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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본 세상/사람이야기

장영달 전 의원 "나는 한광옥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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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에서 국회의원을 4선(16년)이나 했던 정치인. 그가 경상도에 와서 다시 2012년 4·11총선에 출마한다고 했을 때 난 그를 별로 믿지 않았다. 그저 전라도의 자기 지역구에서 밀려나자, 또 다른 연고지를 찾아 온 것쯤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선거가 끝나면 슬그머니 사라질 그런 사람으로 여겼다.


어? 그런데 뭔가 달랐다. 2011년 7월 14일, 그가 어릴 때 살았고, 지금도 노모 조판이(93) 여사가 살고 있는 함안군 가야읍 말산리에 전입신고를 한 그는 1년 하고도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같은 집에 살고 있다. 게다가 4·11총선 야권단일화 경선에서 통합진보당 후보에게 밀리자 깨끗하게 승복하고 사무실과 집기까지 제공하며 힘을 보탰다. 경선 과정에서 상대후보 측이 인터넷에 올린 근거 없는 인신비방 글을 문제 삼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야권후보 승리를 위해 불문에 부치는 대인다운 면모를 보여줬다.


총선이 끝나고 본격 대선 국면이 시작됐지만, 그는 경남을 떠나지 않았다. 지난 5월 민주통합당 경남도당 위원장으로 추대된 그의 첫 일성은 ‘현장 밀착 정치’였다. 18개 시·군 민생 현장 방문에 나선 그는 8월 들어 밀양 송전탑 건설 저지 농성장에 아예 자리를 펴고 앉았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농성장에서 먹고 자고 일하며 투쟁하는 주민들과 고락을 함께하고 있다.


장영달 전 국회의원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에 대한 의심의 시선을 완전히 거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쯤에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왜 왔는지, 뭘 하려는 것인지 기록해두고 싶었다. 장영달(1948년생) 전 국회의원 이야기다.


그를 만난 건 10월 8일 월요일 오전 창원시 성산구 중앙동 리제스타워 2층에 있는 경남도당 사무실에서였다. 전날이 일요일이었지만 그는 밀양 천막에서 자고 아침에 창원으로 넘어왔다고 했다. 약속시간에 30분쯤 늦은 그는 “병원 가서 물리치료 좀 받고 오느라고 늦었다”며 양해를 구했다. 천막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목 디스크가 왔다는 것이다.


밀양 송전탑 투쟁에 올인하는 까닭은?


-추석 연휴에도 병원에 있었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서울에서 이틀간 병원에 있었는데, 밀양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 결국 이틀 있다가 밀양으로 돌아왔지.”


-밀양 송전탑 현장에서 투쟁하는 할배·할매들이 이젠 다 아시겠네요.

“다 알죠.”


-한국전력공사 사장이 지난 주말(지난 10월 5일)에 왔다 갔잖아요. 해결방안이 보입니까?

“시골 어른들 세 명에게 10억 원씩 배상하라고 손배소송을 내놓은 게 있거든요. 1000만 원도 내놓을 능력이 없는 분들에게 10억을 내놓으라는 건데, 그걸 취하했다는 게 우선 다행이죠. 주민들에게 또 업무 방해한다고 매일 100만 원씩 배상하라는 것도 있었고, 반대하다가 부딪히고 충돌이 생기면 그걸 갖고 또 경찰서에 고발을 하니까 매일 주민들이 잡혀가고 했는데, 그걸 이번에 모두 취하를 해서 주민들이 우선은 좀 잠시라도 마음이 편해질 수 있어서 다행이죠. 그리고 한전 사장이 지금까지 충분히 대화를 못한 데 대해서 사과를 하고 처음부터 다시 대화를 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소득이고, 한전 사장과 통할 수 있는 부사장이나 전무급으로 실무협상을 하겠다고 했으니 희망을 가져볼 수도 있긴 한데, 저 사업이 국책사업이다 보니 사업을 포기하는 건 쉽지 않을 거란 말이죠. 주민들은 이 사업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 한전도 포기할 순 없다는 입장이니 그 접점을 어떻게 찾느냐가 문제죠.”



-해결방안이라는 게 사업을 아예 철회하는 겁니까? 아니면 노선을 바꾸는 겁니까?

