忠武公 遺蹟)으로, 사적 제232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관음포 앞바다는 이순신 장군이 숨을 거둔 바다라는 뜻으로 ‘이락파(李落波)’라 한답니다.

 

이락사는 순조 32년(1832) 왕명에 따라 세운 제단과 유허비·비각입니다. 바로 옆에는 남해군이 만든 이순신영상관이 있습니다. 이순신 관련 복합미디어 전문전시관이라 합니다. 임진왜란 발생 배경과 전개, 이순신 장군 중심 국난 극복 과정 등을 한·중·일 세 나라의 눈높이에서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순신영상관.

 

입장료는 어른 3000원, 청소년 2000원, 어린이 1500원이며 월요일은 쉰답니다. 이순신은 여기 앞바다 1598년 11월 벌어진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200척밖에 없는 이순신은 곱절이 넘는 500척 왜군 앞에서도 전투를 명령했습니다. 200척 넘는 왜군이 격파됐고 나머지 50척 남짓만이 관음포 쪽으로 겨우 달아났습니다. 이순신은 달아나던 왜적을 뒤쫓다 총탄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싸움이 지금 급하니 함부로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말라.”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공후사(先公後私)를 했던 것입니다. 지금 걸려 있는 ‘이락사(李落祠)’, ‘대성운해(大星隕海)’ 현판은 1965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쓴 것입니다. 말 그대로 대성운해-큰 별이 바다에 떨어졌습니다.

 

첨망대.

 

첨망대에서 바라보는 관음포 바다.

 

여기 관음포 앞바다는 저녁 해질 무렵이면 햇살을 받아 붉은 핏빛으로 물듭니다. 이락사에서 바다 쪽으로 500m 들어가 첨망대에 오르면, 그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딱히 슬프지 않고 그렇다고 기쁘지도 않지만, 과연 사람살이에서 최선은 무엇인지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의 가닥들이 머리 속을 떠다닙니다.

 

김훤주

※ 2012년 출판된 문화재청 비매품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을 조금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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