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일본 사람들은 진해 어디가 보고 싶을까?

김훤주 2013. 6. 8.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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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청년회의소(회장 이상구)가 국제 민간 차원에서 일본 오가키(大垣)시 죽순회(竹の子會) 회원 가족 18명을 2박3일 일정으로 초청해 ‘진해 한일관계사의 현장 탐방’ 등 행사를 치렀습니다.

 

5월 31일 입국한 죽순회 일행은 창원청년회의소 회원 집에서 묵은 다음 6월 1일 창원 삼정자초교를 찾아 이 학교 관현악단 연주를 감상하기도 했습니다. 이어 회원 가족과 더불어 웅천읍성과 웅천도요지전시관·제황산공원 등을 둘러봤습니다. 이 진해 탐방을 저희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가 맡아 진행했습니다.

 

1. 멀리서 왔을수록 사람 사는 모습이 궁금하다?

 

 

먼저 이번 일본 사람들의 진해 탐방을 진행하면서, 먼 데서 온 이들일수록 여기 사람 사는 구체 모습에 대해 호기심이 많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무슨 훌륭한 전시물이 있는 데가 아니라 옛날이든 오늘날이든 사람 사는 자취나 냄새가 남아 있고 묻어나는 그런 데를 좋아했습니다.

 

석환(石丸). 돌 탄환인 셈입니다.

삼정자초교 교무실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는 일행들. 오른쪽이 일본 죽순회 회원들입니다.

 

낮 1시부터 6시까지 다섯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기에 일정이 빠듯했습니다. 먼저 들른 데가 웅천읍성입니다. 창원시 진해구 웅동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수군절제사영(水軍節制使營)입니다. 1407년 삼포 개항으로 늘어난 일본인 불법 입주를 막으려고 1439년(세종 21) 쌓았습니다.

 

웅천초교 정문에서.

 

1510년(중종 5) 삼포왜란 때 왜구에게 일시 함락되었고 임진왜란 때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머물렀습니다. 동문을 비롯해 동쪽 부분만 복원이 돼 있습니다. 안에는 웅천초등학교와 웅천고등학교가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석축 둘레 3514척, 높이 15척이며 우물이 2개 있다고 나옵니다.

 

 

고등학교 자리에 동헌을 비롯한 관아가 있었고, 초등학교 자리에는 객사가 있었습니다. 수령이 업무를 보는 동헌은 지역 읍치(邑治)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읍성 전체의 중심은 객사였습니다. 조선 시대 객사는 단순히 길손이나 손님이 머무는 데가 아니었습니다.

 

 

임금을 대신해 서울에서 오는 관리들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게다가 거기에는 궐패(闕牌)가 있었습니다. 궐패는 대궐을 상징합니다. 대궐은 임금을 상징합니다. 고을 수령은 한 달에 두 차례 여기다 대고 절을 하는 예식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전체 고을과 읍성의 중심이 됐습니다.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둘레에는 지역 역사가 묻어 있습니다. 고등학교 우뚝 솟은 오래 된 나무는 옛적 관아 앞 자리입니다. 이 나무는 여기서 이뤄진 갖은 행위들을 기억하고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초등학교 동쪽 울타리는 읍성의 부분이기도 합니다.

 

지역 발전을 위해 애쓴 이들을 기리는 빗돌 따위도 여기 있습니다. 어른인 일본 죽순회 회원들은 이런 설명을 귀담아 듣습니다. 여기 사람 살았던 자취를 떠올리고 싶은 것입니다.

 

2. 웅천읍성, 아이들에게는 훌륭한 놀이터

 

아이들은 한국과 일본 구분 없이 뒤섞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노닙니다. 복원된 읍성 위 바위들이나, 거기 지어진 누각이 아이들에게는 놀이터입니다. 어른들은 위에 올라가 성곽은 물론 해자나 옹성 따위를 눈여겨봅니다.

 

읍성 전체를 일러주는 안내판에도 그이들 눈길이 오래 머뭅니다. 옛날 사람살이가 여기서 이뤄졌습니다. 웅천읍성 남쪽 바닷가에는 남산이 있고 남산에는 웅천왜성이 있습니다. 이 왜성은 남아 있는 형태가 거의 원래 그대로여서 우리나라 왜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합니다.

 

 

또 읍성에서 바닷가를 따라 왼편으로 나아가면 도롯가 왼편으로 세스페데스 기념공원이 있습니다. 세스페데스는,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웅천으로 해서 일본군을 따라 들어온 군종신부였습니다. 역사에 기록돼 있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첫 서양 사람입니다.