“신고리원전에서 나오는 전기를 수송하는 것은 지금 있는 송전탑만으로도 가능하다는 게 주민들의 주장이예요. 그런데 한전은 미래 수요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 이걸 만든다는 거거든요? 그래서 주민들은 미래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걸 갖고 왜 이리 주민들을 괴롭히는가, 이런 싸움이예요. 그리고 또 하나는 애시당초 처음 설계가 지금의 노선이 아니었다. 변경사유를 대라, 이것도 큰 입장 차입니다.”

   

-한전 입장은 여러 노선 중에서 사업비가 적게 드는 노선을 택하려다 보니 그렇다는 거죠? 유력자의 딸 소유 땅이 있다는 말도 있고….

“그렇죠. 이치우 어르신이 분신한 그 마을의 경우, 상식적으로 봐도 마을 뒷산으로 가도 되는데, 굳이 마을을 휘감고 가느냐는 거였어요. 그 산 너머에 유력인사의 조카딸 땅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 마을 이장 말씀을 들어보니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집에 5갤런 짜리 휘발유통을 준비해두고, 가을걷이 끝난 뒤 다시 공사를 하면 뒤집어쓰겠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하거든요. 주민들이 승복이 안 되는 거예요. 그만큼 심각한 상황이예요.”


-그나마 국정감사도 앞두고 있고, 이게 전국적인 이슈가 된 것도 위원장 님의 역할이 컸던거죠?

“6월인가? 밀양에서 주민들이 집회를 한다기에 가봤어요. 저는 적어도 제 나이 정도는 된 사람들이 올 줄 알았죠. 그런데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 할매들이 오는 거예요. 이 더운 날 저런 노인들이 왜 오나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양반들이 주력이라 이게. 아휴~. 얘길 들어보니 지난 겨울 엄동설한에 80 넘은 할매들이 싸웠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그런 걸 보면서 우리 정치하는 사람들이, 백성이 저토록 살겠다고 절규를 하면 그건 나라에서 해소를 해야지, 그걸 짓밟는 건 국가가 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들어갔는데, 이 정도라도 대화국면이 트이게 된 건 다행이라고 생각은 해요. 그리고 주민들이 아주 훈련이 잘 되어서 논리가 정연해요. 식견도 대단하고, 그래서 협상이라든지 그런 것은 주민들이 알아서 해도 돼. 다만 폭력이라든지 그런 문제가 안 생기도록 우리가 방어막, 울타리를 쳐주는 역할 정도만 하는 거죠.”


-국회의원이 아닌 원외 정치인 입장에서 이런 투쟁현장에서 함께 해보시니 좀 어떤가요?

“더 힘들고 더 서럽고 더 고통스럽죠. 그러나 당하는 주민들의 고통에 비하면 10분의 1도 안되죠. 그래도 제1야당이라는 정당이 있기 때문에 개인으로서 싸우는 것보단 훨씬 낫죠. 원외의 서러움쯤이야 얼마든지 감수해야죠.”


그가 끝까지 반성문을 쓰지 않은 이유



-지금 원외가 아니라 현역 국회의원이라면 뭘 하고 있을까요?

“아마 민주당 진상조사단 단장으로 와있겠죠. 현재 조경태 의원이 단장으로 해서 얼마 전 왔다 갔는데, 제가 국회의원이라면 선임이니까…. 특히 경상남도는 제 어머니가 52년째 여기 함안에 살고 계시니….”


-52년째라고요? 서울에 계시다가 몇 년 전에 오신 게 아니고?

“내가 결혼을 늦게 해서 아이들이 어리고 하니까 서울 우리 집에서 아이들 키워주시는 동안 서울과 함안을 왔다 갔다 하셨죠. 52년 전 함안으로 이사 온 이후 아버지 돌아가신 뒤에도 평생 그 집에서 살고 계시죠. 올해 93세예요.”


-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나요?

