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를 열었더니 메일이 하나 와 있었습니다. “농협과 보도로 인한 일이 생겼습니다. 이 기사가 문제가 될는지 한 번 봐주시겠습니까?” 합천신문 박황규 발행인이 발신인이었습니다. 합천동부농협이 거래 상대 업체한테 부당한 처사를 했다는 내용.

 

기사를 띄워 읽어봤더니 크게 문제점은 없었지만 합천동부농협쪽 얘기가 충분히 실리지는 않은 기사였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잘 아실 텐데, 왜 이랬을까?”

 

하지만 정작 알고 싶었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일개 지역 주간신문이, 어떻게 자기 지역 유력기관 비판기사를 이렇게 대놓고 실을 수 있었는지가 더 궁금했거든요.

 

 

1. 발행인이 작성한 합천동부농협 비판 기사

 

합천신문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기초자치단체 단위 지역 주간신문이 맞지만, 박황규 발행인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지역 주간신문 발행인이 아니었습니다. 대표이사이고 사장이기도 하지만 신문에는 발행인이라고만 적는답니다. 발행인은 직원들에게 급여를 주는 일도 하고 관리하는 일도 하지요.

 

 

편집인은 서정한 편집국장이 맡고 있다고 합니다. 2009년 세상을 떠난 선친의 친구로 어린이·청소년 생활시설인 합천애육원 원장이기도 하답니다. 발행인과 편집인이 다른 경우를 지역 주간신문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박황규 발행인은 이번(4월)에 합천군으로부터 ‘국선도 수련인 모산재 생기체험 프로그램’을 맡아 진행하면서 알게 됐습니다. 몇 차례 만났는데 지역 주간신문 사장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먼저 지나치게 젊습니다. 1974년생 범띠입니다. 몸매나 입성, 얼굴 생김새도 사람들이 떠올리는 지역 주간신문 사장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쩌면 매우 순진해 보였습니다. 훌쩍 키가 크면서도 마른 체질에 즐겨 입는 헐렁한 생활한복도 그런 느낌을 줬습니다.

 

 

5월 2일 마산에서 만나자마자 합천동부농협 보도부터 물었습니다. “합천동부농협 얘기를 싣지 못한 것은 맞아요. 몇 차례 전화 연락을 했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거든요. 기사는 팩트가 있으니까 썼고 그 팩트가 분명하니까 꿇리지 않고 떳떳합니다.

 

그런데 합천동부농협은 합천군청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 합천신문 폐간을 주장하고 저희와 보도된 업체 사이 금전 거래가 있지 않나 의혹까지 제기했습니다. 왜곡된 사실을 보도했다면서 언론중재위원회 회부나 명예훼손 소송 제기도 말했습니다. 저희가 왜곡 보도라면 정확한 사실이 뭔지도 밝혀야 마땅한데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합니다. 오히려 저희 명예를 훼손하고 있어요.”

 

배달 나갈 준비를 하는 박황규 발행인. 뒤에서는 어머니가 전단을 끼우고 있습니다.

 

합천동부농협 보도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일까? 일단 먼저 보도된 내용을 보면, 언론중재위원회에 넘어가도 반론보도는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정정보도는 받아들일 필요가 없어 보였습니다. 박황규 발행인 말대로 보도가 팩트와 일치한다면 그렇다는 말씀이지요.

 

“합천동부농협의 힘이라든지 이런 것 모르고 시작했습니다. 물론 알았다 해도 보도를 안 하지는 않았겠지요. 업체 당한 사연이 구구절절해요. 우리 사회 ‘갑’의 횡포를 실감하게 하는…… 이럴 때는 약자 편을 들어야 해요. 힘센 쪽은 그러잖아도 잘하거든요. 이번에 하나 나갔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숨고르기는 하겠지만 저희한테 확보된 팩트가 더 있습니다. 끝까지 갈 겁니다.”

 

2. 꽉 깨문 어금니와 앙다문 입술이 낯설었던 까닭

 

박황규 발행인은 이런 이야기 끝에 어금니를 꽉 깨물었습니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결연한 모습은 이번에 처음 봤습니다.

 

신문 배달 나가는 길에 마중 나온 딸이 사진을 찍는다니까 손짓을 해보이고 있습니다.

