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루트

 

의성탑리리오층석탑 →34.6km 안동 조탑동 오층전탑→17.4km 법흥사지 칠층전탑→3.1km 운흥동 오층전탑·당간지주 6.7km 이천동 석불상·삼층석탑→ 76.3k 남장사 석장승 → 8.7km 복룡동 당간지주 → 6.6km 화달리 삼층석탑 →3.3km 상주박물관 석각 천인상 →21.9km 용화사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입상 →35.3km 상주 상오리 칠층석탑

 

탑은 불교 발생 이전부터 고대 인도에서 무덤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이후 유골과 사리를 봉안하면서 불교 조형물이 되고, 대승불교가 크게 일면서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 믿음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기 위한 신앙대상으로 바뀌었습지요.

 

불상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탑이 불상 구실을 했습니다. 탑의 모양이나 재료는 시대상과 주변 환경에서 영향을 받게 됩니다. 중국은 벽돌을 구울 수 있는 진흙이 많았기 때문에 전탑(塼塔)이 주류를 이루고, 화산 열도 일본은 화산암 재질상 전탑이나 석탑 제작이 어려워 자연 목탑이 많답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불탑이 만들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목탑이 중심이었지만, 안동·의성을 중심으로 일부에서는 전탑도 만들어졌습니다. 중국의 전탑과 일본의 목탑에 견줘 우리나라가 석탑을 중심으로 삼은 까닭은 질 좋은 화강암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석탑은 목탑이나 전탑보다 장점이 많다고 합니다. 석탑이 오랜 세월 비바람에 버틸 수 있지만 목탑은 수명이 짧습니다. 전탑이 갖는 표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석탑은 유연한 곡선미를 제대로 나타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탑은 가지고 있는 의미도 다양하답니다. 종교적인 대상으로서뿐만 아니라 자연 조건을 이해하는 자료도 되고 탑이 만들어진 시대 배경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장인정신을 바탕삼은 예술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답니다.

 

돌탑을 찾아 떠나는 여행길은 아무래도 이런 기본 지식을 바탕삼아야지 비슷한 탑을 되풀이해 보는 데서 오는 밋밋함을 떨칠 수 있답니다. 이에 더해 상상력까지 보태지면 돌탑 여행의 즐거움은 곱절로 많아지게 마련이겠습니다.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국보 제77호)는 무심히 스쳐지나갈 수 있는 곳에 보석처럼 서 있습니다. 조그만 마을에 서 있는 이 탑이 국보랍니다. 동네 이름도 탑리이고요. 마을 전체가 탑을 받치는 기단 같은 느낌이 들지요.

 

 

중학교 교정 한 켠에 들어선 이 오층석탑은 야트막한 1단 기단 위에 탑신을 5층으로 올렸습니다. 얼핏 보면 벽돌로 만든 전탑인 듯이 여겨진답니다. 기단의 기둥돌과 벽판석을 제각각 다른 돌로 짜 맞추고, 몸돌(옥신석)의 기둥돌들도 모두 다른 돌로 배흘림까지 다듬었습니다. 목탑에서 발전한 백제탑 양식이라고 하는군요.

 

그런데 지붕돌은 층층이 처마와 지붕이 모두 층단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신라 분황사 모전석탑의 지붕과 같은 전탑 양식이랍니다. 말하자면 백제 석탑과 신라 전탑이 혼합된 양식입지요.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과 함께 통일신라 전기 석탑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 작품으로 꼽힙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안동 조탑리 오층전탑(보물 제57호)은 화강암과 벽돌을 섞어 만든 통일신라시대 전탑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화강암으로 만든 석탑이 주류입니다. 그런데 안동과 의성에 이렇게 전탑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불교의 한 종파가 이곳에 전탑을 집중해서 유행시켰겠지, 벽돌 말고 다른 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조건 때문 아닐까, 풍수지리설에 따라 특정 시기에 벽돌로 만드는 전탑이 집중해서 축조되었을 수도 있지, 백제 쪽에서 장인들을 초청해 그들의 발달된 솜씨로 전탑이 쌓았을 개연성도 있다, 등등 여러 견해가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얘기가 사실과 맞아떨어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전탑은 안동 조탑리 전탑처럼 대부분 화강암을 함께 쓰고 있습니다. 돌로 된 1층 몸돌 남면에는 감실을 파고 좌우에 인왕상을 도드라지게 새겼습니다. 2층과 4층 몸돌 남면에 형식적으로 새겨넣은 감실이 있고, 지붕돌에는 안동의 다른 전탑들과는 달리 기와가 없습니다.

