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사람이야기

그녀는 왜 왕따 시의원이 되었나

기록하는 사람 2013. 5. 6.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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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무소속으로 홀로서기 나선 강민아 진주시의원


무릇 시민운동·사회운동·민중운동·통일운동 등에서 말하는 ‘운동’이란 ‘우리의 뜻에 동의하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나는 진보정치·진보정당운동이 성공하려면 풀뿌리 지방의회서부터 실력을 인정받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총선에서 국회의원 몇 석을 더 얻는 것보다 생활정치 현장에서 직접 대중의 신뢰를 구축해나가는 게 진보의 대의에 더 부합하는 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나라 진보정당들은 2012년 국회의원 총선을 앞두고 소위 ‘중앙정치권력’ 획득에 과한 욕심을 부린 탓인지 정치공학적 계산에 따른 이합집산을 거듭하다 이제는 회복하기 어려운 내상을 입고 말았다. 국민의 신뢰도 뚝 떨어졌다. 이로써 2002년부터 10여 년간 풀뿌리 현장에서 어렵사리 다져온 민주노동당 지방의원들의 성과도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런 지방의원 중에 강민아(姜敏娥·1971년생) 진주시의원(기획경제위원장)이 있다. 그는 1997년 국민승리21 시절부터 함께 해온 진보정당에서 탈당했다. 현재 그는 무소속이다. 그러나 진보정치의 꿈마저 버린 건 아니다. 그가 ‘정당 없는 진보정치인’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오롯이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내공과 의지에 달려 있다. 이 시점에 그의 41년 삶을 기록해둬야 할 이유다.



진주시의회 기획경제위원장실에서 만난 그는 밝고 명랑했다. 내심 비장한 모습을 상상했던 내 선입견은 빗나갔다. 그런 상상은 동료 시의원들로부터 왕따를 두려워하지 않는 싸움닭 이미지 때문이었던 것 같다.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비례대표로 진주시의회에 등원하자마자 자신의 ‘한미FTA’ 관련 5분 발언을 제지한 의장에 맞서 갈등을 빚었고, 학교급식 지원 조례가 보류되자 찬반 동료의원의 실명을 밝힌 신문 기고로 마찰을 빚기도 했다.


또 2009년 당시 한나라당 나경원 국회의원이 진주시청 강연에서 “1등 신붓감은 예쁜 여자 선생님, 2등 신붓감은 못생긴 여자 선생님, 3등 신붓감은 이혼한 여자 선생님, 4등 신붓감은 애 딸린 여자 선생님”이라고 한 여성비하 발언을 폭로하고 비판해 이 강연을 주최한 경남여성지도자협의회와 불편한 관계가 되기도 했다.


싸움닭은 아니지만 ‘왕따’도 두렵지 않다


나는 당시 강 의원에 대한 이런 보도를 인상 깊게 봤고, 그 때부터 그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 같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이긴 하지만, 서로 얼굴 맞대고 일하는 공간에서, 때로는 도움도 받아야 할 상대에게 왕따를 감수할 수 있는 용기야말로 진보정치인이 가져야 할 첫 번째 덕목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왕따는 털어도 먼지 날 게 없는 도덕적 자신감과 일에서 드러나는 실력으로 쉽게 극복된다. 그게 없다면 대개 ‘좋은 게 좋다는’ 식의 타협으로 흐를 수 있다.


시의원이 되기 전 ‘자연인 강민아’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인터넷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생년월일과 사는 곳, 출신학교, 그리고 ‘새노리’라는 노동자 문화패의 대표를 했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뒷조사까진 아니지만, 그를 알만한 몇몇 사람을 통해 탐문해본 결과 경상대학교 심리학과 재학 시절 풍물패 활동과 함께 아주 열심히 학생운동을 했고, 졸업 후 마산자유무역지역 등 제조업 노동현장에 위장 취업했으며, 지금도 활발히 활동 중인 새노리 대표를 맡아 경남의 대표적인 노동자 문화패로 키워냈다고 했다. 또 학생운동 시절 알게 된 남편과 결혼해 딸을 두었으나 헤어져 지금은 딸과 둘이 ‘싱글맘’으로 살고 있으며, 성장 과정에서도 가족의 불운으로 힘든 시절을 겪었지만 ‘어떻게 저리 밝고 반듯하게 살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라는 말도 들었다.


밝은 건 사실이었지만 눈물도 많은 듯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남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땐 금세 눈가가 붉어지는 걸 숨기지 못했다.



아버지가 의사였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도민일보 신문에 나오는 거예요? 아니면….”


-피플파워 인터븁니다.

“워메~. 그만한 내용이 안 나올 건데요? 피플파워는 엄청 긴 내용이잖아요.”


-강민아 의원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요.

“다 알고 나면 실망할 텐데. 큰일이다 정말. (웃음) 예상 질문은 안 보여주나요?”


-이거 함 보세요.

(찬찬히 질문지를 읽더니) “우와. 이렇게 많이 연구를 하셨어요?”


-찾아봤지만 의외로 정보가 없더라고요.

“음, 이거…. 임대아파트…. 지금은 집 샀는데, 하우스푸어….”


그는 2006년 10월 자신의 블로그에 스페인의 협동조합 몬드라곤을 소개하면서 이런 글을 올린 바 있다.


