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대 따라 달라지는 길의 경제학

 

길은 시대마다 적용되는 경제학이 달랐습니다. 전통사회에서는 농지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길은 농사를 짓는 평지를 달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마을조차 평지가 아닌 산자락에 지었습니다. 농지를 다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길은 농지와 산지가 만나지는 데로 났습니다. 농토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덜 불편하게 걸을 수 있는 산자락이었습니다. 산이 가로막을 때면 길은 달라졌습니다. 꾸불꾸불 흐르지 않고 골짜기와 등날을 최대한 곧게 오르내렸습니다. 거리를 최소화해 걸리는 시간을 줄인 것입니다.

 

옛길의 경제학이랍니다. 오늘날은 달라졌습니다. 일제강점기 신작로를 내던 때와 해방 이후 신작로 위로 국도를 닦던 시절까지는 옛길의 경제학이 나름 적용됐습니다. 당시까지는 농지가 대접받았기 때문이겠습니다. 토목공학 등 길 닦는 기술도 자연 상태를 무시하면 안 되는 수준이었습니다.

 

거창 옛길 고곳에서 만나는 마을숲과 정자.

 

요즘은 기술 제약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농토에 대한 존중도 사라졌습니다. 반면 옮겨가는 데 드는 시간과 노동력과 에너지를 ‘물류 비용’이라며 중시하는 세상이 됐습니다. 길에 적용되는 경제학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빠르기만을 최선으로 삼는 것입니다. 길은 언제 어디서나 직선을 지향하게 됐습니다. 꾸불꾸불 옛길은 묻히거나 토막이 났고 마을은 도로에 붙어 있지 않고 그 너머 어딘가에 있습니다. 국도 3호선도 다르지 않답니다.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평안북도 초산군까지 이어지는 남북 간선도로인 이 국도는 옛 국도도 있고 새 국도도 있습니다.

 

탐방 루트

 

삼산마을~0.7km 바래기재~2.2km 쌀다리~2.7km 창촌~1.8km 말흘리~1.8km 창촌~2km 학동~1.2km 영승마을~3.4km 풍계마을~2.5km 당산마을~3.1km 무월마을~1.3km 넘터마을~2.3km 원농산~1.1km 고제(원)

 

거창 금원산(1353m)이 남동쪽으로 흘러내리는 자락에 있는 바래기재는 경남 함양군(안의면)과 거창군(마리면)의 경계를 이루는 바, 넘는 방식이 새 국도와 옛 국도가 서로 다릅니다. 옛 국도 3호선은 이 재를 넘는 옛길을 덮어썼지만 새 국도 3호선은 이와 무관하게 그 오른쪽에 남에서 북으로 향하는 길을 내었습니다.

 

삼산마을 들머리.

 

바래기재 바로 아래에 함양 안의면 대대리 삼산마을이 있습니다. ‘삼산’은 마을을 에워싼 청태·월암·아미산이랍니다. 바래기재의 바래기는 이 삼산을 마주 바라본다는 데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삼산마을은 조용합니다. 그럴 듯한 솔숲이 마을 앞에 있고 쉴 수 있는 공간도 있으나 사람이 없습니다.

 

2. 새 국도가 나면서 휑뎅그렁해진 바래기재

 

바래기재에는 반락원(反樂院)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대신 밥집이 있습니다. 밥집조차 새 국도가 나면서 찬밥 신세가 됐습니다. 빠르기의 경제학을 따라 옛길과 옛 국도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래기재로 가려면 함양 안의면까지 새 국도와 옛 국도가 일치하는 구간을 따라오다가 새 국도가 옛 국도와 갈라지는 용추교차로에서 옆으로 새어 나와야 합니다.

 

옛 국도 바래기재.

 

옛날에는 장승도 있었고 사람들 머무는 원(院)도 있었지만 지금은 휑뎅그렁합니다. ‘반락’은 중국 이태백의 한시 “삼산은 푸른 하늘 밖으로 반쯤 걸려 있고(三山半落靑天外)”라는 대목에 따왔다는데, 이와는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옛날 선비들이 서울 가서 치른 과거에서 낙방을 하고는 귀향길에 들렀습니다. 여기서 먹고 잤기 때문에 떨어졌다고 우기며 탐탁찮다는 뜻으로 반락(反樂)이라 했다 합니다. 그 뒤 안의 현감으로 부임하는 이들조차 이곳을 피해 거창 남상면의 관술령 고개를 넘었다고 합니다.