 

남산 서쪽으로 나 있는 고개를 넘으면 나오는 제포는 조선 시대 일본 사람에게 문을 연 세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에는 제포성도 있었고 제포왜관도 있었습니다. 왜인들은 고개를 넘어 웅천읍성 있는 쪽으로 오지 못하도록 금지돼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이들은 거기서 먹고 살고 무역하고 배 타고 했습니다. 제포성은 자취가 남아 있고, 제포왜관은 자취조차 없습니다. 제포성·왜관 아래로는 바다가 펼쳐져 일본에까지 이릅니다. 그 가운데 대마도도 있습니다.

 

3. 도요지는 어떤 자리에 들어설까?

 

웅천도요지전시관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나름대로 잘 지어져 있습니다. 웅천도요지는 조선 시대 전기에 경영됐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문을 닫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예나 이제나 그릇은 사람살이에 필수입니다. 그래서 곳곳에 이런 도요지가 있었습니다.

 

기념사진도 한 장 찍고.

 

도요지가 들어서려면 거기 필요한 조건이 갖춰져야 합니다. 먼저 그릇을 만들 수 있는 질 좋은 흙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릇을 굽는 데 쓸 수 있는 땔감이 풍부해야 합니다. 아울러 만들어진 그릇을 대처(大處)로 갖고 나갈 수 있는 좋은 물길이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웅천도요지는 이런 조건을 갖췄었답니다. 골라 쓸 흙이 많았고, 바로 위 보개산은 나무를 내줬으며 깊숙이 들어온 바닷물은 동쪽 낙동강 하구나 서쪽 바닷길이랑 손쉽게 이어지게 해줬습니다.

 

 

그리고 웅천도요지는, 일본에서 국보로 모셔지는 이도다완(井戶茶碗=조선찻사발)을 만들었을 개연성이 있는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 잘라 말하지는 못하지만 만든 수법이 그런 짐작을 가능하게 해 준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여기 웅천 도요지 그릇 만드는 기술은 나중에 일본으로 건너가 그 꽃을 활짝 피웠다고 합니다.

 

 

4. 맞잡은 손을 서로 놓지 못하는 아이들

 

다음으로는 창원해양공원입니다. 여기는 해양생물테마파크와 군함전시관·해전사체험관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미리 부탁해 놓은대로 해설하는 이가 나와 구석구석 안내를 해줬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어린이와 어른이 뒤섞여 여기 나와 있는 여러 거리들을 듣고 보고 누립니다.

 

검은 옷이 일본 아이들.

 

한 서너 시간 이렇게 노니는 사이에 일본과 한국 아이들이 무척 친해졌나 봅니다. 아이들 서로 붙잡은 손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서로 장난도 하고, 걸핏하면 서로 꼬리를 무는 뜀박질을 해댑니다. 저런 우정이 오래 가거나 줄곧 이어질 개연성이 높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저렇게 나라 구분 상관없이 서로를 위하며 서로를 좋아하며 하루를 보냈던 기억은 오래도록 이 아이들을 즐겁고 풍성하게 해줄 것입니다. 이런저런 행사나 탐방은 어쩌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로 저런 마주 잡음과 그 마주 잡음의 기억이 핵심입니다.

 

창원시민대종이라 돼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진해시대종이라 적혀 있었습니다.

 

5. 제황산에서는 풍경이 아닌 추억을 찍고

 

이어서 제황산공원으로 갑니다. 일제 강점기인 1927년 일본이 1905년의 러일전쟁 전승을 기리는 기념탑을 세웠습니다. 해방 이후 헐렸다가 1967년 해군 군함을 상징하는 진해탑이 높게 들어섰습니다. 높이 28m에 9층인데 시가지를 조망하는 전망대가 있습니다.

 

중원로타리 방향에서 제황산에 오르는 계단이 있는데 모두 365개여서 1년계단이라고도 합니다. 일행은 여기서 모노레일카를 타고 올랐습니다. 올라서 활기를 감당하지 못하는 아이들 몇몇은 1년계단으로 빠르게 내려갔습니다.

 

죽순회 회장입니다.

모노레일카로 오르내리면서는 대부분 카메라를 꺼내들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멋진 모습이 잡히지는 않았습니다. 날씨가 흐려 멀리 풍경이랑 모습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관은 없습니다. 이날 어른이랑 아이들이 카메라에 담은 것은 한국과 일본 사람의 어울림과 그런 어울림에 대한 추억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처음 출발했던 창원 삼정자초등학교로 돌아오니 딱 6시였습니다.

 

저희 해딴에는 여기까지 진행하고 떠났습니다. 일정이 좀 빡빡한 점은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재미나고 짜임새 있는 탐방이었다고 생각해 봅니다. 경남도민일보가 만든 경남형 예비사회적기업인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는 이런 일도 열심히 잘 하고 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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