“제가 74년도 민청학련 사건으로 처음 구속이 됐다가, 75년 형집행정지로 잠시 나왔는데, 같은 해에 다시 구속이 됐어요. 처음 구속됐을 때 함안경찰서 앞에 가셔서 그랬다더군요. ‘박정희가 빨갱이지, 왜 내 아들을 잡아 갔나’라고 항의를 하셨대. 그래서 체포되어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그 때는 계엄령 하여서 박정희를 비난하면 군사재판을 받아야 했어요. 서울로 송치될 상황이었는데, 내가 나중에 듣기론, 함안에 계시는 1500세대의 농민들이 진정서를 올렸대요. 아들이 구속되어 아버지가 화가 나서 한 번 외친 건데 아버지까지 군사재판에 회부시킨다는 건 가혹하다, 이런 내용으로…. 그 덕분에 20일간인가? 구류를 살고 나오셨대요.”


-그 때 아버지 연세가?

“음, 55세 정도 되셨죠. 그러다가 중간에 내가 석방됐는데, 9개월 만에 다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재구속됐어요.”



-9호가 뭐였죠?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조작이라고 떠들고 다녔다는 거지. 긴급조치에 대한 비판 자체를 금지시킨 조치였는데, 내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 중 거기서 인혁당 사건으로 들어온 사람을 만났어요. 어찌나 고문을 심하게 당했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더라고. 그래서 내가 ‘대체 무슨 사건으로 이렇게 당했냐’고 물었더니 그 분이 ‘우리도 인혁당이 뭔지 모르겠는데, 우릴 인혁당이라 몰아대면서 이런다’라고 대답을 해요. 그 분도 사형 당하진 않았지만 대구 영천에 살다가 결국은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다고요?

“나는 형집행정지로 나왔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더라고. 그래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조작된 사건이라고 폭로하고 다녔던 거지. 그 죄목으로 다시 잡혀 들어가 7년을 꼬박 채운 거지.”


-7년 동안 석방될 기회가 전혀 없었나요?

“다시 1년을 살고 나니까 중앙정보부에서 네 번을 나와서 반성문을 쓰라더라고. 나는 반성할 게 없으니까 쓸 수 없다고 버텼지.”


-적당히 반성문 좀 쓰시고 나오시지 그랬어요?

“사람이 투쟁을 하다가 자기 소신이 옳았다면 끝까지 소신을 지켜야지, 반성문을 써버리면 나중에 변절자가 되어 투쟁의 영속성이 없어지는 거지. 처음엔 반성문 쓰라고 했다가 각서 쓰라 했다가, 반성문이란 제목이 기분 나쁘면 그냥 나의 입장이란 제목으로 한 줄 쓰고 나가라더라고. 그것도 못하겠다니까 국방부장관 서종철 이름으로 재집행 지휘서라는 게 날아오더구만. 그래서 꼬박 살았지 뭐.”


7년 감옥살이 후 다시 감옥행을 선택하다


출소한 후에도 그는 1983년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하고 곧바로 구속됐다.


기록에 따르면 1883년 9월 30일 저녁 7시 서울 성북구 돈암동 카톨릭 상지회관에서 치러진 창립대회에서 장영달 부의장이 ‘우리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지 않은가?’라는 발기문을 낭독한 데 이어 ‘민주․민중․민족통일을 우리 모두에게’라는 창립선언문을 김근태 의장이 낭독함으로써 민청련은 공개대중정치투쟁단체로서 정식 출범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 1986년에는 문익환 목사와 함께 한 민주통일민중연합(민통련) 총무국장으로 5․3인천사태를 주도한 혐의로 세 번째 구속되어 다시 1년의 감옥 생활을 했다.



-김근태 의장과는 같은 연배인가요?

“나이는 한 살 위였는데, 학번은 3년이나 빨랐어요. 우리 같은 촌놈은 늦게 들어가고 했지만, 근태 형은 일곱 살엔가 들어가서 우등생으로만 좍 다니고.”


-74년 민청학련 사건 때는 보안대 서빙고, 83년 민청련 사건 때는 남산 안기부, 86년 인천사태 때는 경찰의 남영동 대공분실 이렇게 다녀오셨는데, 각각의 특징이 있던가요?

“각각 특성이 달라. 그래도 남산은 나름대로 과학수사를 한다는 시늉을 해. 처음부터 두들겨 패고 하진 않아요. 나중에 자기들 원하는 대로 안 되면 패는 거지. 그런데 보안대는 들어가자마자 작살을 내.”