“저는 2200만원 전세에 살고 있습니다. 그 중 1540만원은 저소득층 전세자금 대출을 받은 돈입니다. 얼마 전 가좌그린빌 임대아파트에 예비입주자 신청을 해 27번으로 순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제 환경이 시의원이라는 자질에서 오히려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임대아파트 분양전환가격에 제 자신이 절박한 이해를 가지고 있고 고단한 삶속에서 꼬박꼬박 세금 내는 서민들의 심정과 다름없이 그 세금이 100원짜리 하나 제대로 쓰이지 않을 때 진심으로 화가 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순서는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5년 전에 대출을 받아 18평 아파트를 샀다.


-얼마에 구입했나요?

“7700만 원.”


-어. 싸네요? 1억도 안 되는 아파트가 있나?

“하대동에는 서민아파트가 많고, 그런 아파트가 좀 있어요. 10년도 넘은 아파트예요.”


-얼마나 대출 받았는데요?

“거의 한도까지 받았죠. 70%니까.”


-5000만 원 정도?

“네. 한 달에 이자하고 원금 합쳐 가지고 거의 100만 원씩 들어가요.”


-진주 강씨죠? 선대가 쭈욱 진주에서 살아오셨나 봐요?

“아뇨. 저희 아버지 고향이 전남 광양이거든요. 제가 여섯 살 때 진주로 왔어요. 아버지가 군의관이셨는데 발령이 진주 도립병원, 지금 진주의료원 내과로 났거든요. 그 때 와서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 다 진주에서 나왔죠.”


-배영초교를 나왔던데, 집은 어디에 있었나요?

“중안동. 경찰서 근처였어요.”


-군의관이면 의사였네요. 그러면 부자였군요.

“보통 의사라 하면 다들 부자로 생각하시는데, 저희 할머니가 10남매를 두셨거든요. 아버지가 둘째, 차남이셨는데, 원래는 큰아버지를 전남대 의대로 보내셨대요. 왜 그런 게 있짆아요. 아들 하나 잘 키워보자 그런. 그런데 큰아버지께서 견디지 못하고 중퇴를 하셨대요. 이건 부모님께 들은 이야긴데, 그래서 둘째인 아버지에게 기회가 와서 역시 전남대 의대를 갔는데, 동생들을 다 책임지셔야 했던 거죠. 그래서 우리 집엔 항상 고모와 삼촌들이 있었는데, 그 분들을 아버지가 다 대학공부 시키고, 고모들도 다들 학교 교사로 퇴임하시고…. 그래서 항상 옷이 없어서 군복 물들인 것만 늘 입으시던 기억이 나요.”


여고생 시절 혈서를 쓰고 점거투쟁에 나서다


-병원 개업은 안 하셨나요?

“반도병원에서 내과 과장으로 제일 오래 계셨어요. 개업은…음…, 아버지가 제 스무 살 때 좀 일찍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세 분이서 함께 삼천포에서 삼성병원이라고 몇 년 하시다가 돌아가셨죠.”


-아버지가 몇 년생이시죠?

“어머니가 41년생인데, 네 살 많으시니 37년생이시네요.”


-그러면 젊은 나이에 일찍 돌아가신 거네요. 50대에…. 병으로 돌아가신 건가요?

“고혈압이 있으셨는데, 교통사고를 내고 후유증으로 돌아가셨어요. 사고로 본인도 많이 다치셨지만 괜찮을 줄 알았는데, 합병증이 와가지고 좀 누워계시다가 돌아가셨죠.”


-강민아 의원이 막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 때였는데, 충격이 컸겠네요.

“그 때부터 정말 파란만장한… (웃음) 사실 아버지가 계실 때는 부자는 아니었지만 큰 어려움 없이 살았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힘들었죠. 어머니는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셨고, 아버지가 의사였지만 형제들 추스리느라 정말 재산을 남겨놓은 게 없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그 때부턴 집에서 지원을 받을 수 없었죠. 저흰 3남매, 그러니까 언니와 나, 남동생 이렇게 세 명이었는데, 집안이 힘들게 되니까 아르바이트도 하고, 휴학도 하고 그렇게….”



-아버지가 사고로 그렇게 돌아가셨으니 정신적인 충격이나 그로 인한 방황, 뭐 그런 건 없었나요?

“그게 좀 덜할 수 있었던 게, 제가 대학 들어가자마자 학생운동을 하게 되면서 저뿐만 아니라 주변에 힘든 사람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저 혼자만 어려우면 그랬겠지만, 옆에 힘이 되어주는 동지들도 있고, 선배 후배 친구들, 그런 정신적인 울타리가 있어서 극복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 들어가자마자 학생운동을 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 전교조 교사들 해직이 계기가 됐다고 하던데?

“그렇죠. 제가 진주 제일여고를 다녔는데, 89년에 전교조가 생기고, 저는 전교조가 뭔지도 몰랐지만, 하필 평소 학생들에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시던 선생님들 여섯 분만 딱 골라서 해직을 시킨다는 거예요. 당시 고3이었지만 학교가 술렁술렁했죠. 어떻게 된 거냐? 선생님들이 저렇게 잘린다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냐. 이렇게 좀 튀는 아이들이 있었잖아요. 저도 그 튀는 아이들 중에 한 명이었던 거죠.(웃음)”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요?

