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거창 선비들의 으뜸 싸움터 수승대

김훤주 2013. 6. 16. 08:00
반응형

탐방 루트

 

수승대-1km, 황산마을-1.8km, 정온생가/반구헌-9km, (말목고개에서 왼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어서 갈 수 있음- 4.8km) 모리재-1.9km, 강선대- 5km, 분설담-6km, 갈계숲/만월당(강선대~갈계숲은 1.2km)-1.4km, 농산리 석불입상-0.5km 말목고개-3.3km(숲길은 2.9km, 걸어서 1시간), 수승대

 

1. 조선 천지 으뜸 명승 수승대라지만

 

선비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요? 아마 대쪽 같은 기개 따위이기 십상이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허상입니다. 일부는 그랬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따져보고 되짚어보면, 그이들 역시 때가 묻고 욕심 부리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누리고 잘 대접받고 싶은 마음은 신분과 시대를 초월하는 인지상정이니 말입니다. 그런 자취가 거창에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수승대(搜勝臺)(명승 제53호)는 물과 숲과 바위의 어울림입니다. 그 가운데 바탕은 물입니다.

 

예부터 산 좋고 물 좋은 데에다 정자를 짓고 양반과 선비들이 모였습니다. 지배집단으로 아래 신분 사람들을 부리고 부를 독점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 있게 살았던 양반들은 그런 여유로움으로 멋을 찾고 풍류를 즐겼습니다. 풍광 좋은 계곡이나 기암절벽에다 정자를 세웠고요,

 

수승대에 들어서 있는 구연서원.

지역에서 그이들이 전반적으로 구심 역할을 했던지라 정치·문학·교육 등에 영향을 미치는 정자 문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조선 선비들은 여기를 영남 으뜸 동천(洞天) 가운데 하나로 꼽았습니다. 용추폭포의 심진동과 농월정·동호정 따위가 있는 화림동과 수승대가 있는 원학동을 일러 ‘안의삼동(安義三洞)’이라 했습니다.

 

화강암으로 이뤄진 깊고 길고 큰 계곡과 주변 산림이 어우러져 이른바 자연경관이 빼어납니다. 징검다리 등으로 물을 건너 한 바퀴 돌아보는 산책로를 걸으면 아름드리 소나무와 참나무가 한낮에도 서늘한 그늘을 만듭니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던 이곳은 신라로 가는 백제 사신들을 수심에 차서 송별하는 곳이라 해서 ‘수송대(愁送臺)’라 했답니다. 수승대는 1543년 여기 마리면 영송 마을 처가에 설 쇠러 왔던 퇴계 이황이 고쳐 지은 이름이랍니다.

 

2. 양반 선비들이 욕심껏 싸우던 자리

 

퇴계 이황(1501~71) 개명시와 갈천 임훈(1500~84) 화답시가 유명하고 요수 신권(1501~73)의 관련 시도 있습니다. 수승대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겨 바위에 새긴 이들의 시는 뒷날 긴 세월 동안 임씨와 신씨 가문의 부질없는 탐욕으로 얼룩졌다고 합니다.

 

신씨 문중은 거북바위에 ‘樂水藏修之臺(요수장수지대)’라 새겼고 임씨 문중은 ‘葛川杖屨之所(갈천장구지소)’라 새겼습니다. 신씨 집안은 요수 신권의 숨어서(藏) 수양하던(修) 데라 하고, 임씨 집안은 갈천 임훈의 지팡이(杖) 짚고 신발(屨) 끌던 데라 했습니다.

 

갖은 글씨와 사람 이름이 새겨져 있는 수승대 거북바위.

 

뿐만 아니라 이 두 가문은 나중에 후손의 벼슬이 높아지고 낮아짐에 따라 수승대의 소유권을 두고 낯 뜨겁게 다투었습니다. 조선 말기 3대 문장가로 꼽혔던 이건창은 수승대를 돌아본 뒤 ‘수승대기’에 썼습니다. 이렇게요.