 

보통은 실실 잘 웃는데다 인상까지 선량해 무엇 하나 맺힌 것 없는 사람처럼 여겨진답니다. 합천군 공무원들조차 ‘신문사 사장이나 기자가 아니라 귀농한 농촌 총각 같다’고 얘기할 정도니까요. 한 순간 그이의 앙다문 입술이 살짝 낯설었던 까닭이랍니다.

 

“합천신문사는 창간일이 1995년 12월 11일입니다. 부친(박환태)께서 창간하셨는데, 2009년 세상을 떠나시면서 ‘신문사만큼은 꼭 이어나가면 좋겠다’고 유언을 하셨습니다. 제가 장남이거든요. 대한민국에는 장남으로 태어난 업보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합천신문사를 떠맡게 됐습니다.

 

기자 생활 한 적은 없습니다만, 아버지를 돕고 하면서 어느 정도 친숙은 해져 있었습니다. 아버지 덕분에 하는 것 아니냐 해도 틀리지 않으니까 스스로 부족하다 여기고 또  사실이 그러니까 숙이고 다닙니다. 정식 기자 교육도 받고 활동도 그렇게 했으면 자부심도 갖고 어깨도 펴고 다닐 텐데…….”

 

기자가 되려고 생각한 적도 없고 신문사를 경영하겠다는 생각은 더더욱 한 적이 없는 사람이 덜컥 <합천신문> 대표이사가 되고 발행인이 되고 또 기사까지 쓰게 됐습니다. 대학도 글쓰기나 신문·방송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종교학과를 나왔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하고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언론이 너무 이렇게 좋은 것만 써주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나쁜 것도 써야 한다, 이런 것을 알게 됐습니다. 악의적으로 쓰고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요. 보통 사람들은 섣불리 말을 못하거든요.

 

서민들은 지역에서도 그런데 신문에서 대신해 주면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아, 이게 신문 인지도를 늘리고 인정을 받는 길이구나! 영 너무 반대되는 반항적인 길로 갈 필요는 없지만요. 이슈는 바로 숨기지 않고 바로 해야겠다!

 

제대로 된 언론 역할, 좋은 것은 좋다 하고 나쁜 것은 과감하게 나쁘다 할 수 있는 신문, 제보가 들어왔거나 이슈가 된 것은 보도를 해야 한다. 일단 알아야 한다. 작거나 크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빼버린다든지 정말 축소시킨다든지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3. “배달을 하면 사장이 아니라 배달부 마음이 된다”

 

 

독자를 바라보고 지역 주민들을 마주하면서 배우고 느낀 점이라 합니다. 합천신문이 ‘합천의 조선일보’라는 말도 아직은 왕왕 듣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요즘 합천신문 보도가 자꾸 이상해지고 있다’는 반응도 적지 않게 나오는 데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마 1995년 합천신문 창간 이래 한 번도 거르지 않은 신문 배달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선친께서는 일당백, 근면·성실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어요. ‘대부(大富) 재천(在天), 소부(小富) 재근(在勤)’이라고, 큰 부자는 하늘에 달렸지만 작은 부자는 부지런함에 달려 있다고요.

 

신문 배달도 강조하셨고요. 저는 물론 식구 모두가 신문 배달에 거부감이 없습니다. 솔직하게 어떤 신문도 겁 안납니다. 조선일보도 합천서는 300부 수준인데 합천신문은 5000부 찍어서 집집마다 다 돌립니다.

 

 

독자들한테 군민들한테 가까이 가는 신문이라야 합니다. 소시민적인 군민들에게 이웃 같은 신문으로 가지 않으면 살아나기 힘들겠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통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이미 통하지 않습니다.

 

신문 배달을 하면 건강해지고 게을러지지 않습니다. 마음이 사장이 되지 않고 신문배달부 마음이 됩니다. 권위주의적인 생각이 안 듭니다. 우편 발송 비용도 아낄 수 있습니다. 새벽에 일하는 분들을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도 큽니다. 환경미화원은 많이 알고, 식당도 일찍 여는 집은 압니다.