“그 때 시험기간이었는데, 시험을 거부했죠. 그리고 밥도 안 먹을 거다 이러면서 도시락을 교장실 앞에 탑처럼 쌓았어요.”


-전교생이 모두?

“저희 생각이야 전교생을 다 하고 싶었지만, 3학년 전부 다하고, 2학년도 상당수가 참여했죠.”


-그리고 또 뭘 했나요?

“이런 게 인터뷰에 다 나가도 될란가 모르겠네. 하여튼 그 때 우리가 어디서 본 건 있어 갖고, 누군가 점거를 하자고 제안한 거예요. 누구였는지는 기억 안 나는데, 5층에 있는 음악실을 점거하기로 한 거죠. 점거하려면 낮에는 안 될 것 같고, 새벽에 하자, 이래 갖고 친구 자취방에서 혈서도 쓰고 해서 점거를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동이 트자마자 막 선생님들이 몰려와서 끌려 나갔어요. 하루도 점거 못하고….”


-혈서는 어떻게 쓴 거죠?

“면도칼로 손가락을 그어갖고 천에다가 ‘선생님을 돌려주세요’ ‘자르지 마세요’ 뭐 이런 걸 썼던 거죠. 그걸 우리가 점거한 음악실 창문에 붙이려고 했죠. 그런 걸 텔레비전 뉴스나 이런 데서 봤겠죠. 어쨌든 그 당시 해직당한 여섯 분의 선생님들도 우리 행동에 충격을 받았나 봐요. 열아홉 살밖에 안 된 여학생들이 그런 행동을 하리라고는 예상을 못했으니까.”


-점거에 가담한 학생이 몇 명이었나요? 학생회와는 관계가 없이 한 건가요?

“열 명 정도 됐었나? 학생회도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순 없죠. 그 때가 학생회장을 직선으로 뽑은 첫 해였고, 그렇게 뽑힌 총학생회장도 함께 했으니까.”


학교에서 정학 당했을 때 아버지의 한 마디


-그렇게 끌려나온 후 어떻게 됐죠?

“상담실, 일명 고문실이라는 데 끌려가서 잡혀 있었죠. 그리고 부모님들에게 다 연락이 가고, 그 때 부모님에게 많이 맞았어요. 그런데 저는 안 맞았어요. 어머니가 안 때리더라고요.”(웃음)


-그 때는 아버지도 계실 땐데, 아버진 뭐라시던가요?

“어머니는 때리진 않으셨지만, 아이고 이제 딸 인생 다 버려놨다. 저걸 어떻게 인간을 만들겠노 하면서 그러시는데, 아버지는 한참동안 아무 말씀도 안 하고 계시더니, 한 참 뒤에 ‘그래도 멋지다. 우리 딸’ 이렇게 한 마디 하시더라고요.”(둘 다 웃음)


-그 일로 학교에서 징계는 안 당했나요?

“정학 당했죠. 기간은 생각 안 나는데, 유기정학 먹었죠. 점거했던 학생들 모두.”


-그 때 해직 당했던 여섯 분의 교사는 누구죠?

“지금 양산에서 복직해 교사로 계시는 류경렬 선생님하고…. 음, 다른 선생님들은 아마 잘 모르실 거예요. 류경렬 선생님과는 지금도 가끔 연락하거든요.”


-초중학교 때는 특별한 기억이 없나요?

“네. 특별한 건 없었고 어릴 때부터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어요. 그래서 앞에 나서는 것도 좋았고, 합창대회에도 많이 나가고….”


-공부는 잘했나요?

“그닥 잘하진 못했어요. 두 살 터울 언니는 공부를 아주 잘해서 아버지 뒤를 이어 의과대학 가려고 삼수를 했는데, 언니도 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꿈을 접었죠. 대신 서울교대를 나와 서울에서 교사를 하고 있어요. 저는 그냥 공부도 엔간히 하고….”


-초중학생 때까진 이후 그런 점거투쟁에 가담하게 될 만한 특별한 전조가 없었던 거네요?

“그 전까진 특별히 그런 게 없었어요. 고3 때 그 일도, 저보다 먼저 지역에서 나눔터라든지 지역의 공부하는 소모임 활동도 하고 하던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 애들이 나를 끌어들였던 거죠. 지금도 그 애들 만나면 그런 얘길 해요. 내가 너희들에게 포섭된 거야.”(웃음)


-쉽게 포섭을 당한 거네요?

“그 애들 보기에 제가 좀 의리가 있어 보였나 봐요. 그런데 제 딴에는 당시 그래도 고3이고, 나름 큰 결심을 한 것 같아요. 뭔지는 모르지만 오늘 이걸 하면 내 앞날에서 뭔가 한쪽을 포기해야 한다는 나름의 비장함 그런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때 함께 점거했던 아이들과는 지금도 만나고 하나요?

“대부분 다 연락이 되죠. 당시 총학생회장했던 친구는 큰들(문화예술센터)에 있죠. 김영란이라고…. 큰들에서 십 수 년동안 활동하고 있죠. 풍물강습단장도 하고…. 또 한 친구는 저를 포섭했다고 할 수 있는 후배, 나눔터 활동도 했는데 대학을 안 가고 바로 상평공단에 있는 동서산업이라고 노동현장으로 갔죠. 지금은 진주에서 새노리라고 노동자문화단체 대표로 있죠. 김귀영이라고. 그 친구가 지금 제일 가까운 곳에 있죠.”