-남영동에서 고문은 안 당했나요? 김근태 의장도 거기서 당했고, 박종철 열사도 거기서 살해당했잖아요.

“남영동에는 글쎄. 김근태․박종철이 왜 그렇게 당했느냐면, 취조실마다 욕조가 있어요. 물을 찰랑찰랑 받아놓고, 여차하면 욕조에 머리를 들이박는 거야. 민청학련 때 보안대에서도 혹독하게 당했지만, 남영동에선 특별한 고문을 많이 당했어요. 물고문이 전통이고, 칠성판이라는 데에 딱 묶어놓고 물을 먹이기도 했고. 김근태는 전기고문까지….”


-민청학련 때 보안대에서는 어떤 고문을?

“몽둥이로 매타작하고, 주전자로 물 먹이고….”


-정해진 각본을 끼워 맞추려고 고문을 했을 텐데, 그 때 인혁당 이야긴 안 하던가요?

“인혁당이란 건 아예 있지도 않았지. 그러니까 민청학련 사건 다 만들어놓고 국민에게 발표를 하는데, 어린 학생들만 갖고 갑자기 빨갱이라 하기엔 논리가 약하니까, 4․19혁명 때 활동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을 잡아들여서 인혁당이라고 끼워 맞춘 거지.”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통산 8년을 감옥에서 청춘을 바쳤는데, 그거 둘 다 민주화운동유공자로 지정받았다면 보상금이 상당하겠는데요?

“상당히 받아서 민주화운동단체에 기증한 부분도 있고, 마누라에게 양평에 조그만 집도 지어줬고….”


-얼마 받았나요? 몇 억 원은 될 텐데.

“형사보상금을 3억 정도 받았는데, 그걸로 내가 전주에서 나올 때 1억을 투자해서 교회를 하나 만들어놓고 나왔어요.”


-그 돈으로 교회 설립이 되나요?

“전주 외곽의 시골이니까. 그 교회 목사님이 내가 목포교도소에 있을 때 절도범으로 들어온 사람이었어요. 절도죄로만 16년을 넘게 감옥살이를 한 분인데, 나중에 정식으로 연세대 신학대를 나와서 목사가 됐죠. 그 분이 그 교회 책임자죠. 교도소에서 만나 알게 되어 내가 책을 많이 줬는데, 그걸 읽고 그 때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해요. 교도소에서 검정고시를 시작해서 정식 목사가 되신 분이죠. 지금도 각 교도소 교정담당 활동을 해요. 또 교도소 있다가 출소하면 공부를 시키고…. 우리나라에 둘도 없는 분이죠.”


-교회 이름이?

“늦봄교회.”


-문익환 목사님 호 아닌가요?

“우리가 늦게 이런 일을 시작했다는 뜻도 있고, 문익환 목사님을 기리는 뜻도 있고. 법인으로는 요셉선교회로 되어 있죠.”


함석헌 선생과 함께.


아들 때문에 울화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가 옆으로 좀 빠졌는데, 아버지는 그래서 언제 돌아가신 거죠?

“내가 민청학련 구속됐을 때 함안경찰서에서 고함을 질렀다가 잡혀 들어갔다 나오셨잖아요. 그런 뒤에 내가 또 재수감되었거든? 그러니까 그 때부터 그냥 술로 세상을 비관하며 사신 거예요. 평생 농사만 짓던 분인데, 두 홉짜리 소주도 비싸다고 됫병으로 그냥 드셨다더만. 그러다 57세 때 내가 목포교도소 있을 때 돌아가셨어요. 화병, 술병으로….”


-그 때 마음이 많이 아프셨겠습니다.

“아버지를 명대로 살지도 못하게 하는 죄인이었지….”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떻게 만나신 겁니까?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두 살 연상이신데, 원래 우리 외가가 함안인데, 산청 함양 고개 넘으면 남원이잖아요. 그런데 외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외할머니가 산청에 우리 이모와 함께 살았어. 우리 이모부가 산청 함양 남원을 오가면서 무슨 장사를 했는데, 그래서 인연이 되어 중매를 했나봐.”


-태어나긴 남원에서 태어났다가 초등학교를 나온 후, 함안으로 가족 전체가 이사를 온 건가요?

