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옻칠미술관 안 들르고도 통영 다녀왔다고?

김훤주 2014. 3. 2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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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통영옻칠미술관 관장

 

‘옻칠’이라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그다지 낯설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옛날부터 내려온 전통 공예 가운데 하나이니까요. 그러나 실제로 우리 곁에서 한 번 찾아보면 아예 없는 때가 많답니다. 언제부터 이리 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씀입니다.

 

이런 옻칠에 평생을 바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1935년생인 김성수 통영옻칠미술관 관장입지요. 1월 28일 오후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통영 용남면 화산리 그 미술관에서 만났을 때 그이에게서는 진짜 향기가 나고 있었습니다.

 

옻칠이 경남의 브랜드인 까닭

 

“지금 경남에도 신경 쓰는 사람이나 단체가 전혀 없기는 하지만, 옻칠은 경남의 브랜드입니다. 한 번 짚어볼까요? 창원 다호리 고분군에서 옻칠 붓·부채·그릇 등이 나왔어요.

 

 

중국 영향이 없는 자생적 옻칠이었지요. 2200년 전에 말입니다. 2011년에는 다호리 고분군 옻칠이 고유한 우리것임을 밝히는 고고학 논문도 나왔어요.

 

또 합천 해인사에 고려시대 만든 팔만대장경이 있잖아요? 그 경판이 다 옻칠이 돼 있어요. 지금까지도 보존이 완벽하게 되는 까닭이 이 옻칠에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계 문화 유산이 경남에 있으니 옻칠이 경남 브랜드라는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통영에다 열두공방을 설치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상하칠방입니다. 상하칠방에서 자개 장식에다 옻칠을 더해 나전칠기를 만들었으니 지금과 바로 연결되는 역사만도 420년입니다. 그러니 옻칠이 경남 브랜드라 하지 않을 수 없지요.”

 

옻칠 분야 으뜸이 되기까지

 

통영이 고향인 김성수 관장은 1951년 나전칠기 공예에 들어선 옻칠 분야 최고 전문가·예술가입니다. 홍익대 교수, 숙명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와 학장, 디자인대학원 원장 등도 지냈습니다.

 

잔입니다. 하나에 8만원. 무척 예뻐서, 냉큼 사고 말았답니다.

 

그이 옻칠 작품은 현대 미술의 본고장으로 꼽히는 미국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답니다. 이런 그이가 2006년 통영으로 돌아와 오로지 자기 힘만으로 옻칠미술관을 열었습니다.

 

“1951년 청와대가 부산에 와 있었어요. 경남도청 소재지가 대한민국 임시 수도가 된 거지. 사람들이 피란을 와 있었는데 금붙이를 갖고 있어도 팔 데가 없어서 다들 굶고 있던 시절이었지요.

 

이런 가운데 청와대 쪽에 사람들이 모여 갖고 화염 속에 우리 문화재가 파괴되고 없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맨손으로 가만 있지 말고 다음에 복원이라도 할 수 있도록 해야지 않겠느냐 의논이 됐어요.

 

그러면 자리는 어디로 할까, 통영은 50년에 이미 인민군이 한 번 지나간 자리고 400년 가져온 뿌리가 있으니까 거기 두자, 이래서 경남도립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가 들어서게 됐어요.

 

미술관에 있는 옻칠 생활 소품들.

 

광복 이후 서구 교육을 받은 제1호, 디자인 교육이지요. 당시 왔던 선생님들 가운데 이중섭 선생도 끼어 있었어요. 친척 아저씨 한 분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오는데 너 여기 가서 배워 봐라’ 하셨는데 저도 모르게 도취돼 갖고 몰두를 하게 된 것 같습니다.

 

디자인을, 설계 제도를 배웠는데 그게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공인된 첫 기술이었어요. 서울대학교에 응용미술과가 생긴 때가 1956년이니까 말이에요. 거기서 창의력을 키웠습니다. 두 해 마치고 부산으로 가서 공장에 취직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진학하러 가려다 1956년 기술원 부소장(소장은 도지사)이던 김봉룡 선생이 찾아와 ‘통영 가자’ 해서 다시 붙들려 왔습니다. 강사를 했었지요.

 

김성수 관장의 옻칠 그림.

 

그런데 몇 년 쭉 해보니까 제가 나름대로는 아이디어를 갖고 열심히 가르치는데, 통영에서는 볼 것도 없고 참고서적도 없고 해서 서울 갈 결심을 하고 사표를 냈습니다.”