 

막일꾼들도 많이 만나는데, 저희 따뜻하게 챙겨주고 그러십니다. 늦어도 6시 나갑니다. 일주일에 이틀 하루에 두세 시간 신문을 돌립니다. 주간신문인데 굳이 아침에 나갈 필요가 있느냐고요? 신문은 아침에 보는 게 맞는 것 같더라고요. 낮에는 신문 대신 일을 봐야 하니까.

 

재미있습니다. 하하. 겨울에는 야광 처리가 된 배달복을 입는데요, 옷만 보고도 누군지 알아보고 반갑게 말을 건네는 이들도 많답니다.”

 

박황규 발행인 아내의 신문 배달 복장.

4. 식구 모두 ‘우리는 배달의 가족’ 자부

 

박황규 발행인뿐만 아니라 식구들은 모두 신문 배달에 대한 기억, 이젠 세월이 흘렀으니 추억이 됐겠는데 그런 게 있답니다. 선친이 물려준 유산이겠지요.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그런 유산보다 더 크고 소중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박황규 발행인의 배달복. 한국도로공사의 한밤중 작업복이라 합니다.

 

“저희 집은 슈퍼마켓과 신문지국을 함께 했습니다. 선친께서 지국장으로 신문과 인연을 맺고, 나중엔 기자로도 활동하셨죠. 경험이 있었기에 나중에 합천신문도 창간하게 됐고요. 신문 배달이나 물품 배달, 카운터 보기 등을 자식들에게 시키셨습니다.

 

그런 경험이 저희 네 남매한테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모두 아침마다 신문을 접고 배달을 가야 했습니다. 어릴 때는 아침 일찍 일어나기 참 싫잖아요. 그때는 신문배달이 아주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는 인식까지 있었죠. 저희 네 남매 모두, 특히 여동생이 아주 싫어했지만, 작은 구역이라도 꼭 돌리도록 하셨죠.

 

저는 중학생쯤 됐고 동생은 초등학생 때였는데, 저와 누나·여동생은 신문배달을 하러 다 떠났는데, 막내 남동생이 새벽 추운 날씨에 신문 돌리기가 싫어 방안에 있다가 아버지께 꾸중을 듣고 울면서 나가 멀리도 못 가고 길가에서 신문뭉치를 안고 앉아 계속 울었습니다.

 

배달 모습 1.

 

어둑어둑한 새벽 4~5시였겠는데, 술집아가씨 몇몇이 일마치고 가다가 남동생을 봤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경기도 좋았고 집안 형편 어려운 아가씨들이 술집에서 일하는 경우도 많은 시절이었고요. 한 아가씨가 돌아와서는 동생 주머니에 손을 넣더랍니다.

 

동생은 자기 돈을 훔치려 하나 오해를 했었는데 나중에 보니 주머니에 꼬깃꼬깃 접혀진 지폐가 있었다고 하네요. 어떤 아가씨인지 예나 이제나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자기 남동생을 떠올리지 않았을까요? 남매끼리 명절에 만나면 그 이야기를 자주 하면서 그 시절을 떠올립니다.

 

지금은 가정주부인 누나가 한때 아시아나항공 스튜어디스를 했었는데 그때 면접에서 집과 부모에 대해 물었을 때, 집에서 슈퍼마켓을 하는 아버지를 도와 음료수 상자 배달도 많이 해서 무거운 것도 잘 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고 합니다.

 

배달 모습 2.

 

당시 면접관이 이를 좋게 봤고 합격하는 데도 당연히 도움이 됐다고 합니다. 이렇게 누나는 물론 여동생까지 선친께서 딸이라도 봐주지 않고 남녀 평등하게 또 강하게 키웠기 때문에 다들 사회에 진출해 다들 아주 잘 살아나갑니다.

 

지금은 오히려 장남인 저를 많이 걱정해줍니다.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는지, 하며 말씀입니다. 하하. ‘배달의 민족’이라는 말을 흔히 쓰는데, 저희 식구가 바로 ‘배달의 가족’입니다. 신문 배달을 위해 일찍 일어나 힘차게 뛰면서 일하는 것, 바로 저희 가족의 정신이고 합천신문을 지탱하는 힘이라 생각합니다.