 

감실 양옆 인왕상.

 

 

1층 지붕부터는 벽돌로 쌓았는데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벽돌에는 문양이 남아 있습니다. 1층 몸돌이 지나치게 높고 5층 몸돌이 너무 커서 조화스럽지 않습니다. 보수를 거듭하면서 원형이 많이 손상됐기 때문이겠습니다. 감실을 지키는 인왕상 왕방울눈 표정이 재미있습니다.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국보 제16호)은 통일신라시대 법흥사에 있던 탑으로 짐작되지만 둘레에 민가와 철도가 들어서 있는 탓인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답니다. 1층 기단에 7층 탑신을 안정되게 쌓아 올렸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탑머리는 금동제로 장식돼 있었다고 합니다.

 

문화재청 사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이 칠층전탑은 가장 큰 탑이기도 합니다. 이는 전탑 일반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탑이 숭배의 대상이므로 아무래도 커다랗게 쌓아야 더욱 위엄이 있다고 여겼을 테고, 그런 점에서 전탑은 사람들에게 매우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보수 중인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왼쪽은 고성 이씨 탑동 종택, 오른쪽은 지나가는 화물열차.

 

몸돌의 각층은 무늬가 없는 진한 회색 벽돌로 쌓아 올렸습니다. 지붕돌은 위아래 모두 계단 모양으로 층단을 이루는 일반적인 전탑 양식과 다릅니다. 윗면에 남아 있는 흔적이 기와를 얹었던 것으로 보이도록 만듭니다. 이는 전탑이 목탑을 모방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답니다.

 

안동 동부동 오층전탑(보물 제56호)은 <동국여지승람>과 <영가지(永嘉誌)>에 7층 전탑으로 적혀 있습니다. 1608년 편찬된 안동 읍지인 운가지를 따르면, 원래 7층이고 탑머리 장식이 금동제였는데,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가 훔쳐가면서 무너져 선조 31년(1598) 5층으로 새로 쌓았습니다.

 

 

당시 이곳에 법림사(法林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절터가 안동역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덕분에 당간지주도 나란히 하나 있습니다. 이 두 탑은 그러므로 공통점이 많습니다. 둘 다 벽돌로 만든 전탑이고 7층이며 머리 장식이 금동제였습니다.

 

또 하나 공통점은 바로 옆으로 철도가 나 있어 쉴 새 없이 기차가 다닌다는 점이랍니다. 전탑은 석탑보다 훨씬 더 흔들림에 약할 텐데, 그 대책이 하루라도 빨리 나와야 하지 싶습니다.(법흥사지 칠층전탑은 2012년 가을 찾았을 때도 보수를 하고 있었는데, 듣자 하니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보물 제115호), 이른바 제비원 미륵불 앞에는 늘 사람들이 붐빕니다. 제비원 미륵불이 기도 효험이 크다는 소문 때문이랍니다. 제비원이 있는 자리는 전국에서도 땅의 기운이 세다고 꼽히는 장소라 합니다.

 

 

미륵불 새겨진 바위에 달라붙인 동전들.

 

기도할 때 바위에 얹혀 있는 작은 돌을 갈기도 하는데 이런 풍습은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으니 새삼으럽지는 않습니다. 불상이 새겨져 있는 바위, 사람 손이 닿을 만한 데는 동전이 빼곡하게 꽂혀 있습니다.

 

거의 수직에 가까워서 동전이 달라붙어 있기 어려워 보이는 데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하면 무슨 복을 받거나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여긴답니다. 그러나 실제로도 그러한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어쨌거나 높이가 12.38m나 되는 거대 불상입니다. 높은 벼랑 바위에 몸통을 얕게 새기고 얼굴과 머리랑은 따로 조각하여 올려놓았는데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양식이라 합니다. 뒤통수는 수직으로 잘려나갔으나 얼굴은 온전히 남았습니다.