 

바래기재를 넘어 700m 정도 내려가면 왼쪽에 망한 주유소가 나타납니다. 새 국도 3호선이 뚫리면서 이런 변화가 생겼겠습니다. 여기서 200m 가량 나아가면 왼편으로 옛길이 있습니다. 전형적인 옛길이랍니다.

 

3. 평범한 병항마을에 비범한 쌀다리

 

이리로 650m쯤 들어가면 병항마을이 나옵니다. 평범한 농촌 마을이지만 앞에 놓인 다리는 비범합니다. 마을에서 길을 따라 대략 200m 나간 지점 개울가에 있습니다. ‘쌀다리’인데, 중심 받침돌 위에 커다란 돌 두 개를 이어붙인 널다리랍니다.

 

쌀다리와 효열각.

 

1758년 오성재·성화 형제가 쌀 1000석을 들여서 놓았습니다. 당시 안의현감 이성중이 들러 “어찌 오씨 가문이 번창하지 않겠는가” 칭찬하며 세운 설교사적비(設橋事蹟碑)도 있고 1910년과 1911년 세워진 오세안·오석규 공덕비도 있습니다.

 

고단함을 덜어주려고 다리를 놓은 데 대해 서울로 이어지는 이 길을 오가던 보부상들도 공덕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지금은 있지 않습니다. 쌀다리를 건너 용원정이 있습니다. 용원정은 병항마을 입향조(入鄕祖)인 구화공 오수 선생을 기리려고 후손이 세웠답니다.

 

앞에 착한 일을 했다는 오씨 집안 사람은 죄다 이 오수 선생의 후예입니다. 둘레에 좋은 바위가 많습니다. 옛날 길을 오가던 사람들에게 훌륭한 쉼터였겠습니다. 여기서 북으로 가는 옛길은 사라졌습니다. 일부 남아 있으나 이어지지 않으니 소용이 없습니다.

 

4. 옛길 따라 붙어 있는 오래 된 마을들

 

마을에서 옛 국도로 나와 3.7km 가량 달리면 마리면 사무소 소재지 말흘리가 나옵니다. 말흘리에는 가야 시대 자취가 있습니다. 국도 3호선과 국도 37호선이 갈라지는 마리삼거리 오른쪽 언덕에 가야 고분이 있습니다. 최근 발굴에서 접시·항아리·쇠도끼·화살촉 등이 나왔답니다.

 

말흘리 고분군에서 내려다본 마리면소재지 풍경.

 

북서쪽에는 창촌(倉村)이 있습니다. 창촌은 옛적 안의현의 동창(東倉)이 있었기에 얻은 이름인데 여기 사람들은 지금도 ‘창말’이라 이릅니다. 마을 남쪽 200m 지점에는 커다란 돌다리가 있었는데 모퉁이에 장승이 있었기에 장승배기다리라 했습니다. 지금은 같은 마을 뒤쪽에 있던 송림사지 석조여래좌상과 함께 거창박물관으로 옮겨가 있습니다.

 

고제 가는 길은 여기서 국도 3호선을 버리고 37호선을 따릅니다. 37호선은 경남 거창군과 경기도 파주시를 잇습니다. 창촌에서 나와 북쪽으로 3.3km 가면 왼쪽에 학동 마을이 나옵니다. 소나무로 이뤄진 마을숲도 있고 1640년(인조 18) 옆에 있는 영승 마을에서 옮겨와 마을을 연 전시언(全時彦)을 기리는 우수재도 있습니다.

 

바로 북쪽 왼편 영승(迎勝) 마을은 매우 큽니다. 역사도 오래 됐습니다. 조선 초기 정선 전씨가 가장 먼저 옮겨왔고 뒤이어 광주 이씨·선산 김씨·파평 윤씨가 들어와 함께 살게 됐다고 합니다.

 

영승서원.

 

영승이 처음에는 영송(迎送)이었습니다.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사신을 여기서 맞이하고(迎) 보냈다(送)고 붙은 이름인데, 퇴계 이황이 1543년 영승이라 고쳤답니다.

 

개울가 영승숲이 멋지고 사락정이라는 정자도 있습니다. 사락(四樂)은 농사·누에치기·고기잡이·나무하기와 같은 농촌 마을의 네 가지 즐거움을 뜻한답니다. 영승숲은 전통 수구막이 노릇도 합니다. 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띠 모양을 이뤄 마을 앞쪽의 트임을 막아주는 것이지요.

 

장풍숲.