“4학년까지는 남원 송동초등학교를 다녔고, 큰형이 전북대학교를 나와서 교편을 잡으니까 거기 따라가서 전주 동초등학교 5․6학년 졸업을 하고, 중학교 1학년 때 함안으로 와서 함안중학교에 입학했죠.”


-왜 함안으로 이사 오게 된 거죠?

“내가 중학교 1학년 첫 여름방학 때 남원 집에 왔는데, 그 때 네 살 먹은 남동생이 바가지 우물에 빠져 죽었어요. 우리 어머니가 목화밭을 메고 저녁에 와서 우물물을 떠서 밥을 해서 저녁에 멍석 깔고 먹으려는데, 네 살 먹은 아들이 안 보여. 알고 보니 동생이 거기 빠져 죽은 거지.”

 

-우물이 원래 좀 턱이 좀 높지 않나요?

“거기는 물이 철철 넘치는 바가지 우물이라니까.”


-팔남매 중에 남동생도 포함된 건가요?

“아니죠. 살아있는 형제가 팔남매죠.”


-그래가지고요?

“그래가지고 어머니가 충격을 받아 정신분열이 왔어요. 아들 죽은 우물물을 떠서 밥을 해먹으려 했으니까. 그 때만해도 우리가 좀 부농이었는데,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리려면 아무래도 이곳을 떠나야 겠다 해서 논밭을 헐값으로 막 팔았어요. 그래서 원래 외가가 있던 함안으로 온 거죠. 그 때가 61년도야.”


-그래서 온 곳이 가야읍….

“가야읍 말산리. 지금 살고 있는 집이죠.”


-그래서 함안중학교를 나온 거로군요.

“처음엔 바로 전학이 안 돼서 군북중학교에 한 학기 다니다가 왔어요.”


-그러면 축구는 함안중학교 와서 시작하게 된 건가요?

“오다가다 하다 보니 한 해가 꿀려졌어요. 내가 좀 덩치가 컸던가봐. 그래서 체육교사가 골키퍼하라고. 그래서 축구선수가 되었어요.”


-그 때 함안중 축구가 제법 유명했죠?

“진주남중, 통영중, 마산동중, 함안중학교가 라이벌이었죠.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축구를 했죠.”


당시 졸업앨범에 실린 함안중 축구부 사진(상단 중앙)./임종금 기자


-고등학교는 큰 형이 있던 전주고등학교로 갔는데, 당시 전주고가 좀 세지 않았나요?

“쎘죠. 그 땐 함안중에서 축구를 하면서도 공부를 많이 시켰어요. 마산고도 많이 갔고….”


-대학은 왜 국민대학교로 갔나요?

“전주고 마치고 서울대 낙방을 하고 재수를 했는데, 그러니까 군대에서 입대 영장이 나왔어요. 그래서 군대 가기 전에 입학을 해야겠다고 해서 잡지를 사다놓고 보니까 국민대 고문이 김구 선생, 설립자가 신익희 선생이어서 바로 거기 원서를 넣었죠.”


“민청학련 사건도 조작이었다”


-입학을 해놓고 군대를 가신 거네요? 그런데, 제대하고 왜 학생운동을 하게 됐나요?

“제대하고 1학년 2학기 복학을 하니 기독교학생회라는 게 있어요. 우리 누님 따라 교회에 다녔던 계기로 거기 가입을 했는데, 3학년 때 내가 회장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게 전국조직이 있더라고. 종로에. 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산하단체로 기독학생연맹이 있었고, 거기에 박형규 목사님이 있었는데, 그 단체가 유신반대를 했어요. 그 당시 우리가 볼 때 박정희 독재는 하나님 말씀에 반하는 거였거든. 그래서 막 대든 겁니다.”


-박형규 목사가 KNCC에 있었던 겁니까?

“아니 그 때도 박형규 목사는 원로목사였어요. 기독학생연맹의 고문 격이었어요. 젊은 학생들에게 영향력이 컸죠. 그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유신반대 활동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민청학련 사건까지 이어진 거군요.