 

지금도 신문배달 하는 목·금요일은 새벽부터 부산합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어머니는 신문에 전단 넣고, 우편발송용 신문은 접어둡니다. 저와 아내는 각자 맡은 구역 배달을 나가고요. 이 ‘배달의 정신’을 저는 언제나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일당백으로 노력하는 것, 누구에게 미루지 않고 직접 일해 나가는 것, 놀고먹지 않고 당당히 일을 해서 밥값을 하는 것…….”

 

배달 모습 3.

 

5. 3대가 빨리 나타나면 좋겠다는 2대 발행인

 

제대로 수지타산을 맞추기는 하는지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모든 신문이 다 어렵다니까 드는 생각이지요. 게다가 합천신문 수입원은 오로지 광고료와 구독료뿐이라니까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나마 사옥을 갖고 있어서 유지비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그게 좋고요, 수지타산은 따지자면 본전치기? 저까지 유급 종사자가 4명인데, 직원들만 급여를 챙겨주고 저는 월급을 가져가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경영 안정, 활성화가 먼저입니다. 이익을 따지면 할 수 없습니다. 장남이 이어받았으면 좋겠다는 선친 유언이 없었으면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배달 모습 4.

 

그래도 안팎으로 시스템을 갖추려고 합니다. 경남도민일보 보니까 지면평가위원회라든지 편집규약 같은 것 갖췄더라고요. 그런데 지역 주간신문으로서는 번거롭다는 생각도 듭니다. 시민기자제도는 운영합니니다. 합천군 17개 읍·면에 20명 안팎 있습니다. 이들이 쓰는 기사도 적지 않습니다.

 

월요일마다 오전 11시에 하는 편집회의도 있습니다. 예전부터 이어져온 전통이랄 수 있는데요 논설위원이나 시민기자도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모여 의견 교환을 하고 지역에 특이한 이야기가 있으면 듣고 합니다. 이런 시민기자제도와 편집회의가 힘이 많이 됩니다.”

 

그이는 처음부터 특별하게 방향을 정해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권위주의적이지 않고 소탈한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또 좁은 지역에서 이런저런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부정한 결탁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울러 편집과 보도에서도 열린 자세를 보여왔습니다.

 

배달 모습 5.

 

그런데 박황규 발행인의 으뜸 소원은 뜻밖에도 신문에 있지 않았습니다. “제가 2대 발행인인데, 3대가 빨리 오면 좋겠습니다. 남동생이 받으면 가장 좋겠지만, 꼭 가족이 아니라도 창간정신을 이을 수 있는 사람이면 괜찮습니다.

 

저는 지금도 제가 신문 발행인이라든지 기자라는 데서가 아니라 국선도 수련인이라는 데서 제 정체성을 찾습니다. 대학 들어가던 1993년 국선도에 입문했으니까 올해로 22년이 되네요. 2002년 대학 졸업하고서는 내내 전문 수련인으로 사범을 했습니다.

 

서울 강남 일산 청담동 도장에서였는데요, 새벽 5시 20분 지도를 시작해 끝나면 저녁 9시였습니다. 신문·방송은 보지도 않았고 시사에 대해 관심 끊고 세상사 접어놓고 살았었습니다. 남들 하는 얘기만 들었습니다. 듣는 것 잘하고, 잘 들어주기를 좋아합니다. 하하.

 

배달 모습 6.

 

지금은 신문도 꼬박꼬박 읽고 인터넷 검색도 열심히 합니다만. 지금도 수련인이라는 끈을 잇고 싶어서 합천에만 있는 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 국선도 수련 지도 봉사 활동도 나갔고 합천종합사회복지회관 국선도 프로그램 지도도 하고 있습니다.”

 

국선도 수련인들은 대체로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답니다. 자기한테 주어진 무엇이 있을 때, 피할 수 없겠다 싶으면 군말 없이 그냥 맡아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선도 사범’ 박황규가 ‘합천신문 발행인’ 박황규로 바로 바뀐 데도 그런 사정이 작용했지 싶습니다.

 

아무리 선친 유언이라 해도 별 갈등 없이 여지껏 자기 하던 일 단번에 걷어치우고 나서기가 쉬웠겠습니까? 나중에 어찌 될지까지 지금 알 수는 없지만, 지금 합천신문 박황규 발행인은 독자들이나 지역 주민들에게 편하게 여겨지는 기자이고 언론인인 것은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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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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