-재밌네요. 고등학교 때 그렇게 맺은 인연이 지금까지 같은 공간에서 이어지고 있으니.

“아주 지겨워 죽겠어요. 하루도 안 보는 날이 없어요.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이러고 있으니….”(웃음)


-마산·창원지역에서는 당시 ‘마창고협’이라는 고등학생 연합조직도 만들어지고 했었는데, 진주는 그런 게 없었나요?

“진주에선 제일여고보다 훨씬 앞서서 대아고등학교 투쟁이 있었고, 거기 학생들이 저희와 교류는 있었지만 그런 조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대학은 왜 심리학과로 가셨나요?

“성적 맞춰서 간 거죠.(웃음) 고3 때 데모하던 때가 거의 여름이었는데, 정학 당하고 학교로 돌아오니 해직당한 선생님들은 없고, 그렇게 정리되고 나니까 거의 수능 얼마 안 남은 시기더라고요. 그 때부터 공부해서 커트라인에 따라 선택할 수밖에 없었죠. 뭐.”


-심리학과 졸업하면 주로 어떤 일을 하나요?

“임상심리하는 분들은 주로 병원에 있고, 청소년 상담 일을 하는 분도 있죠. 학교에도 일하고, 드물게는 강의하시고…. 그런데 저는 심리학과를 나왔지만 그걸 물으면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웃음)


대학 문화패 활동으로 끼를 드러내다


-그렇게 하여 대학 들어가선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합류한 건가요?

“그렇죠. 제가 자발적으로 ‘열두마당’이라는 풍물패에 찾아갔죠. 사회과학대 풍물패였어요. 그렇게 문화선전대 활동하고, 총학생회 활동도 하면서 학교 축제 기획도….”


-총학생회 활동도 했네요?

“2년동안 했죠. 문화국장으로….”


-그 때 총학생회장이?

“이일균 총학생회장 선거 때 캠프에서 일했고요. 뚝심 총학! 얼마나 멋져요? 그 전에는 ‘혁신’ 뭐 이런 구태의연한 거였는데, 일반 학우들이 좋아할만한 ‘뚝심’, 그게 이일균 이미지와 너무 닮았어. 총학 문화국장은 강순중·박동주가 총학생회장할 때였어요. 그렇게 2년을…. 아! 맞다. 중고등학교 때 내가 그런 걸 좋아했어요. 극(劇) 이런 것 만들고, 그러니까 평소엔 가만히 있다가 소풍 간다고 하면 각종 기획을 도맡아 하는 아이.(웃음) 그래서 선생님들 여장시켜서 퍼레이드하게 만들고, 춘향전 각색하여 공연하고 그런 걸 좋아했는데, 대학 가서도 축제할 때 마당극이나 각종 집체극 기획하고 그랬죠. 그 땐 집체극이 또 유행이었어요. 대본 써가지고 공연하고, 노래도 만들고….”


-노래패도 했나요?

“노래패도 잠시 했어요. 그렇다고 제가 노래를 썩 잘하거나 그런 건 아니예요. 사실 풍물도 그닥 잘 치는 건 아니지만 흥이 많은 것 같아요. 사람들 모아서 재미나게 기획하고, 땟거리를 만들고…. 90년대가 그런 게 풍성했던 것 같아요. 모든 단과대에 풍물패 만들고, 나중엔 각 과별 풍물패까지 만들었으니까.”


-과별로도 만들었다고요?

“그랬죠. 심리학과 풍물패는 제가 만들었는데,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거든요. 거기 출신으로 원지연이라고 저희 과 후배가 있는데, 지금 민예총 진주지부장을 하고 있어요. 얼마 전 골목길 페스티벌 실무책임도 맡고 있죠.”


-90년대 초라면 강경대 치사사건으로 진주시내에서도 시위가 아주 많이 열렸을 땐데, 잡혀간 적은 없나요?

“잡혀 갔었죠. 당시 ‘가투(가두투쟁)’를 하면 선봉대와 문선대(문화선전대)가 제일 앞에 서니까. 또 최루탄이 터져 흩어졌을 때 북을 치면서 다시 모이도록 하는 게 문선대니까.”


어느 야유회.


-잡혀가서 감옥살이를 하거나 정식 재판을 받은 적은?

“그런 건 없어요. 훈방이나 구류 정도로 나왔죠. 그래서 2006년 선거에 나왔을 때 전과기록이 없으니까 선배들이 ‘열심히 안 살았네’ 하면서 놀리더라고요.”(웃음)


졸업 후 노동현장 투신…첫 월급 43만 원


-그러면 90년에 입학해서 95년에 졸업하신 건가요?

“졸업을 못했어요. 4학점이 모자라서.(웃음) 졸업도 안 한 채 학교를 그만두고 마산에 간 거죠.”


-아, 졸업도 못하고 노동현장으로?

“그랬죠. 10년도 더 지나 2006년에야 계절학기 등록해서 뒤늦게 졸업할 수 있었죠.”


-왜 노동현장으로 갈 생각을 했죠?

“대학 친구들과 그렇게 약속을 했어요. 애국적 사회진출 방법으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을 지지·지원하는 방법도 있지만, 내가 직접 노동자가 되어 세상을 바꾸자 뭐 그런….”


