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통제영에 주전소가 있었던 까닭은?

김훤주 2014. 4. 26.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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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삼도수군통제영이 복원됐습니다. 옛날에는 세병관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분위기였는데, 이번에 가니 예전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나름 짜임새가 있어 보였습니다.

 

물론 여기저기 어색하거나 맞지 않는 구석도 없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지금 눈 앞에 이렇게 복원이 됐다는 자체가 고마워서 그랬는지, 그런 것들은 앞으로 고치고 채워 나가면 되겠지 싶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저는 주전소가 가장 뜻깊게 여겨졌습니다. 제 모습이 확인된 우리나라 유일한 주전소 터라는 의미도 적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통제영에서 이처럼 화폐를 독자적으로 발행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자체가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화폐 독자 발행권을 가졌을 정도로 책임과 권한이 세었고 그만큼 통제영이 중요했음을 입증하는 유적이니까요.

 

다음으로 멋진 것을 꼽자면 후원이 아닐까 합니다. 세병관과 운주당 뒤쪽 언덕배기 여기저기에 초가지붕이나 기와지붕을 이고서 서너 채가 들어서 있는데요, 올라가 앉아 보니 여기서 바라보는 통영 풍경이 무척 그럴 듯했습니다.

 

 

 

 

오른쪽 지붕들 아래에서 주전소 터가 발굴됐습니다.

 

 

아울러 대숲이라든지 크고 굵은 나무들이라든지도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봄 여름에는 불어오는 바람이 여기서는 더욱 시원할 것 같았고, 가을에는 알록달록 색깔을 입은 잎사귀들이 더욱 빛날 것 같았으며, 겨울에는 내리쬐는 햇살이 여기서 더욱 다사로울 것 같았습니다.

 

기삽석통(수자기帥字旗)를 꽂아 두는 데 썼던 돌통)과 석인(오방기五方旗 꽂아두는 데 썼던 돌인형)들 발굴해 내어 앞에다 세워놓은 것도 좋았습니다. 그 돌들 재질이 화산활동 영향을 받은 듯이 보였는데요, 문화동 돌벅수랑 질감이 비슷했습니다.

 

발굴된 기삽석통.

 

새로 만들 기삽석통에 꽂혀 있는 수자기.

 

석인들.

 

아마도 통영에서 많이 나는 돌을 갖고 만들었지 싶은데요, 옛날 선조들이 그랬듯이 앞으로 우리도 이렇게 자기 동네에서 나는 재료를 갖고 무엇이든 만들고 다듬고 세우고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저절로 지역특색이 살아나니까요.

 

보기만 해도 그 투박한 맛이 기분좋게 휙휙 감겨들었습니다. 적어도 제게는 말씀입니다. 군사용 의전용으로 만들었을 테니까, 당대 석공들이 그 모습을 새겨넣는 데에 정밀함 정확함 이런 따위는 아무래도 필요가 없었겠지요.

 

내아, 그러니까 통제사 살림집으로 기억합니다만.

운주당이나 거기 딸린 살림집, 그리고 12공방 복원은 좀 그저 그랬습니다. 나쁘다는 얘기는 절대 아닙니다. 복원 자체만으로도 소중하고 뜻깊다고 저는 생각하니까요. 다만 예산이 적었던 탓인지 거기 쓰인 목재들이 허접스러워 보였던 것입니다.

 

12공방 공록당.

 

12공방들. 오른쪽 핑크빛 벽이 보입니다.

 

그리고 벽에 칠해져 있는 색깔이 맞지 않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습니다. 운중당 쪽은 그래도 그럭저럭 제대로 돼 있는 것 같았지만 12공방은 전체적으로 볼 때 영 아니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있지도 않았을 색깔(이는 조선 시대 우리 선조들 색감이 덜 떨어져 있었다는 뜻도 아니고 색깔 만드는 기술이 모자랐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핑크빛을 거기다 올려놓았던 것입니다.

 

거기 핑크빛이 제가 알기로는 우리한테 고유한 색깔이 아니고 서양에서 들어온 색깔입니다. 물론 이런 것이 고칠 수 없을 그런 정도는 아니고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바로잡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 통제영이 꼴은 제대로 갖주게 됐습니다. 일제강점기 소학교로 쓰여져 소설가 박경리 선생 같은 이들 책 읽고 공부했을 세병관에 더해 새로 복원을 하면서 이러저런 면모를 갖추게 됐습니다.

 

세병관에서 임금 궐패를 모셨던 중심 자리. 바닥을 높여놓았습니다.

 

궐패 모시던 자리에서 내다본 모습.

 

 

통제사 비석군.

 

앞으로 좀더 정확하게 좀더 제대로 자리잡게 하는 일만 하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크게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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