 

“수승대는 시냇물 가운데 있는 한갓 바위일 뿐이니 누구 소유가 될 물건이 아니다. 그러니 어찌 소송이 있겠는가. 이곳의 아름다움은 빼어나지만 두 집안의 비루함은 민망하다.” 하지만 수승대 거북바위에는 갖은 글씨가 가득하답니다. 옛말에 좋은 물건은 손을 타서 더러워지기 쉽다 했습니다.

 

시내 가운데 바위 하나를 두고 그토록 싸움을 그치지 않았던 두 가문의 이야기는 역사에 남길 만합니다. 탐욕과 비루함의 끝을 누구의 소유도 아닌 수승대는 말없이 바라볼 뿐입니다.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수승대가 욕심 앞에 또 어떤 수난을 겪을지 걱정스레 바라보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3. 제발, 요수(樂水)랑 관수(觀水) 좀 제대로 하기를

 

시내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는 요수정(樂水亭: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3호)과 구연서원 관수루(龜淵書院 觀水樓: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2호)가 있습니다. 구연서원 뜰에는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 새긴 빗돌이 있는데 산처럼 높고 물처럼 영원하다는 뜻이겠지요.

건너편에 요수정이 보입니다.

관수루는 구연서원의 문루로 요수(樂水) 신권이 공부하며 노닐던 곳입니다. 여기서 굽이치며 흐르는 물을 바라봤을 텐데 계단을 따로 내지 않아 왼편 바위를 타야 올라갈 수 있습니다. 안쪽으로는 가문의 위상을 내세우는 비석들이 불편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건너편 요수정 또한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에 정진하며 고향에서 안분낙도한 신권과 관련이 있습니다. 물(水)은 학문의 표상입니다. 모르는 사이에 사람과 세상을 적십니다. 가장 낮은 곳부터 채우면서 위로 올라옵니다. 배움과 실천은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뜻이 관수와 요수에 담겨 있습니다.

 

3. 옛 담장과 새 담장이 어우러지는 황산마을

 

황산마을은 수승대 맞은편 길 건너편 신씨 집성촌으로 옛적 기와집들이 무리지어 있습니다. 황산리 신씨고가(경상남도민속문화재 제17호)라고, 1927년 옛 건물을 헐고 다시 지은, ‘원학고가(猿鶴古家)’라고도 일컫는 집이 가장 유명합니다.

 

 

안채, 사랑채, 중문채, 곳간채, 솟을대문, 후문 등이 있습니다. 벼슬살이를 한 사람의 집은 아니지만, 지붕 꼭대기에 눈썹마루까지 넣어 한껏 멋을 부렸습니다. 여기 옛 담장(등록문화재 제259호)은 흙과 돌로 쌓았는데 활처럼 휘어지면서 이어짐으로써 옛집들과 잘 어울리게 돼 있습니다.

 

황산마을 옛 집 가운데 하나.

 

여기 찾은 사람들은 보통 옛 집보다는 옛 담과 옛 길에 더 많이 눈길을 주는 편입니다. 물이 잘 빠지도록 하려고 아래쪽은 흙은 없이 커다랗고 네모난 자연석만 써서 쌓았으며 그 위에 황토와 작은 돌을 섞어가며 쌓아 올렸습니다.

 

 

그런데 옛 담장만 여기 있지는 않습니다. 거기에는 벽화를 그려넣었습니다. 바깥으로 튀어나오게도 했고 위로 솟도록도 했습니다. 황산마을이나 수승대의 유래를 일러주는 내용도 덧붙어 있습니다.

 

 

아이들은 다른 데보다 여기서 더 즐겁게 노닙니다. 자기랑 통하는 바가 옛 담장들보다 더 많기 때문이겠지요. 여기서는 민박을 할 수도 있고 토속 밥상도 마주할 수 있습니다.

 

4. 동계 정온과 추사 김정희의 동병상련

 

거창을 대표하는 선비로 충절을 지킨 동계 정온(1569∼1641)이 태어나 살던 정온 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205호)은 조선 양반집의 세련됨과 우아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채에 걸려 있는 '모와' 현판.

 

사랑채에서 오른쪽에 누정이 튀어나와 있고 눈썹지붕(벽 또는 지붕 끝에 물린 좁은 지붕)을 얹은 특징이 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는 추운 북부지역 가옥처럼 겹집이지만 기단은 낮고 툇마루가 높은데 이는 한반도 남부에 고유한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온 고택. 대문으로 사랑채가 보입니다.