-어떤 친구들과?

“처음에 사회과학대 열두마당 함께 했던 친구들, 그리고 각 과에 들어가서 풍물패를 만들었던 친구들, 그런 문화패 단위에서 사회진출을 앞두고 모임을 만들었거든요. 거기서 그렇게 약속했죠.”


-어머니의 반대는 없었나요?

“반대가 심했죠. 특히나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시고, 집이 많이 힘든 상황이어서…. 그리고 제 남동생 반대도 많았어요. 저보다 세 살 아래 동생이지만 오빠 역할을 하려는 그런 게 있잖아요. 그 때문에 사이가 많이 안 좋아졌죠. 그런데 그 동생이 죽었어요. 97년도에….(눈물 글썽) 아버지도 돌아가셨는데 작은 누나가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그래서 많이 싸웠어요. 그런 상황에서 남동생과 제대로 된 화해를 못한 상태에서…. 화해라기보다 그 때 제가 성숙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제 이야기를 다 하지 못하고, 이해시키지 못하고…. 그런 상태에서 동생이 그렇게….”


-어쩌다가?

“물놀이 사고로…. 아버지 돌아가신 후 엄마랑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사를 갔거든요. 저는 여기서 학교 다니고.”


-아, 그래서 아버지 돌아가신 후 가족 생계는 어떻게?

“엄마는 파출부도 하시고 식당 일도 하시고 정말 고생 많이 하셨죠. 언니도 서울교대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으면서 과외를 어마어마하게 했어요. 코피 쏟아가면서…. 언니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그렇게 해서 서울에서 반지하 달셋방 생활도 하셨고….”


-강민아 의원도 학교 때부터 그런 일을?

“저도 아르바이트 많이 했죠. 친구 셋이서 한 방에서 자취하면서 가내수공업부터 신문배달, 식당 주방 일, 음식 배달…. 문화패 선배들이 등록금도 많이 보태줬어요. 지금 강성훈 도의원, 그 남편 이동규, 그런 선배들이 한 학기 등록금을 만들어준 적이 있어요. 신세 많이 졌죠. 그거 아직 안 갚았어요.(웃음) 2006년 선거 당선되고 나서 경상대 문화패동문회 모임에 가서 밥 한 그릇 샀죠. 그게 끝이야.”


-마산 가서 처음 들어간 회사는 어디였죠?

“마산수출자유지역 삼양공업주식회사라고 있었어요. 규모가 작은 공장이었어요. 한국산연 이런 큰 회사는 당시만 해도 스무 살, 스물 한 살이어야 들어갈 수 있는데, 저는 나이도 있고…. 처음 들어가니까 월급이 43만 원이더라고요. 95년 3월부터 일했을 거예요.”


-잔업을 해도 43만 원?

“아니죠. 잔업하면 거기에 더 보태지죠. 그런데 그 회사가 잔업 철야 특근 이런 걸 할 정도로 일이 많지 않았어요.”


-거기 얼마나 있었죠?

“1년 반 있었어요. 현장에 있던 기간은 총 6년인데, 여러 회사를 옮겨 다녔어요.”


대학 시절. 앞줄 가운데가 강민아.


-애국적 사회진출을 위해 노동현장에 갔다면, 거기서 단순히 일만 하려고 간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막상 거기서 뭔가 해보려니 정말 막막하더라고요. 갑자기 투쟁하자고 선동할 수도 없고. 일 못한다고 욕도 많이 들어먹고…. 우선 노동자의 삶을 알고 싶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어요. 여공들이 남자 때문에 머리 쥐어뜯고 싸우는 일도 있고….(웃음) 함께 자취하던 우리끼리는 매일 저녁 회의를 했죠. 그러다가 우리 라인에 있는 사람들과 <태백산맥>을 모두 돌려보는 일부터 했어요.”


-이후에 다시 진주로 오게 된 건 어떤 계기로?

“애 아빠와 결혼을 하면서 진주로 왔죠. 진주 상평공단에 한국호꾸신이라는 비디오테이프 만드는 일본 외자기업에 들어갔어요.”


-호꾸신이라면 노동조합이 있는 회사 아니었나요?

“있었죠. 그래서 나중에 노조 회계감사도 맡았어요. 거기서 2~3년 있었는데, 나중에 자본철수하면서 회사가 없어져 버렸죠.”


-그 다음 회사는?

“지수에 있던 동호전기라고 컴퓨터 모니터 만드는 회사에 갔는데, 거기도 망했어. 내가 가는 데마다 망했네. 동호전기에서 모임을 했는데, 주로 책 함께 읽고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선암사도 가고 보성 녹차밭도 가고. 거기서 만난 친구들이 새노리에 지금 있어요. 새노리는 대부분 현장 출신이거든요.”


-그렇죠. 원래 ‘노동자문화패 새노리’ 이렇게 시작했잖아요.

“예. 지금은 노동자문화패이자 예비사회적 기업이기도 하죠.”


-다녔던 회사 중에 월급이나 노동환경이 제일 나았던 데는 어딘가요?

“참, 사천에 있는 태양유전에도 잠시 일용직으로 다녔는데, 거기가 제일 나았어요. 새 공장이고 반도체 안에 들어가는 칩이니까 깨끗하고 험한 일은 아니었죠. 제가 제일 힘들었던 게 호꾸신이었어요. 왜냐면 컨베이어 벨트였거든. 그게 적응이 잘 안 됐어요. 처음 일하는 분들은 구토도 하고 몸살 약 지어먹어가면서….”