“그 때 단일학생조직으로선 가장 많이 잡혀간 게 한국기독학생총연맹이었어요. 영어로는 KSCF, 지금 내가 거기 이사장이예요. 그런데 처음 우리가 잡혀갔을 땐 민청학련이라는 이름은 듣지도 못했어. 학생들을 잡아다 놓고 보니 우리조직 학생이 50명 정도로 제일 많거든. 그래서 처음에는 (박정희 정권이) 한국기독학생총연맹사건이라고 이름 붙이려고 했어. 그런데 이게 세계본부도 있고 종교단체여서 세계 여론이 문제가 되니까 그 계획을 접은 거지. 그래서 다른 이름을 붙이려다 보니 어디에 민청학련이라는 소그룹이 있었던가봐. 그게 민청학련 사건이 된 거지. 그렇게 하여 민청학련 수괴를 이철, 유인태 이렇게 만든 거지. 그들은 사형선고를 받았지.”


-그것도 일종의 조작사건이군요.

“그 때 잡혀간 사람이 5000여 명이었고, 재판 받은 사람만 330명.”


-당시 감옥에 있으면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 받은 분도 만난 적이 있나요?

“다른 분은 못 봤고, 사형수 여덟 명 중에 경북대 여정남이란 분을 만났는데, 그분은 인혁당이 아니고 민청학련 사건이었어요. 아이러니한 게 박정희가 그 때 자기 고향 사람들을 많이 죽였어요.”


-정치에는 어떻게 입문하게 된 건가요?

“86년도에 감옥 갔다가 87년도 6월항쟁 직후 이한열 장례식 직전에 나왔어요. 그러고 민통련 활동을 계속했는데, 그해 연말 김대중 후보가 대선에서 떨어지고 단일화 못한 책임을 몽땅 뒤집어 써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 다음 4월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는데, 그 때 문익환 목사가 민통련 의장이었고, 내가 사무차장이었어요. 민통련에서 계속 회의를 했는데 ‘그래도 김대중 총재를 살려야 민주화운동을 이어갈 수 있다’고 결정했어요. 그래 가지고 문익환 목사님 동생 문동환 목사, 지금 안철수재단 이사장을 맡은 박영숙 여사, 국회의장을 했던 임채정, 이해찬, 장영달 등 재야인사 100여 명이 조직적으로 입당을 합니다. 이 때 거기에 반발해서 뛰쳐나간 사람이 이재오, 박계동 이런 사람입니다. 그들은 견해를 달리한 거죠.”


-그래서 국회의원 선거에 나온 거네요.

“아뇨. 저는 사면복권이 안 되어서 원래 입당계획에 없었어요. 그런데 김대중 총재가 동교동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어요. 가서 만났더니, 그 때 전주 국회의원이 이철승이었는데, 김대중 총재가 ‘이철승 의원이 사꾸라 대명사로 되어 있는데, 이걸 극복하려면 장 동지가 나가주셔야 합니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사면복권이 안 되어서 못나갑니다’ 했더니 ‘야당 총재들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3월 1일 모든 정치범 사면복권 약속을 받았습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입당을 했죠. 그런데 문익환 장기표 이창복은 사면복권이 됐는데, 저만 쏙 빠졌어요. 그래서 출마를 못했죠.”


-그런데 국회의원도 아니면서 그 때 평민당 기획조정실장이라는 중책을 맡으셨네요.

“그 땐 김대중 총재가 임명하던 때니까. 정당 사상 기획조정실장이란 직책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라서 초대 실장을 맡았죠.”


“나는 한광옥과 다르다”


-그 후 92년에 전주에서 초선 국회의원이 되시고, 내리 4선을 하셨는데, 왜 장관은 한 번도 못했나요?

“2006년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국방부 장관 내정을 받았어요. 첫 민간 출신 국방장관이 필요하다는 차원이었는데, 그해 10월 4일 북한이 핵실험을 하는 바람에 무산된 일이 있었죠.”


