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선암사 매화에 매이니 매화밖에 못 보네

김훤주 2013. 6. 10.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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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월 들어도 피어나지 않았다는 선암사 매화

 

3월 27일 수요일 전남 순천으로 떠났습니다. 경남도민일보가 만든 ‘경남형 예비 사회적 기업’인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가 2013년 처음 마련한 테마 체험 여행이었습니다. 5일장인 남부시장이 서는 날이고, 이 때쯤이면 선암사 홍매화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들머리 주차장 둘레에 심긴 매화나무에 꽃이 화알짝 벌어져 있기에 절간 매화나무도 그러려니 짐작이 됐습니다. 하지만 기대는 가볍게 무너졌습니다. 가뭄에 콩 나듯 몇 송이만 피어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올 3월 날씨가 예사롭지 않게 추웠기 때문인 듯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여태까지는 이맘때 열렸던 ‘선암사 홍매화 축제’도 4월 6일(토)과 7일(일)로 열흘 뒤에 치러졌고, 그랬는데도 매화들이 그 때조차 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매화가 아무리 좋아도 매화에 매이지는 말 일입니다.

 

들머리 주차장에 활짝 피어 있던 매화.

승선교.

 

매화에 매이면 매화만 눈에 들어옵니다. 매화 말고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나무에 매화가 피어 있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꽃이 채 피어나지 않으면 매화나무 둘레만 두리번거리다 아쉬워하는 입맛만 다시고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선암사 들머리 시냇물에 나무줄기가 비쳐 있습니다.

 

2. 아름다움이 깜찍하게 숨어 있는 원통전

 

매화에 매이지 않는 일행 두 사람을 봤습니다. 그이들은 호젓하고 삽상한 선암사 자체를 통째 즐기는 것 같았고 따뜻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도 누리는 것 같았습니다. 나무를 보면서도 지금만 떠올리는 대신, 다닥다닥 꽃눈과 잎눈에서 튀어나올 그런 녀석들까지 가늠해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 삽상한 푸르름.

 

그이들 또한 활짝 핀 매화에 대한 기대가 없지는 않았겠으나 제대로 피지 않은 매화나무(선암사 백매, 천연기념물 488호)를 보더니 ‘음, 그렇군!’ 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고는 가볍게 발길을 돌려 바로 위 원통전으로 나아갔습니다. 그이들은 원통전 앞에서 탄성을 내질렀습니다.

 

홍매화가, 띄엄띄엄 피어나 있습니다. 띄엄띄엄도 피어나지 않았습니다.

 

원통전은 생긴 모양만으로도 충분히 눈길을 끕니다. 앞쪽이 좁고 뒤쪽이 너른 보기 드문 구조 때문입니다. 들기는 어렵지만 한 번 들고 나면 그 안은 너르다는 따위, 이를테면 진리 또는 구도에 관한 어떤 뜻이 이런 모양새에 스며 있을 법도 한 노릇입니다.

 

 

하지만 이이들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습니다. 문짝이었습니다. 문짝에 새겨져 있는 꽃무늬에 그이들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그이들은 여기 꽃무늬가 나무 여러 조각을 이어붙여 만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널찍한 나무를 통으로 내고) 낱낱이 파고 뚫고 조각해 넣었네!”

 

 

듣고 나서 가만 들여다봤더니 과연 그랬습니다. 그 꽃무늬가 주는 두툼하고 확실한 질감을 이이들은 손바닥 전체로 누렸습니다. 그러고는 그 아래 계수나무가 있는 달나라와 방아찧는 토끼에게도 눈길을 던졌습니다.

 

달나라 계수나무. 방아찧는 토끼들.

 

그이들 따라 저도 내려다 봤는데요, 고졸(古拙)한 느낌이 났습니다. 어린아이가 새긴 듯한 장난기도 어려 있는 것이, 당시 옛 사람들이 맛봤을 조각 새기는 즐거움이 뚝뚝 묻어났습니다. 그이들 조금 전 내지르던 탄성이 죄다 이해가 되고 인정이 됐습니다. 선암사 찾은 보람을 여기서 다 누렸습니다.

 

절하는 이에게 냉큼 자리를 내어줬습니다.

 

3. 김훈의 가엾은 수사학과 여기 이 뒷간

 

선암사 절간을 끼고 오른쪽으로 난 산길을 개울을 거스르며 오릅니다. 얼마 가지 않아 대각암이 나타납니다. 절간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사는 살림집을 닮았습니다. 앞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절간을 한 눈에 담습니다. 그윽하고 서늘하고 상쾌합니다.

 

선암사 어디 있는 연못. 그 가운데 인공섬에 쌓인 동전.