안채, 사람이 살고 있는 정취가 물씬 묻어납니다.

 

정온은 광해군과 인조 때 사람입니다. 광해군의 미움을 사서 10년 동안 제주도로 유배 갔다가 인조반정으로 풀려났습니다. 병자호란 때는 최명길 등의 주화에 맞서 척화로 일관했으며 임금이 삼전도서 치욕을 겪자 자결을 했으나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 뒤 고향으로 여기 돌아와 숨어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화가 옳으냐 척화가 옳으냐 논란은 일단 접어두더라도, 자기 품은 바 소신을 행동으로 거침없이 옮기는 자세만큼은 높이 사야 마땅하겠습니다.

 

정온 고택 사랑채에는 추사 김정희가 쓴 忠信堂(충신당)이라는 현판이 다른 것들과 함께 걸려 있습니다. 추사도 동계와 마찬가지로 제주도에서 귀양살이(1840~1848)를 한 적이 있습니다.

 

충신당 현판.

 

그이가 귀양에서 풀려나 서울로 가는 길에 여기 들러서 썼다고 합니다. 그이의 그림 세한도가 여기 겹쳐지면서, 동계와 추사 사이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이 짙게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옆에는 반구헌(反球軒:문화재자료 제232호)이 있습니다. 철종 때 양현현감을 지낸 정기필이 지내던 곳인데요, 택호 반구는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한다는 뜻이랍니다. 주인 정기필은 호가 야옹(野翁)인데요, 요 선비의 말장난이 재미있습니다.

 

 

야옹은 인품이 높고 덕행이 많았다고 합니다.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왔지만 재산이 없어 거처를 구하지 못했고 결국 당시 안의현감이 도와줘서 여기 반구헌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공직자 비리가 여전히 문제 되고 있는 오늘날, ‘청렴결백’을 되새겨봄직한 장소가 할 수 있겠습니다.

 

5. 으리으리하게 커다란 재실 모리재

 

정온 고택에서 모리재까지 5km 숲길이 이어집니다. 정온이 다녔을 길로 짐작된다 해서 거창군이 역사 탐방로라 이름붙였는데 숲이 우거져 있으되 경사는 가파르지 않습니다. 수승대를 품고 있는 성령산 오솔길로 가다 보면 수승대 전체를 내려다보는 전망대를 만난답니다.

 

말목고개. 왼편 자동차 있는 데에 모리재 가는 산길이 있습니다.

 

숲길 가운데 즈음에서 말목고개가 나오고 아스팔트길을 건너 왼편으로 모리재 가는 길이 이어집니다. 북상면 농산리 모리산 중턱에 있는 모리재(某理齋: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07호)는 재실 치고는 매우 규모가 큰 조선시대 건물입니다. 남부 지역 민가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모리재 안 사당.

 

 

정온이 이 산 속에서 늘그막을 보냈답니다. 정온은 여기서 조를 심고 산나물을 뜯었습니다. 이를 기려 후대에 지은 재실입니다. 모리(某理)는 “거처를 물으면 모르는(某) 마을(里)로 갔다고 하라”고 정온이 일러줬다는 데서 나왔답니다. 정온 고택 사랑채 현판 모와(某窩:모르는 움집)와도 통하지요.

 

모리재 옆에 있는 유허비.

 

6. 강선대와 분설담과 만월당

 

이어지는 강선대 마을은 모리산 자락 북상면 농산리 산촌입니다. 모리재에서 내려오는 임도의 끝자락입니다. 거창군을 가로지르는 위천이 마을 앞을 흐릅니다.

 

마을에는 강선정이 있고 시내 옆 길가에는 한자로 ‘강선대’라 적힌 바위가 있습니다. 신선(仙)이 내려왔다(降)는 것인데, 그만큼 아름답다는 얘기겠지요. 과연 그러해서 퍼질러 앉아 몇 시간 놀아도 전혀 지겹지 않겠습니다.