 

입술에 두드러지게 채색이 남았습니다.

 

머리와 얼굴에는 주홍색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채색돼 있었으리라 짐작한답니다. 입술은 붉음이 더 뚜렷합니다. 일제강점기 초기만 해도 부처 머리 위에 닫집이 있었습니다. 공경하는 표현이고 비바람을 가리는 실용입니다. 지금도 어깨 즈음에 닫집을 위해 세운 기둥 자리가 있습니다.

 

제비원 미륵불이라고도 하는데 이 자리에 옛날 원(院:요즘으로 치면 여관)이 있었다고 하지요. 앞쪽에 연구사(燕口寺), 뒷쪽에 연미사(燕尾寺)가 있었고 제비가 앉아 있는 모습이라고도 합니다. 언덕에 있는 연미사중수비(燕尾寺重修碑)가 이를 뒷받침하지요.

 

연미사 중수비.

 

조선 말기까지도 제비원을 중심으로 술집과 여각이 즐비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제비원이 안동으로 오는 손님들이 머물던 곳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앞에 떨어져 있는 바위는 이름이 ‘울바위’랍니다. 뒤에 있는 바위에만 부처를 새기니 앞에 있는 바위가 나도 새겨 달라면서 울었다는 얘기입니다. 지금도 울었던 눈물 자국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울바위에는 부처 대신 나무아미타불 글자만 새겨져 있습니다. 뒤쪽 언덕배기에는 조그만 삼층석탑(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99호)도 있습니다.

 

 

상주 남장사 석장승(경상북도민속문화재 제33호)도 ‘제비원 미륵불’처럼 토속 내음이 물씬 묻어납니다. 마주하고 보면 빙긋이 웃음이 번져납니다. 성난 표정을 나타내려 했는데도 소박함과 천진스러움이 느껴진답니다.

 

전체. 얼굴.

 

한쪽으로 치우쳐 비뚤어진 얼굴,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왕방울 눈, 커다란 주먹코, 야무지게 다문 입술, 거기 삐죽 나와 아래로 뻗어 있는 송곳니. 가슴에는 한 가닥 수염이 있으며 밑에는 ‘하원주장군(下元周將軍)’ 글귀가 놓였습니다. 자연석을 그대로 살려 다듬었는데, 제게는 걸작으로 보입니다.

 

이 돌장승은 원래 남장동에 있었는데, 1968년 저수지 공사를 하면서 지금 자리로 옮겼다 합니다. 남장사 극락보전 현판의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순조 32년(1832) 만들었다고 짐작된답니다. 남장사에는 사천왕이 없는데요, 사천왕 구실까지 대신해 주는 셈입니다.

 

절간 들머리에 자리잡아 잡귀가 드나들지 못하도록 막는 한편, 절간 영역이 시작된다는 표시도 해 주면서, 이런저런 풍수 비보 노릇까지 함께하는 수문과 호법의 신장(神將)입니다. 그래도  불교 냄새보다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느낌이 훨씬 세답니다. 그래서 마치 돌하르방처럼 만만하답니다.

 

상주 복룡동 당간지주(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6호)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길가 논 한가운데 있는 바람에 원형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답니다. 커다란 절간 대웅전 앞마당 한 쪽을 차지하고 있었을 법하지요.

 

 

그만큼 크다는 말씀입니다. 당간지주는 절간 들머리나 으뜸 법당 앞에 마련합니다.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당간지주의 크기로 절간 규모까지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절간이 클수록 깃발이 컸고, 큰 깃발을 지탱하려면 당간지주도 커야 했기 때문입니다.

 

상주 화달리 삼층석탑(보물 제117호)은 사벌국 왕릉이라 전해지는 곳 바로 옆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화강암으로 만들었습니다. 석탑은 전탑보다 크기는 작습니다. 하지만 단단하고 야무진 느낌은 전탑을 앞서지요.

 

1층 기단에서 아래쪽 땅과 닿는 기단 면석을 두지 않는 양식은 상주·문경 석탑들의 공통된 특징이라고 합니다. 비례가 잘 맞지 않고 기단 일부가 망가져 모습이 이상합니다. 어리숙한 몸돌에 기대어 앉아 있는 머리 없는 석조여래좌상이 느낌이 묘합니다.