-전주에서 국회의원에 떨어지고, 결국 밀려서 올해 총선 때 경남 함안으로 온 것 아니냐는 의심도 있는데.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2010년 정세균이 당 대표였는데, 수도권으로 갈 선언을 했고, 당에서는 부천시 소사구가 사고당부여서 거기서 출마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어요. 그런 때 같은 시기에 함안에 있는 무지개연대와 노사모, 그리고 김두관 경남도지사로부터 요청이 있었어요. 장 선배는 함안에 어머니도 계시고 고향이나 마찬가지니까 영남권 강화를 위해서, 정권 교체를 위해서 이쪽에서 출마해주십시오 하는 요청이었어요. 고민을 했죠. 대의를 위해서 후배가 부탁을 하는데, 그걸 거절하고 편한 길로만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후자를 택한 거죠. 또한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극복하려고 했던 지역주의를 한 번 깨보자는 의지도 크게 작용을 했죠.”


-경남도당 위원장을 맡은 후, ‘현장정치’를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계신데, 특별히 이런 행보를 하는 까닭은?

“제가 전주에서 국회의원할 때도 계속 그렇게 했어요. 김대중 대통령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금귀월래’를 반드시 지켜라는 거죠. 금요일에는 지역구에 갔다가, 월요일에 서울로 오라는 말이죠. 금요일 귀향해서 월요일 국회로 돌아온다는 뜻인데, 정치인이 지역을 살피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죠. 경남은 민주통합당으로선 특히 어려운 지역이잖아요. 그러면 더 열심히 현장을 살펴야죠.”


-박정희 유신시대의 피해당사자로서 최근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인혁당 사과를 보는 심정은?

“정상적인 국가라면 철저한 철권통치를 했던 선친의 후광까지 받아 대통령이 되겠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죄 없는 사람이 그렇게 희생된 사건이 인혁당 사건뿐 아닙니다. 그런 희생자가 수두룩해요. 저는 그걸 사죄로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런 걸 모르지 않을 텐데, 한광옥 전 민주당 상임고문은 왜 박근혜 캠프로 갔을까요?

“그 분은 개인적으로도 제가 친하고, 학교도 저에게 선배고, 퍽 점잖은 정치인 중에 한 분이예요.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 참모로 거의 정치일생을 보냈는데, 그렇게 평생을 보스 밑에서 참모로만 있다 보니 자연적인 연령이 70세가 넘었지만, 아직 남아있는 한이 있는 겁니다. ‘참모 인생만 하다가 그만둘 내가 아닌데’ 하는 한이 있어요. 미련이죠. 그런데 그게 시대가 지나면서 유권자와 부딪혀보니까, 지난 4․11 총선 때도 (정통민주당을 창당해) 출마했고, 그 전에도 전주에서 출마시도를 하다가 떨어지고 했는데, 국민들은 이미 새로운 세대로 넘어가버린 겁니다. 그런데 민주당에서 자기네들의 미련을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대단한 울화가 있어요. 그 울화가 엉뚱한 정치행위로 나타난 것이죠. 그래서 이건 새누리당에도 도움이 안 돼요. 민주통합당에서 이미 용도가 사라져버린, 소멸돼버린 사람이거든요. 그런 인물이 새누리당에 가서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호남을 커버해보겠다는 건데, 호남에서 이미 평가가 끝난 인물이죠.”


-위원장 님도 경남에 와서 뭔가 해보려 하다가 결국 안 되면 혹시 한광옥 씨처럼 되는 것 아닙니까?

“저는 아까 말씀드린대로 정치적으로 화려한 길로 가려 했다면 여기 안 왔죠. 당선 안정권에 있는 지역구를 마다하고 이곳에 온 것은 다른 뜻이 있는 거죠. 저는 이미 정치적으로 해볼 만큼 해봤다고 생각해요. 국회 국방위원장도 했고, 문재인 후보가 청와대 비서실장을 할 때 제가 원내대표를 하면서 거의 매일 만나 국정을 논의하기도 했고, 장관 취임은 못했지만 국방부 장관 내락을 받기도 해본 사람으로서 자리에 대한 미련은 없어요. 그래서 내가 여기 온 것은 장영달이가 호남이 아닌 경남에서도 정치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첫째 지역주의를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고, 둘째는 그걸 통해 정권교체에 일정 역할을 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나로서는 국회의원을 한두 번 더 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거죠. 그래서 제가 도당 위원장과 지역위원장을 맡아 뛰는 것에 대해서 몹시 행복하게 생각해요.”


-한광옥 씨와는 다르다는 거군요.