 

 

분설담(噴雪潭)은 흐르는 물이 바위에 부딪혀 마치 못에서 눈가루를 뿜어내는 듯하다고 붙인 이름입니다. 강선대에서 분설담까지는 대략 5km, 갔다가 돌아와야 하므로 10km, 다음에 들르는 갈계리까지 1km를 더하면 11km랍니다. 선비들이 탁족(濯足)으로 더위를 식히며 풍류를 누리던 장소지요.

 

왼편 가운데 아래에 분설담이 새겨져 있습니다.

송준길의 글씨라고 합니다.

여기 너럭바위에는 옛 자취가 여럿 남아 있습니다. 부산·담양 등 여러 사적비에 글씨를 남긴 조선 후기 동춘당 송준길(1606~72)의 글씨가 새겨져 있고 경상감사를 지낸 김양순(1776~1840)은 이름이 깊게 파여 있습니다. 해질 무렵 쏟아지는 햇살을 바위 위로 흐르는 물들이 튕겨내곤 한답니다.

 

남명 조식(1501~72)은 1558년 써낸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 이런 글씨 새기기를 아프게 비판했습니다. "대장부의 이름은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사관이 책에 기록해 두고 넓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차하게도 원숭이와 너구리가 사는 숲속 덤불의 돌에 이름을 새겨 영원히 썩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나는 새의 그림자만도 못해 까마득히 잊힐 것이니, 후세 사람들이 날아가 버린 새가 과연 무슨 새인지 어찌 알겠는가?"

 

만월당(滿月堂: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70호)은 만월당 정종주(1573~1653)를 기리려고 1666년에 세웠다는데 1786년에 고쳐지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가운데 두 칸은 대청이고 좌우에 방을 하나씩 들였습니다. 별달리 꾸밈이 없고 간결합니다.

 

 

거창 지역 문인들이 서로 사귀는 장소여서 지역 문화를 뿌리내리고 꽃피우는 데 이바지한 바가 크다는 평을 듣는다고 합니다. 정온의 <동계집(桐溪集)>에 ‘정찬보만월당기(鄭贊甫滿月堂記)’가 실려 있습니다. 찬보는 정종주의 자인데요, 그만큼 만월당의 역사가 뚜렷하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7. 갈계숲과 농산리 석불입상

 

갈계숲(거창군 천연보호림 제2호) 이름은 임훈의 호 갈천에서 비롯됐습니다. 임훈은 어버이를 정성으로 모셨으며 수신(修身)을 으뜸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당대 선비들이 중국 것은 잘 알고 찾으면서도 우리나라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 데 대해 비판하면서 우리 역사를 찾아 알려고 애썼다고도 합니다. 그이와 형제들이 거닐었던 갈계숲은 높이가 평균 20m, 나이가 200~300년 된 소나무·느티나무·느릅나무 따위로 이뤄져 있습니다.

 

농산리석조여래입상(農山里石造如來立像:보물 제1436호)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입니다. 북상면 농산리의 낮은 야산 기슭에 있습니다. 바위를 원추 모양으로 다듬어 불상과 광배를 돌 하나에 다 새겨넣었습니다. 높이가 2.7m나 되지만 수법이 상당히 세련돼 보입니다.

 

사진 찍은 때가 가을이어서인지 앞에 밤톨과 들꽃이 앞에 놓였습니다.

 

달걀 모양으로 오동통하게 복스러운 얼굴, 알맞은 이목구비와 은근한 웃음, 당당한 가슴과 유연한 어깨, 잘록한 허리, 얇은 옷 속에 비치는 실물 같은 몸매 등은 당대의 리얼리즘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망가진 데가 없지 않지만 규모도 크고 수법이 빼어난 데 더해 비슷한 경우가 많지 않다는 점까지 더해져 값어치를 톡톡하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탐방로가 조성되면서 이제는 관광코스가 되고 있습니다. 선이 만들어지면서 편한 길이 됐지만 대신 찾아나서는 재미는 덜합니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도록 다듬고 개발하는 편이 좋은지 손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 두는 편이 더 나은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겠습니다.

 

하지만 수승대를 인간들이 탐욕으로 얼룩지게 만들었던 역사는 오늘날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지 말자는 거울로 삼아야 마땅하겠습지요.

 

김훤주

 

※ 2012년에 문화재청에서 비매품으로 발행한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