 

돌아나오는 길에는 부뚜막에 들르려 했지만 스님들한테 가로막혔습니다. 뒷덜미에서 “거기는 들어가시는 데가 아닙니다!” 두 말 않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번에는 그 이름도 높은 뒷간에 들어가려 했는데 수리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어디가 무너져 있나 봅니다. 바깥에서 봐도 표시가 났습니다. 여기 해우소는 어둑어둑한 공간에서 바지를 내리고는 쪼그려 앉은 채로 눈부시게 환한 바깥을 내려다보는 그윽한 즐거움이 있는 곳입니다. 오늘은 그 맛을 보기 어렵게 됐습니다.

 

<자전거 여행> 머리글 첫 줄에서 “벗들아, 과학과 현실의 이름을 들먹여가며 이 가엾은 수사학을 조롱하지 말아다오.”라고 썼던 김훈은 같은 책에서 선암사 뒷간을 두고 이렇게 적었습니다. ‘가엾은 수사학’입니다.

 

아래서 쳐다본 뒷간. 2층서 똥오줌을 누면 1층에 쌓입니다. 맞은편에서는 2층이 1층이고 1층은 지하.

 

“똥을 안 눌 때 똥누는 사람을 보는 일은 혐오스럽지만, 똥을 누면서 창살 밖으로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은 계면쩍고도 즐겁다. 이 즐거움 속에서 배설 행위는 겸손해진다.” 그러면서 겸손해지는 까닭을 이어나갑니다. 여기 측간은 이런 김훈 덕분에 더욱 이름이 높아졌습니다.

 

어쨌거나 여기 측간에서는 코를 찌르는 나쁜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조금은 냄새가 나지만 견딜 만합니다. 하지만 견딜만하다는 말이 알맞은 표현은 아닙니다. 얼핏 여겨지기에는, 똥 냄새인지 아닌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냄새가 무릅니다. 이것이 좀더 사실에 가까운 표현이겠습니다. 

 

똥이 오줌과 함께 떨어지는 아래칸으로 갑니다. 일부러 문을 비시고 들여다봅니다. ‘비시고’는 살짝 어긋나게 틈을 낸다는, 경상도 지역말입니다. 등겨들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쌓여 있습니다. 똥오줌 냄새가 코를 찌르지 않고 부드러운 까닭입니다.

 

엉덩이 까고 앉아 똥오줌 떨어뜨리는 네모 구멍이 위에 보입니다.

 

똥으로 하여금 스스로 삭게 해주는 장치인 셈입니다. 여기서 완성된 똥과 오줌의 운명은 아주 풍성하고 수명이 오래갑니다. ‘운명’이라는 표현은 김훈에게서 차용(借用)해 왔습니다.

 

4. 선암사 못지 않게 이름난 밥집 길상식당

 

절간 들머리까지 돌아나와 선암사 못지 않게 이름난 길상식당으로 갑니다. 푸짐하게 차려져 나온 깔끔한 밥과 맛있는 반찬·안주을 누립니다. 묵무침에 동동주까지 한 잔씩 걸칩니다.

 

블로거 선비님입니다.

 

해딴에는 밥집에 가서 밥값을 깎는 일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모두 제 몫을 누려야 한다는 이치에서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당장 이런 것만 생각해도 예사로 해서는 안 됩니다. 밥값을 깎으면 밥과 반찬이 야박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정한 이치가 그렇습니다. 밥값을 제대로 쳐 주면 만사가 풍성해집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여기 이 날 길상식당처럼 주문하지도 않은 안주가 덤으로 나오기까지 합니다.

 

선암사 오면서 기대했던 매화를 보지 못해 아쉬워하는 얘기가 나왔는데요, 그 빈 자리를 길상식당 그럴 듯한 음식들이 조금은 채워주는 것 같았습니다.

 

5. 남도 동부 육군에서 가장 큰 순천남부시장

 

다음은 남부시장입니다. 2일 7일 서는 이 장은 순천 사람들 말을 빌리면 ‘동부 육군에서 가장 큰 시장’입니다. 동부 육군은 구례·광양·여수·순천·보성·고흥을 말하고 그 한가운데 순천이 있습니다.

 

 

육군의 산물이 모조리 여기로 쏟아져 들어오는 모양입니다. 그러다 보니 산것과 들것과 물것과 바다것들을 여기서 모두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후여서 그런지 아니면 날씨가 아직 덜 풀려서 그런지 사람들로 넘쳐나는 지경은 아니었습니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면서 장구경을 했습니다. 고구마·감자를 비롯해 몇몇 먹을거리와 천리향 어린 나무를 한 그루 장만했습니다. 챙겨간 장바구니 제법 무거웠습니다.

 

장터 끄트머리 매화나무. 거기 매달린 꽃봉오리들.