 

김 관장 얘기가 아니더라도 돌이켜보면 경남도립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에는 당대 으뜸 명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게다가 현대적인 감각을 지닌 다른 분야 예술가들도 난리를 피해 통영에 많이 와 있기까지 했었습니다.

 

김봉룡(줄음질)·심부길(끊음질)·안용호(칠예)·장윤성(데생)유강렬(디자인) 같은 인물에게서 배웠고요, 강창원·이중섭 같은 거장의 특강도 이어졌던 것이랍니다.

 

 

“1962년입니다.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심판을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울서 지내며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에 출품을 했어요. 공예부 최고상을 받았습니다. 처음 출품해 처음으로 최고상을 말입니다.

 

라디오에서 ‘김성수’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처음에는 어디에 사는 뭐 하는 사람이냐, 남자냐 여자냐, 이런 물음이 나올 정도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상황이었지요. 그렇게 몇 년 연거푸 상을 받게 됐어요. 그러니 홍익대학교에서 초청해 강사로 위촉을 합디다.”

 

 

“1969년 홍익대 강단에 섰고 1972년 숙명여대로 옮겨갔는데, 제가 어느 정도 올라가져서 전국 최초로 디자인대학원 설립 신청을 했는데 인가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 장신구 디자인 오브제 작품 창조, 디자인을 통해 옻칠 교육이 이뤄지고 했습니다.

 

이밖에도 제가 옻칠을 위해 여러 가지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옻칠협회도 창설하고, 무형문화재 인간문화재도 키우고, 전람회 출품도 많이 했는데 옻칠이 귀한 줄을 모르기 때문에 인지도가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옻칠은 쫓겨나게 되고 우레탄칠을 하는 것이 많지요.

 

게다가 서울은 문화가 다양하니까 아무리 활동을 해도 파장이 크지 않았습니다. 옻칠로 국선 입선해도 아 그냥 그렇구나 할 뿐이지, 전업작가조차 생기지를 않았습니다.”

 

인정받지 못하는 옻칠을 되살리려는 노력

 

김 관장은 자기 혼자 잘 나가는 예술가로 인정받으며 살려 했다면 편하게 살 수도 있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옻칠이 그이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20년 넘게 애를 썼는데도 옻칠은 죽어만 가고 알아주는 사람도 줄어들기만 했습니다.

 

김성수 관장의 옻칠 그림.

 

“역발상을 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대접을 못 받지만 거꾸로 미국에 가서 옻칠로 만든 예술품이 거기서는 통하더라, 그렇게 해서 역으로 다시 우리나라로 들어오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미국 가서 사는 큰 딸한테 ‘미국에다 작업실을 하나 만들어다오’ 했습니다.

 

이렇게 1998년 미국 들어가서 활동을 하는데 그 곳 사람들이 아주 좋아했어요. ‘아, 서광이 비치는구나!’ 싶었지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래커 페인팅(lacquer painting)이 너무 좋기는 한데 너무 비싸다, 그 값이면 미국 유명 작가 작품을 살 수 있다’ 이래요.

 

미술관에서 옻칠 그림을 구경하는 사람들.

 

미국에서도 ‘래커’는 싸구려라는 인식이 깊이 박혀 있었습니다. 옻칠 평가절하시키는 ‘래커’라는 한 마디였지요. 미국은 아무 것이나 수용해 주는 나라니까 왔는데, 한없이 서글프고 고민스러워하며 돌아갈까 말까 하고 있는데 미국 중앙일보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특이한 것 가져와 창작 활동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2003년이 미국 이민 100주년이니까 2002년부터 전시를 하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어요. 아차, 잘 됐다는 생각이 들면서 희망이 생겼습니다.

 

‘래커’라는 말을 없애야겠다, 작품에서 액자를 걷어내야 하겠다, 갑작스레 생각이 든 것입니다. 옻칠 그림을 액자 속에 넣어놓으니 내가 봐도 영판 서양 그림이라.

 

 

그리고 옻칠의 물성, 옻칠이 갖춘 특성, 방수 효과도 있고 썩지 않는 방청 효과도 뛰어난데 래커라는 일반명사에서 벗어나 ‘옻칠(ottchil)’을 고유명사화하자. 한·중·일 세 나라에 고유한 예술로 말이지. 옻칠 페인팅, 옻 페인팅 이렇게 말입니다.

 

첫 해는 로스엔젤리스와 샌프란시스코 이듬해는 뉴욕에서 했는데, 사람들이 ‘한국에서 보려면 어디 가야 합니까?’ 이래요. 이전과는 느낌이, 표정이 달라진 것이지요. 하하. 뉴욕에 있는 한국문화원 원장이 빨리 돌아가서 미술관을 한 번 만들어 봐라 했어요.”