풍계(豊溪)마을은 북쪽 2.2km 되는 지점 오른쪽으로 위천과 당산천이 만나는 자리에 장풍숲과 함께 있습니다. 위천을 지르는 다리는 장풍다리라 했습니다. 옆에 주막도 있었으니 주막과 다리와 숲이 어우러지는 풍경이었습니다.

 

원래 다리는 없어지고 대신 1960년대 들이세운 콘크리트 다리가 남았습니다. 국도가 나면서 다리는 기능을 다했고 자동차 말고 사람만 걸어서 지나다닙니다. 국도 위에 나 있는 새 다리에서 바라보는 옛 장풍다리는 고즈넉하고 예스러운 느낌이 묻어납니다.

 

5. 그 바로 옆에 있는 수승대와 황산마을

 

서둘러야 하는 걸음이 아니라면 여기 즈음에서 하룻밤을 묵어도 되겠습니다. 여기에 민박이나 여관 따위가 없는지라 장소를 옮겨야 합니다. 영승마을과 함께 퇴계 이황과 관련이 있는 수승대(搜勝臺)가 맞춤이랍니다.

 

여기는 잠자리가 많이 있습니다. 퇴계는 여기 이름도 수송(愁送)에서 수승으로 바꿨습니다. 아니면 바로 그 옆 황산마을도 괜찮겠습니다. 옛적 기와집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마을이거든요.

 

이튿날 둘러보는 시작은 당산마을입니다. 상율·도동 마을을 지나 2km 남짓 떨어진 당산마을로 들어섭니다. 여기는 마리면이 아닌 위천면이랍니다. 당산마을 또한 역사가 오래 됐다고 합니다.

 

6. 당산마을 당송과 무월마을 오장군 사적비

 

들머리 당송(거창 당산리 당송 천연기념물 제410호)이 증명합니다. 600살 정도 됐고 일부 가지가 꺾였으나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정월대보름마다 제사를 지내는 등 각별하게 보살피는 정성이 여기 있습니다.

 

 

당송은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웅웅’ 소리를 내어 미리 알려줬다고 하는데 그래서 영송(靈松)이라고도 한답니다. 1910년 경술국치, 1945년 국권 회복, 1950년 한국전쟁 때 몇 달 전부터 밤마다 소리 내어 울었다는 것입니다.

 

당산마을에서 마주친 한 아이. 혼자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당산·모전·원당마을을 거쳐 4.7km 정도 떨어진 왼쪽에 무월 마을이 있습니다. 들머리에 오장군 사적비가 있는데 옛것과 요즘것이 함께 놓였습니다. 요즘것은 드높고 크며 옛것은 조그맣습니다. 하지만 눈길은 옛것에 훨씬 많이 간답니다.

 

오장군은 조선 선조 대에 부사를 지냈다는 오적(吳勣)을 이릅니다. 오장군은 전북 무주구천동에서 뼈재를 넘어 여기로 다니며 호랑이도 제압할 만큼 기상이 대단했다는 인물입니다. 그이가 여기에다 돌지팡이를 꽂았습니다.

 

오장군사적비. 왼편이 새것, 오른편이 옛것.

무월마을 무월재(舞月齋). 춤추는 달이라니~~

 

7. 넘터 마을에 새겨진 사실과 전설

 

이어지는 주상면 넘터 마을은 1.8km 떨어져 고개 너머에 있습니다. 넘터는 마을 앞 고개 월치(越峙)를 이르는 토종말입니다. 마을에는 문의공 김식(金湜) 관련 자취가 있습니다.

 

김식은 조광조와 함께 훈구파를 제거하고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개혁 정치를 펼치다 1519년 기묘사화를 맞아 여기로 몸을 숨겼습니다. 들머리 동구바위 아래 숨어 지내다 바위에 백암(白巖)이라 써 놓고는 이듬해 6월 16일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헌종 때 이 마을에 그를 기리는 완계서원이 들어섰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지고 지금은 모정비가 서 있습니다.

'白巖' 글자가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습니다. 본인의 '결백'을 새긴 것일까요?

넘터 마을에는 바래기재에서 고제원을 넘어 서울로 이어지는 옛길과 관련된 전설도 있습니다. 여기 살던 남매 얘기입니다. 동생은 과거 급제를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누나는 그런 동생을 정성껏 보살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누나의 꿈에 도사가 나타나 “내일 아침 너와 동생의 신에 보리를 심어 동생것에 먼저 싹이 나면 과거를 보러 가고, 네것에 먼저 나면 동생이 과거에 떨어질 운명이니 과거를 보러 가지 말라”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이튿날 동생과 누나는 제각각 신발에 흙을 담아 보리를 심었는데, 사흘 뒤 누나 신에서만 싹이 났답니다. 동생은 오히려 화가 나 과거를 보러 황산을 거쳐 모동으로 해서 서울로 넘어가는 길로 갔는데 웬 일인지 보름이 지났어도 산을 넘지 못했답니다.