-2000년대 초반까지 그런 노동자 생활을 했는데, 마지막에 받은 월급은 얼마나 됐나요?

“그 때도 60~70만 원이었어요.”


-아니 2000년대면 그래도 80~90만 원 정도는 안 됐나요?

“아니예요. 특히 상평공단은 적었어요. 여자는 더 그랬죠. 정말 한 달 동안 만땅 잔업 특근 다 채운 언니들이 90만 원, 100만 원 정도 됐거든요.”


-2001년까지 그렇게 한 거네요?

“그 때 새노리 활동과 좀 겹치는 시기가 있었죠.”


노동자문화패 새노리에 올인했던 시절


-어진(딸)이는 언제 태어난 거죠?

“97년 7월. 누가 봐줄 사람도 없어서 공장 다니면서 어린이집에 맡겼어요. 아침 7시 40분에 통근버스를 타려면 어진이를 20분쯤에 맡겨야 하는데, 그 시간에 아이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어요. 사정사정해서 원장 선생님에게 맡기고 했는데, 하루는 아침에 채운 기저귀가 저녁까지 그대로 여기저기 짓물러 있는 거예요. 그걸 보고 정말 많이 울었어요.”


-그러면 출산하고 얼마 만에 다시 회사에 나간 건가요? 한 1년?

“그렇게 오래 못 쉬었어요. 3~4개월 정도. 출산 직전까지도 일했는데요. 호꾸신 다닐 때였는데, 만삭 때 자본철수를 한 거야. 그래서 애 낳기 직전까지 데모를 했어요.”


-그럼 그 핏덩이를 어린이집에? 좀 독하네요.

“저는 애를 낳았을 때도 옆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산후조리도 해보지도 못했고, 종이기저귀는 생각도 못했고 모두 빨아서 썼어요. 그 때 나동에서 단칸방 생활을 했는데, 재래식 부엌이어서 너무 아이 키우기 안 좋은 환경인거예요. 그래서 나중 봉곡동 한일택시 있는 근처로 이사를 갔죠. 거기 살다가 하대동으로 온 거죠.”


-2003년 인터넷 검색으로 보니까 새노리 대표로 나오던데.

“2000년대 들어 새노리에 들어갔고, 가자마자 사무국장을 맡았어요. 상근도 제가 자처했죠. 원래 새노리는 80년대 말에 만들어진 단체였어요. 그 때까지 상근자가 없었는데, 내 월급 내가 만들어도 되냐? 그래라 해서 빈병도 팔고 해서…. 그리고 노동현장에 공연을 가도 돈을 못 받았는데, 돈을 받기 시작했죠. 맨 처음 우리 공연비가 5만 원이었어요. 그런데 문화패라면 뭔가 보여주는 게 있어야 하잖아요. 이리저리 찾아보니까 전국에 우리보다 잘하는 곳이 많이 있는 거예요. 그런 곳에 눈물로 호소를 해서 무상으로 전수를 받았어요. 야근 마치고 잠도 안자고 단원들을 족쳐서 연습을 했죠. 그렇게 해서 노동현장에서 공연을 하니까 모두 뿅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단원들도 신이 나고 재미가 나는 거죠. 그 때부터 새노리 회원이 자꾸 늘었어요. 그리고 노동자들이 뭐든지 잘 만들어. 악기 얹는 기구라든지 내가 말만 하면 척척 만들어내는 거야. 너무 신기해. 나중에는 물이 뿜어져 나오고 불이 나오고 하는 것까지 만들었어. 나중엔 전문문화패보다 더 잘해. 가락은 좀 못할지 몰라도. 그러다가 급기야 130만 원 공연비를 받기까지 한 거예요. 물론 돈이 좀 있는 노동조합이었죠. 거제 삼성조선이나 공무원노조 그런…. 소문이 나니까 여기 저기 원정 공연도 다니고. 그렇게 해서 상근하면서 내 월급을 60만 원씩 받아갔어요. 재미있는 일 하면서 60만 원이나 받아 가니까 좋잖아요.”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강민아.


-그 무렵 남편과 헤어지고, 그 60만 원 수입으로 아이까지 키우면서 살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그래서 또 선배들, 강민아를 걱정하는 모임 이런 사람들이 ‘너는 이제 돈을 벌어야 된다. 운동이고 나발이고 취직해라’ 그랬는데, 나는 새노리에 승부를 걸겠다고 했죠. 다행히 새노리가 잘 됐어요. 그 때 기초생활수급자가 되긴 했지만, 그게 오히려 큰 도움이 됐어요.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에서 ‘김대중 노무현이 대통령 되어도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다’고 하지만 왜 변한 게 없어? 기초생활수급제도만 해도 큰 변화죠. 영세민 전세자금 대출도 그렇고. 제가 그걸 받아 하대동에 전세를 얻었거든요. 앞에 이야기했던 2200만 원 전세, 그게 그거예요.”


-그래서 새노리 대표를 하던 중에 민주노동당 활동을 함께 한 건가요?

“당 활동은 제가 97년 진주 오자마자 국민승리21부터 했죠. 당시 진주에는 정말 소수였지만….”