“한광옥 씨의 경우는 화병의 돌출적인 현상인데, 저는 화병 날 일이 없기 때문에….”(웃음)


-본인의 마음을 다스리는 특별한 비법이 있습니까?

“역사에 복종한다는 자세. 그게 제일 크죠. 그렇게 생각하면 저는 지금 여기 있는 게 대단히 행복해요. 그래서 여기서 뭐 내가 실망하고 돌아간다거나 할 일이 없죠.”


그가 가장 하기 싫었던 일 한 가지



-지금까지 64년을 살아오시면서 후회되는 일은 없나요?

“제일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랜 감옥살이를 했지만, 독재권력의 압력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잘 극복하면서 그 어마어마한 독재에 항거할 수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자부심이예요. 그런데 이라크 파병 문제를 제가 국방위원장 때 방망이를 때렸어요. 그게 제가 참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어요. 노무현 대통령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던데…. 그러나 한미관계에 있어서, 이건 처음 말씀드리는 큰 문제인데, 그 때 내가 국회에서 이라크 파병을 가결하지 않으면 노무현 정권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위기의식을 가졌어요.”


-그럴 정도로 미국의 영향력이 크나요?

“그보다 더 커요. 제가 미국 국방성을 가본 일이 있었는데, 우리 국민들에게 표현하기에 자존심 상할 정도로….”


-정권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 정도의 힘이 미국에게 있단 말입니까?

“있죠. 20여 년 전에 파나마라는 나라에서 노리에가라는 대통령이 당선됐는데, 미국에서 관리하던 파나마 운하를 국유화하면 재정의 상당부분을 충당할 수 있었어요. 그걸 노리에가가 국유화를 선언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현직 대통령이 미국 형무소로 잡혀갔습니다. 지금까지 못 돌아오고 있어요.”


-옛날엔 64세면 노인 취급을 받았지만, 지금은 60세를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라 하잖아요. 남은 인생 3막에서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나요?

“12월 19일 정권교체는 민족의 국운을 좌우하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아요. 제 인생에서도 그래요. 만일 이번에도 정권교체가 안 되면 평화체제 구축이 불가능해요. 이명박 대통령의 예에서 보듯 강대국의 비위에 맞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하기 때문에 긴장관계로 갈 수밖에 없어요. 10년의 노력을 이명박 대통령이 5년 만에 되돌려놨잖아요. 북한의 모든 자원은 중국으로 가버리고…. 그래서 12월 19일 정권교체에 제 모든 걸 걸고 싶어요.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지금 밀양 가서 하듯이 진짜 힘없는 서민대중을 대변하면서 살다가 죽는다면 더 아쉬울 게 없을 것 같아요.”


-국회의원이나 다른 자리를 한 번 더 하고 싶다거나 그런 건 없나요?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복종해야겠지만, 국회의원을 한 번 더 해서 뭘 해보겠다는 욕심은 없어요. 사실은 국회의원이 그렇게 행복한 건 아니었다 이런 생각도 많이 하기 때문에….”


-경남도지사 보궐선거도?

“도당위원장으로서 대선과 보선을 잘 관리하는 게 제 역할이라고 봐요.”


-특별하게 재미있는 일은 없나요? 취미라든지.

“내가 축구선수니까 운동할 때 재밌고….”


-혼자 계실 때 주로 뭐하십니까?

 

“옛날에 못 읽었던 책을 주로 읽어요. 요즘은 권운상이라는 후배가 쓴 <녹슬은 해방구>를 읽고 있어요. 그 놈이 암에 걸려서 죽었거든. 참 아까운 놈인데.”



인터뷰는 여기까지다. 두 시간 3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든 생각은 ‘경남에 이런 정치인 한 명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있든 말든, 힘없는 서민과 현장에서 고통을 함께 나누는 정치인 말이다. 대화 도중에도 나왔듯이 어설픈 보상심리에 사로잡혀 화병에 걸린다든지, 선거병에 걸려 권력만 탐하다가 정치 낭인으로 전락하는 전철만은 밟지 않으면 좋겠다. 그의 진정성을 좀 더 지켜봐야 할 이유다.


※2012년 10월에 했던 인터뷰를 뒤늦게 기록으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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