 

보름 동안 헤매다 겨우 넘어 갔지만 이미 과거는 끝난 뒤였습니다. 동생이 넘지 못한 그 고개를 그래서 보름재라 하는데 동생은 그 뒤 문과는 포기하고 무술을 닦아 장군이 됐고 그로써 마을 뒷산을 넘어 갔다고 해서 마을을 넘터라 이르게 됐습니다.

 

8. 옛길 주요 지점이었던 고제원

 

마지막 고제원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고제원에 앞서 고제면 원농산 마을에 잠시 들릅니다. 원농산 마을은 넘터 마을과 2.9.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용원정과 돌무더기가 있습니다. 냇가 언덕에 있는 이 정자는 둘레 숲과 아래 시내, 그리고 펼쳐진 들판과 먼 산이 눈맛을 시원하게 해 줍니다. 돌무더기에는 옛날에 사람들이 당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원농산마을 들머리 정자.

 

종점 고제원은 원농산 마을에서 1.3km 정도 더 가야 합니다. 옛날 역원인 고제원은 사라졌지만 원터라는 땅이름은 남았습니다. 아울러 여기가 옛길 중요한 지점임을 일러주는 높은다리와 음각선인상과 영세불망비도 남아 있습니다.

 

고제 마을 북바위(鼓巖)와 고암(鼓巖)정.

 

옛날 한 도승이 골짜기 시내에다 큰 돌로 다리를 놓아 길손의 고달픔을 덜었다고 합니다. 높이가 6m 길이가 11m였다는 ‘높은 다리(高梯)’의 유래입니다. 높은 다리는 마을과 면(面)의 이름이 됐습니다. 돌로 된 높은 다리는 없어지고 대신 콘크리트 다리가 있습니다.

 

콘크리트 높은 다리를 지나는 경운기.

 

지금 이 다리도 보기에 그럴 듯하답니다. 아래로 자연 암반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물이 낙차 있게 떨어져 흐르는 품도 좋습니다. 다리 옆 높직한 데에 입석(立石 선돌)이 있습니다. 음각으로 선인(仙人)상까지 새겨져 있어 거창 농산리 입석 음각 선인상(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 324호)이라 일컫습니다.

 

음각선인상. 선인은 신선이 아니고 앉아 있는 부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입석은 이정표 또는 수호신 노릇을 했겠습니다. 자연 화강암인데 높이 2.2m, 너비 1.5m, 두께 30cm 정도에 좌불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입석 왼쪽 아래에 알구멍(性穴) 자취가 있습니다.

 

높은 다리와 입석 사이에 있는 영세불망비도, 여기 옛길이 있었음을 일러주는 지표랍니다. 영세불망비 따위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데 목적이 있는데, 그러려면 사람 많이 다니는 길목에 세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9. 단순히 길만은 아니었던 우리 옛길

 

옛길은 다만 통로로서 길 이상이었습니다. 길은 그 시대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이 아로새겨져 있는 역사고 문화였습니다. 과거길이 그랬고, 장터길이 그랬습니다. 길과 길이 이어지는 고개는 저마다 사연을 한 자락씩 품고 있습니다.

 

옛 장풍다리와 새 장풍다리.

 

옛길이 사라지면서 주막도 사라지고, 버스 정류장이 되어주던 시골 점방도 덩달아 사라졌습니다. 이제 길의 주인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랍니다. 함양 삼산마을에서 바래기재를 거쳐 고제원에 이르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옛길은 그저 희미한 자취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빠름과 편리함에 익숙해질수록 더딤과 느림에 대한 향수는 더 강렬해집니다. 이제는 거의 사라져버린 이 옛길은, 우리가 지금 누리는 편리함만큼 잃어버리고 있는 소중한 무엇에 대한 가치를 되살펴 보게 합니다.

 

김훤주

 

※ 2012년에 문화재청에서 비매품으로 발행한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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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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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heysukim114.tistory.com/ 저녁노을 2013.06.10 06: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옛날 고풍스런 모습들이 보이는군요.
    싱그러운 숲속에서 피톤치드 가득 풍겨져 나올 것도 같구요.
    잘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