-아, 그러면 민주노동당도 가장 초창기 멤버였겠네요?

“그렇죠. 제가 당원번호가 좀 빨라요. 103번이었나?”


-2006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시의원 후보로 나올 때까지 새노리 대표였나요?

“그렇죠. 당선되고 나서 대표를 그만 둔 거죠.”


97년부터 해온 진보정당을 탈당하다


-그러고 나서 2010년 지역구 후보로 나와서 7명의 후보가 나온 선거구에서 1등을 했잖아요.

“그러게. 깜짝 놀랐어요.”


-본인도 예상을 못했나요?

“완전 황당했죠. 진짜. 솔직히 막판에는 당선될 것 같기는 했어요. 처음에는 그것조차도 없었어요. 왜냐면 2002년에 당선되셨던 김임섭 의원이 당연히 될 것으로 알았는데, 낙선하는 걸 봤잖아요. 와~ 저런 사람도 떨어지는데 내가? 완전히 겁이 났어요.”


-그 배경이 뭘까요? 지역구 여성들과 함께 부대끼면서 특유의 친화력이 있다는 분석기사도 있던데.

“제가 솔직히 친화력은 좀 있죠.(웃음)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목적의식적인 모임을 하고 그런 것도 아니거든요. 제가 생각할 때는 이 진주가 좁잖아요. 새노리 활동하면서 현장의 노동자들을 정말 많이 알고 지냈거든요. 민주노총, 한국노총 할 것 없이. 그런 게 컸던 것 같고, 워낙 하대동 상대동이라는 지역이 서민들이 많이 살고,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동네예요. 또 하나는 제가 5대 의회 때 제가 많이 돋보였던 것 같아요. 그 때 진주시의회에서 민주노동당은 저 혼자뿐이었잖아요. 그게 시민들에게 불쌍하게 보였던 것 같아요.”


-임기가 1년 반쯤 남았는데, 다음 선거에도 나올 건가요?

“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음엔 시장 선거로 나와 보시지.

“에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웃음)


-시의원을 해보니 뭐가 재미있던가요?

“음. 우리가 사회운동도 하지만 궁극에는 정치에서 의사결정이 되는 거잖아요. 내가 중요하다는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정말 보람 있는 일이예요. 예를 들면 진주에 자전거보험이 있는데, 전국에서 세 번째로 도입했어요. 물론 제가 시장이 아니어서 제가 했다고 하는 건 어폐가 있지만, 5분 발언이나 이런 걸 통해서 주장을 했고 다행히 집행부에서 받아주셔서 그게 됐는데, 얼마 전에도 경남도민일보에 ‘자전거 보험, 진주시민 혜택 톡톡히 봤다’ 이런 기사가 나왔어요. 그런 걸 보는 뿌듯함이란 어디에 견줄 수 있겠어요?”


-지금은 통합진보당을 탈당해 무소속이지만, 소수 진보정당 소속 시의원으로서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없다고는 할 수 없죠.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격려를 많이 받은 편이예요. 물론 의회 내에서는 동료의원들에 의해 징계를 당할 뻔한 적도 있었고, 지금도 이른바 기관장 모임이라는 데 가면 물에 기름 같아요. 진주는 특히 집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게 강한데, 나는 아버지도 없지, 남편도 없지, 본적도 전라도지, 이건 뭐 아무런 끈이 없는 거예요. 게다가 진보 쪽이라는 것은…. 그리고 관변단체가 무수히 많은데, 그런 데서 제가 진심으로 이야기를 해도 곧이곧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가 많은 것 같아요.”


-탈당했던 통합진보당도 그렇잖아요. 얼굴 보면 다 아는 사람들이고. 탈당 후 안면이 받치고, 사람과의 관계가 불편한 것도 많을텐데. 예를 들어 당장 하○○ 씨와도 그렇잖아요.

“하○○는 안 그래요.(웃음) 지역사회에선 분명히 그런 게 있어요. 튀는 걸 안 좋아하는 거죠. 다른 것도 인정하지 않고. 진주는 특히 당과 대중조직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예전엔 행사 때마다 연락이 잘 오던 단체에서 연락이 안 오는 경우들이 있어요. 그래서 몰라서 안 가면 조합원들이나 회원들은 오해를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러면 찾아가서 바로 이야기를 해요. 연락 주십시오 하지만 그래도 잘 안 되더라고요. 그러면 또 얘기를 해요.”


-진보의 분열로 상황이 이렇게까지 왔지만 진보정치에 대한 신념이나 희망은 그대로 있을 거잖아요. 통합진보당, 진보신당, 진보정의당, 그리고 권영길 의원이 추진한다는 노동자 중심의 정당, 이런 것 중에서 몸을 담을 만한 곳이 없나요?

“없어요. 그게 정말 고민이예요. 여기 저기 모두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이 있지만, 언젠가는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이긴 하지만, 지금은 정말 딱 여기다 할 만한 데가 없어요. 그렇다고 제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종교는 카톨릭이죠? 언제부터?

“2009년부터요. 호꾸신 있을 때 봉곡성당에 계시던 박창균 신부님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게 계기가 되었죠. 지금은 마산 산호성당에 가 계시죠.”


-시의원으로서 일하는 것 말고 특별한 취미나 즐기는 게 있나요?