 

점심을 먹은지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장터 한 쪽 구석에 스며들어 순천 명물이라는 팥칼국수도 한 그릇 해치웠습니다. 매우 맛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국산 팥으로 만든다는 주인 아줌마 말을 보람으로 삼았습니다.

 

6. 순천만 나들이 나온 김승옥과 정채봉

 

걸음이 순천만으로 이어집니다. 하루에 세 군데를 돌려니 걸음이 조금 바쁩니다. 그런데 마음은 느긋합니다. 창원으로 돌아가기로 한 시간까지 두 시간 남짓 남았는데 거기 맞춰 두르고 누리고 즐기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행 몇 분.

 

일행 몇 분이 갈대 사이 보이지 않는 데로 들어가시더니 그리로 오라 손짓을 합니다. 조금 전 남부시장에서 산 술과 안주가 놓여 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버스에서 내릴 때 무엇을 좀 집어들고 왔어야 했습니다.

 

 

아쉬운대로 잔을 기울이고 안주를 뜯습니다. 실은 술과 안주에 기대어 얘기를 나누고 가깝고 먼 풍경을 평하는 재미를 만들어내어 누립니다. 함께 술마시던 일행은 오늘 거기 앉은 자리에서 순천만을 보내려나 봅니다.

 

 

이제는 쌀쌀맞은 바람도 춥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마음이 흥그러워졌기 때문이랍니다. 저는 갈대 가득하고 그윽한 순천만 쪽으로는 눈길만 던지기로 했습니다. 발길은 순천문학관을 향해 몸을 싣고 나아갑니다.

 

순천만의 중심은 갈대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갈대만 있지는 않고 갈대와 별개로 존재하는 순천문학관 같은 존재도 있습니다. 으리으리 웅장하지 않고 갈대랑 잘 어울리는 문학관입니다. 대상도 콕 집어 둘만 다룹니다.

 

 

소설 <무진기행>을 쓴 김승옥과 동화 <오세암>을 쓴 정채봉입니다. 정채봉은 순천 출신입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무진(霧津)이 순천만입니다. 저는 순천만에 오면 어지간해서는 여기를 놓치지 않습니다. 김승옥·정채봉이랑은 아무 인연도 없습니다.

 

하지만, 무진기행의 의미 따위는 찾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납작하게 엎드린 겸손함이 보기 좋고, 거기 마루나 마당 아니면 의자 아무 데나 앉아 긴장을 풀고 하염없는 눈길을 둘 곳 몰라 할 수 있어서 그럽니다. 둘 곳 모르겠는 제 눈길은 사람과 산천과 물건을 가리지 않고 아무 데로나 흘러갑니다.

 

김승옥관.

7. 7월 해딴에 테마체험여행은 전남 장흥으로

 

순천, 선암사, 남부시장, 순천만 그리고 정채봉과 김승옥……. 그 느낌과 이미지가 어딘지 모르게 서로 통하는 것 같습니다. 성(聖)과 속(俗)의 구분이 없는, 성과 속의 구분이 있다면 그 둘을 ‘암시랑토 않게’ 넘나드는. 서쪽에서 뉘엿대는 햇살을 뒤로 받으며 버스 타고 돌아오는 길에 해 본 생각입니다.

 

해딴에의 테마체험여행이 4월에는 전남 구례로 갔습니다. 구례장 구경을 늘어지게 한 다음 섬진강 건너편 곡성 하한산장 참게수제비를 맛본 뒤 화엄사를 들렀다가 오미마을 운조루를 눈에 담는 걸음이었습니다.

 

토요시장은 여느 시골장터와 달리 오후가 더 활기찹니다. 외지서 오는 사람이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오는 7월에는 13일 토요일에 전남 장흥으로 떠납니다. 장흥은 정남진 토요시장과 편백숲으로 유명합니다. 장흥은 땅모양이 남북으로 길쭉합니다. 탐진강이 가운데를 타고 흐릅니다. 산에서도 들에서도 강에서도 바다에서도 물산이 나는 장흥입니다.

 

장흥 선비주조장.

장흥군은 김을 만드는 과정을 비롯해 바다에서 인공 화학물을 일절 쓰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장흥 바다가 깨끗하다는 얘기를 하는 셈입니다. 이 모든 장흥의 풍물이 토요시장에 다 나와 앉아 있습니다.

 

말린 미역 한 뭉치가 5000원이었던가……. 시골 장터다운 풍경입니다.

 

탐진강과 바다를 따라 넘나드는 장흥 바람의 시원함은 편백 산림욕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그 물산과 편백 가구들을 헐케 장만할 수 있는 덤도 따라 나옵니다. 참가비 4만5000원이고요 문의·상담·신청은 이렇답니다. 055-250-0125, 010-8481-0126, haettane@gmail.com.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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