 

 

상주박물관 석각천인상(보물 제661호)은 주악(奏樂)천인상과 공양(供養)천인상을 새긴 돌입니다. 원래 석탑 기단석이나 면석으로 쓰였으리라 짐작된다고 합니다.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이며, 보기 드물게 잘 만들었다는 평을 받습니다.

 

주악상은 비파를 타는 모습으로, 화관을 쓴 머리는 앞으로 숙이고 한 발을 앞으로 내밀어 자세가 부드럽습니다. 자태는 웃음을 살짝 머금은 채 단정하며, 비파를 타는 두 손은 섬세하게 표현돼 있습니다. 공양상은 오른손으로 연꽃 봉우리를 받쳐들었는데 움직이는 듯 자연스럽다는 평을 받습니다.

 

공양. 주악.

 

 

만든 시기는 700년대로 여겨지는데 여기 옷차림이 당시 복식(服飾)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답니다. 어쨌거나 이들 천인에게 주어진 역할이 부처를 기리고 중생을 믿음으로 이끄는 데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상주 용화사 증촌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20호)은 결가부좌를 하고 있습니다. 왼손에 약병을 들고 있으니 바로 약사여래불입니다. 광배(光背)는 사라지고 없으며, 앉은 자리 대좌는 8세기에 많이 나타나는 팔각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안정돼 있습니다.

 

수평으로 길게 뜬 눈, 웃음기 없는 작은 입, 군살 붙은 턱 같은 세부 표현은 고려시대 불상으로 옮겨가는 통일신라 말기에 만들어졌음을 알려준답니다. 통일신라 중기의 풍만하고 균형 있는 양식이 이어져 오면서도 형식화·경직화돼가는 특색을 보여줍니다. 얼굴과 몸은 시멘트로 이어져 조잡한데요, 이 부처가 모셔져 있는 용화사랑 닮았습니다.

 

상주 용화사 석조여래좌상 얼굴.

 

상주 용화사 삼층석탑. 보잘것이 없습지요.

 

상주 증촌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118호)도 같은 절간에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광배도 불상이랑 한 돌로 조각돼 있는데 많이 닳고 망가졌습니다. 석조여래좌상과 마찬가지로 조금은 경직돼 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상주 용화사 석조여래좌상과 상주 증촌리 석조여래입상.

 

 

상주 상오리 칠층석탑(보물 683)은 고려시대 작품이랍니다. 경술국치를 겪어 일본 헌병이 탑신을 허물어버렸고, 1978년 복원했다고 합니다. 2층 기단 위에 탑신을 7층으로 올렸습니다. 보통은 삼층, 많아봐야 오층인데, 많이 올린 셈이지요.

 

계단 아래에서 올려다본 상주 상오리 칠층석탑.

 

얇아보이는 지붕돌은 느릿느릿 기울어져 있고, 귀퉁이 네 곳은 뚜렷하게 치켜올려 놓았으며, 밑면 받침은 5층까지는 5단을, 6·7층은 4단을 넣었습니다. 꼭대기 머리장식은 어디 가고 그것을 받쳤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았습니다. 

 

날렵함과 경쾌함이 돋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바라보는 눈맛을 매우 시원하게 해주거든요. 전체로 봐서 균형미와 정제미가 뛰어나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이어받아 고려 전기에 만들었으리라 짐작이 된답니다.

 

상주 상오리 칠층석탑.

 

이처럼 돌탑이라 하면 삼층석탑만 떠올리는 사람, 그리고 탑이라 하면 죄다 돌로 만들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경북 의성과 안동·상주 일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갖가지 재료를 가지고 갖은 모양을 만들어 내었음을 여기만큼 오밀조밀 잘 알려주는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훌륭하게 만들어진 작품을 마주하면, 마치 맑은 물로 행궈낸 듯이 머리가 속까지 시원해집니다. 더욱이 그런 작품이 놓여 있는 풍경까지 그럴 듯하다면, 마음이 마냥 흥겨워져 언젠가는 자리를 떠야 한다는 생각마저 없어지게 만든답니다.

 

김훤주

 

※ 2012년에 문화재청에서 비매품으로 발행한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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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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