“특별히 없어요. 다만 요즘도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서 딸하고 둘이 노래방에 자주 가요. 노래방 적립카드도 있어요. 딸도 노래를 좋아하고.”(웃음)


-민중가요, 노동가요도 좋아하나요?

“집에서도 많이 흥얼거리는 편이예요. 지민주라는 가수 아세요? <파도 앞에서>라는 노래가 있어요. 우리 새노리에 와서 강습도 해주시고 했는데.”


-한 번 불러보세요.

“나의 망망한 바다를 보면

우리 노동자들의 모습이

수평선 너머 조용히

출렁임도 없이 그렇게 다가오네.

 

멀리선 느낄 수 없네

부딪혀 오는 함성소리를

그래 가까이 오면 거대한 파도로

억압의 역사를 두드리네

 

아- 파도여 아- 파도여.”


-저는 모르겠네요. 우리는 그야말로 <파업가>라든지, 내 사랑 노동자여~ <선포> 이런 거.

“지금도 나이 많으신 노동자들은 그런 정박을 좋아해요.”


새노리 시절.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강민아.


살아오면서 제일 힘들었던 일 두 가지


-41년 동안 살아오면서 제일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나요?

“성격이 이래서 정말 죽을 만큼 힘들고 그런 적은 없어요. 남동생 그렇게 됐을 때가 제일 힘들었죠. 마음의 빚, 너무 미안했어요.(눈가가 급 충혈됨) 그리고 어떤 걸 결정하는 데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무래도 통합진보당 탈당이었어요. 두 달을 꼬박 고민했으니까. 제가 그렇게 길게 고민한 적은 없었어요.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고 살아야지’ 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다짐하면서도 그게 참 결정하기 힘들었어요.”


-동생 이야기를 하니 눈이 빨개지네요.

“원래 제가 잘 울어요. 성도 잘 내고. 제가 좀 다혈질이예요.”(웃음)


-그런데 강 의원을 아는 분 중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저리 밝고 반듯하게 살 수 있는지 참 신기하다’라고.

“제 주위에 너무 좋은 사람들이 많아요. 부모 형제보다 더. 그래서 어머니도 그런 얘길 많이 해요. 제 성격은 어머니 덕이 크죠. 밝게 키워주셔서. 어머니는 세 아이를 키우는 동안 언니가 공부를 잘 한다고 해서 그걸 크게 쳐주는 법도 없었고, 제가 언니보다 공부를 못한다고 구박하지도 않았어요. 아이구 우리 딸 잘 한다, 노래도 잘하네 이랬지. 그리고 제가 중학교 때 겉멋이 약간 들어가지고 기타가 너무 갖고 싶은 거야. 그래서 사달라고 했지. 그 때 돈으로 5만 원이었으니 큰돈이었죠. 그런데 사주시는 거예요. 중3 쪼그만 게 그걸 들고 남강변에 앉아 ‘너의 침묵에~’ 노래를 부르면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어요.”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꼭 이루고 싶은 게 있나요?

“나는 특별히 그런 게 없어요. 그냥 어릴 때, 고3 때부터 꿈꿔왔던, 내 주변에 불행한 사람들이 없는 좀 더 나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런 과정에 제가 할 역할이 끊임없이 있으면 좋은 거죠. 새노리가 그랬고, 지금 시의원도 그래요. 너무 감사하죠.”


-시의원으로서 앞으로 어떤 진주를 만들고 싶나요?

“제가 속한 상임위가 기획경제위원회인데요. 경제분야에서 새로운 기업 유치도 중요하지만, 진주에 제일 많은 직업이 상업이거든요. 진주의 자산이 뭔지, 진주가 가지고 있는 게 뭔 지부터 찾는 게 필요하다고 봐요. 재래시장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이라든지. 문화예술도 그래요. 일각에선 조수미 콘서트를 유치해 와도 진주에선 티켓이 다 안 팔린다는데, 조수미만 문화예술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문화가 있는 거잖아요.”


-건강관리를 위해 특별히 좋아하는 운동이 있나요?

“운동 거의 안 해요. 새노리 활동할 땐 풍물하고 몸짓하는 것 자체가 운동이었지만…. 아, 모임에서 에어로빅 한 적은 있어요.”


-등산도 안 하시나요?

“등산 정말 안 좋아해요.”(웃음)


-정신적으로 특별히 의지하거나 멘토로 여기는 분이 있나요?

“하해룡 의장님. 농민회 운동하셨던…. 그 분 집에 밥 얻어먹으러 자주 가요.”



2시간 2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눠본 느낌은 참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었다. 통합진보당 탈당과 관련, 반대의 입장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참 좋은 사람인데, 왜 그러는지 몰라. 아무래도 너무 마음이 순수해서 그래”라고 정리했다.


표정이나 말에 가식이 없었고, 감정표현에도 솔직했다. 그리고 진짜 자신의 일을 즐기고 사랑하는 것 같았다.다만 진보의 분열로 그가 몸담을 정당이 없다는 게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막연하게 생각하던 풀뿌리 지역정당(Local Party)의 필요성이 좀 더 절실하게 느껴졌다. 굳이 중앙당이나 광역당이 없어도 해당 자치단체 단위로 뜻 맞는 사람들이 정당을 만들 수만 있다면 강민아 의원을 저리 홀로 내버려 두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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