 

결심을 하기는 했는데 서울에서는 만들 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학교수 해가지고 작품 몇 개 팔았다고 해도 서울서는 만들 수가 없는 미술관이었던 것입니다. 다달이 월세도 줘야 할 뿐 아니라요, 옻칠이 몽땅 망하고 한 사람도 없는데 아무도 환영해 주지 않으리라 여겨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옻칠 그림.

 

“그러나 통영은 뿌리가 있다, 역사를 갖고 공략하자, 다짐했습니다. 2004년 바로 가서 정리하고 여기다가 땅을 확보하고 서울서는 귀국 신고만 하고 바로 여기 통영으로 왔습니다. 마산 문신미술관에 이어 민간 미술관 2호라 할 수 있겠지요.

 

연금 퇴직금을 일시불로 받아서 시작했습니다. 물론 가족이 아내 설득이 힘들기는 했습니다. ‘애들한테 당신은 먹고 살 수 있지 않느냐? 나는 옻칠을 하다가 죽을 테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먼저 학교에서 옻칠을 가르쳐야

 

김 관장은 옻칠 작품을 만들어 팔아 그 수익으로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김 관장 말을 들어보면 운영이 쉽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미술관 홍보부터 하기 어려운 그간 사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거제 한 조선업체에서 일하는 독일 사람인데, 귀국하기 앞서 한국 고유 작품을 사고 싶어 옻칠미술관에 들렀답니다.

 

고향이라고 돌아왔으나 좋게 보는 눈길만 있는 것도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무슨 속셈으로 왔을까?’ 미심쩍어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통영 관광 오는 사람들이 바다·섬·생선 이런 것 때문에 오지 옻칠미술관을 보려고 오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관광 온 사람들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실낱같은 희망은 이것 하나였습니다. 저는 100% 적중했다고 봅니다. ‘바다만 보지 말고 옻칠미술관 거기는 꼭 가봐라!’ 오시는 사람들 발걸음을 보면 이제 좀 이런 게 되는 것 같아요.”

 

김 관장은 옻칠이 죽게 된 까닭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되살리기가 그렇게 손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무척 어렵다고 합니다.

 

60년 넘는 한 평생을 옻칠예술에 바쳤는데, 그냥 그것으로 당대에 끝나버리고 말는지도 모르는데도, 김 관장 본인이 나서서 할 수 있는 그런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김 관장은 속이 더 타는 모양입니다.

 

“우리 전통 뿌리문화가 옻칠이 아닌 ‘카쉬’라는 질료 때문에 죽었어요. 옻칠은 비싸지만 카쉬는 싸거든요. 통영이 나전칠기로 유명지만 옻칠을 쓰는 데는 하나도 없어요. 또 6.25전쟁통에 다들 가난해서 옻칠 장인들이 가족들 먹여 살리기 위해 이직을 했습니다.

 

통영옻칠미술관 유리 넘어 김성수 관장 걸어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단절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금보다 귀한 것인데도 없애버린 것입니다. 일반인들이 옻칠인 줄 알고 있는 옻칠은 재료가 옻칠이 아닙니다. 교육을 통해 체험을 하고 깨닫고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경남도교육청에서 시·군 교육지원청을 통해 지역 뿌리 문화에 대한 교육을 해야 합니다.

 

옻나무도 심어야 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일자리 창출도 많이 됩니다. 자개는 자연 전복 껍데기로 만들어야 하는데 죄다 양식뿐이라 어렵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전칠기, 옻칠이 살아나면 바다 전복 키우는 사람도 부가가치 엄청나집니다.

 

작품 창작 하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나무그릇 만드는 사람, 옻나무 기르는 사람 이렇게 말입니다. 옻나무는 약리 효과도 있어서 식품쪽으로도 발전이 됩니다. 그러므로 지역 향토 문화와 전통 지역 특산으로 삼아 경남 브랜드가 되면 덩달아 세계적인 명품도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정을 해 갖고 지역 대학에서 가르치게 하는 것입니다. 시범학교 이런 제도 있지 않습니까? 저희 미술관 옻칠 체험 학교 아카데미 교육을 하고 있는데요, 아이들 같은 경우는 집중력이 좋아져서 학교 성적도 올라갑니다.

 

이렇게 지역 학교에서 지역 전통 문화·예술을 가르쳐야 합니다. 제가 죽을 때까지 꼭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옻칠을 하는 까닭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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