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나무만 누려도 저절로 맑아지는 낙안읍성

김훤주 2014. 4. 29.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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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 낙안읍성에 가서, 성곽이나 초가집 그리고 잘 다듬어진 돌담 정도만 그럴 듯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사실 그런 것들이 처음 보는 눈에는 색다르고 도드라져 보이기는 하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지난 4월 10일 가봤더니 정작 훌륭하고 엄청난 것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래 된 나무들이었습니다. 들머리에서부터 끄트머리까지, 그리고 중간중간에 가지가지 나무들이 옛적부터 지키고 있던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봄철이다보니, 줄기와 가지 곳곳에서 삐져나오는 그 푸르름이란! 시시각각 달라지는 그 연녹색 잎사귀들! 사귀고 싶은 잎사귀들, 볼수록 빛나는 잎사귀들, 가까이 다가가 보면 솜털이 보송보송한 잎사귀들, 그러면서 동시에 들기름을 칠한 듯 윤이 나는 잎사귀들.

 

 

 

자기 생명을 유지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처럼 다른 존재들에게까지 보탬이 되고 도움이 되는 존재는 아마도 동물쪽에서는 드물거나 없지 않나 싶은 것입니다. 그 자리에 붙박혀, 자연이 주는 것만 받으면서도 저리도 장한 존재가 나무들입니다.

 

 

물론 오랜 세월 살다가 고사한 나무도 있었습니다. 조금 썰렁한 느낌을 주기는 했지만 그또한 자연스러워 좋았습니다. 지난 세월을 보여주기도 하고, 저렇게 서 있으면서 죽어서도 세월이 꾸며주는 치장을 조금씩 해마다 철마다 하게 되겠지요.

 

초가지붕 둘러쓴 민가 뜨락들은 또 어떤가요. 감나무 모과나무 대추나무 따위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집 처음 지어진 시기랑 나무가 심긴 시기랑이 비슷하지 않을까 짐작이 되는데요. 돌담 위로 키를 키워 놓은 이런 나무들도 마냥 좋기만 했습니다.

 

 

 

 

낙안읍성에는 성곽과 민가와 관청만 있지는 않습니다. 샘도 있고 인공 습지인 연못도 있고 거기 노니는 물고기도 있고 거기 자라는 마름 같은 물풀도 있습니다. 마을 역사와 함께 심겨져 자라온 우람한 나무들도 더불어 있습니다.

 

 

 

 

그런 나무 아래 삽상한 그늘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어린 잎사귀들이랑 사귀고 싶습니다. 거기 나무들 말없이 버티면서 살아온 100년 200년 300년 세월에, 진정으로 옷깃 여미고 매무새 단정하게 경건함을 바치고 싶습니다. 언제나.

 

 

이제 겨우 50년 남짓밖에 살지 않았는데도 팍삭 지쳐 버린 한 인생이. 그렇게 팍삭 지쳐 버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사람이라는 존재로 태어난 그 자체에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한 인생이. 자기 몫이 아닌 것을 끊임없이 자기것으로 삼아야 존재할 수 있는 한 인생이.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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