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사람이야기

이재욱 노키아 회장, 은퇴후 10년 뭘했을까

기록하는 사람 2013. 7. 2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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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인터뷰]이재욱 노키아티엠씨 명예회장


인터뷰 약속 시간은 오후 2시였다. 혹시 늦을세라 빗길을 서둘러 달린 결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영학리 학동마을 저수지 윗자락에 위치한 그의 집에 도착한 시간은 1시 45분.


이재욱(1941년생) 회장은 이미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산을 들고 마중을 나온 그는 물레방아가 돌고 있는 정자 봉림정(鳳林亭)과 농기계 창고 등을 보여주었다.


“아픈 다음부터 여기에 통나무집을 지어서 살았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통나무집을 저기 아래로 옮기고 본채를 새로 지었지요.”


그는 2000년 후두암 수술을 받았다. 그 때부터 이 마을에 거처를 정하고 2002년 지금의 2층 집을 지었다.


@사진 박일호 경남도민일보 기자


이제는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그 때 수술로 인해 발음이 잘 되지 않는데다 오랜 시간 말을 하기 어렵다. 1시간 30분 정도가 한계라고 한다. 오늘 인터뷰를 앞두고 최상의 컨디션을 위해 여러 가지 사전 준비를 했다고 한다. 일흔두 살의 나이, 일선에서 은퇴한지 10년이 다 됐지만 여전히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매사에 빈틈이 없어 보였다.


그는 1986년부터 핀란드 최대의 다국적 기업 노키아의 한국 법인인 (주)노키아티엠씨(NOKIA tmc) 대표이사를 맡아 2004년 1월 은퇴하기까지 연간 3조 7000억 원이라는 매출과 종업원 1인당 매출 42억 원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그가 사장과 회장으로 있던 18년간 (주)노키아티엠씨는 100배 성장을 이뤘다.


그는 10년 전 은퇴 축하연 자리에서 자신의 퇴임을 ‘새로운 도전’이라고 말했다. 경영 일선에서는 물러나지만 그동안 꾸준히 해왔던 사회사업들을 본격적으로 해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우리 사회에는 높은 자리에 있다가 은퇴하면 여기 저기 놀러 다니거나 명품 구입을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이 많아요. 나는 스스로에 대해 만족하고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일을 계속 하고 싶어요. 남을 돕는 게 결국은 나를 돕는 것이거든요.”


그의 농기계 창고 @사진 박일호 경남도민일보 기자


명함에 박힌 여섯 가지 직함


그로부터 10년 후 받아본 그의 명함에는 ‘노키아티엠씨 명예회장’, ‘사단법인 대한검도회 명예회장’, ‘치릴로장학회 이사장’, ‘재단법인 봉림 이사장’, ‘사단법인 경남동그라미회 이사장’, ‘사단법인 한국지속농업 이사장’, ‘사단법인 날개 이사장’이라는 여섯 개의 직함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한 눈에 봐도 ‘돈을 버는’ 직함이라기보다 ‘돈을 쓰기 위한’ 직함들이었다. 이런 법인이나 단체에서 어떤 일들을 해온 것일까?


본채 1층 접견실로 꾸며놓은 방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방에는 어릴 적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종 사진과 상패, 기념패, 감사패, 각종 훈장 등이 잘 진열되어 있었다. 훈장은 남색 양복 상의에 마치 유럽 왕실의 대례복처럼 장식되어 있었다. 노태우·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은탑산업훈장과 금탑산업훈장, 핀란드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사자훈장, 그리고 대한적십자사에서 받은 금장·은장훈장 등이었다.


@사진 박일호 경남도민일보 기자


-저 옷에 있는 건 그동안 받은 훈장이군요.

“1년에 한 번 중요한 행사에는 이렇게 입고 나가요. 훈장은 죽을 때 관 앞에 놓으라는 게 아니거든요. 살아있을 때의 명예니까요. 그 명예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지요. 그런데 주위 사람들은 그렇게 입고 나가는 걸 말려요. 부끄럽다고, 자랑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우리나라에서는 자랑을 하면 안 됩니다’라는 말도 해요.”(웃음)


-아까 보니 정자 현판이 ‘봉림정’이던데, 봉림이 회장님 아호죠?

“내 별명이죠.”


-왜 별호를 봉림으로 했나요?

“30년 전 노키아티엠씨 사장으로 창원에 왔을 때 내가 살던 데가 창원대 앞에 있는 롯데아파트였거든요. 근처에 조그만 밭을 하나 사서 일구어 왔는데, 도로가 없어서 차가 못 들어가는 곳이었어요. 그 뒷산 이름이 봉림산이었어요. 그 산에 내가 정을 주었고, 그래서 산 이름을 딴 거죠.”


1986년 대한전선(현 대우전자)에서 마산자유무역지역에 있던 노키아티엠씨 사장으로 스카우트되어왔을 때 봉림산 아래 600평 정도의 밭을 샀고, 거기서 무 배추 시금치 상추 등 채소를 키웠다. 그는 어린 시절 경작할 논이나 밭이 없어 겪었던 서러움 때문에 특히나 논·밭에 대한 애정이 깊은 듯했다


@사진 박일호 경남도민일보 기자


-부모님 고향이 함경남도 북청이죠?

“네. 북청물장수로 유명한 그 북청. 일제 때 서울로 오셨죠.”


-‘북청물장수’라는 말은 어디서, 왜 나온 거죠?

“서울의 역사와 지리를 알아야 해요. 서울의 부자들은 중앙청 오른쪽 북천마을에 많이 살았어요. 청일전쟁 나기 전에도 우리나라 산에는 나무가 거의 없었어요. 동학란이 났을 때도 나무가 거의 없었어요. 농민반란, 홍경래의 난이 났을 때도 그랬죠. 우리나라가 다들 못 먹고 살던 시절이었는데, 부자들이 사는 북천마을에 청계천이 있었지만 물이 더러웠어요. 거기서 빨래하고 다 하니까. 그래서 부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깨끗한 물이었어요. 이걸 함경도 북청에서 온 사람들이 알게 된 거예요. 북청 출신으로 서울에 와서 아는 사람도 없고, 오로지 나무 땔감이나 물을 길어서 부잣집에 갖다 파는 일을 한 거죠.”


-그런데 당시 서울에 전국 각지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텐데, 유독 함경도 북청 사람들만 물장사를 했다는 게 이해가 안 되네요.

“경상도나 전라도는 사돈에 팔촌이라도 서울에 있었죠. 그런데 함경도는 아무런 연고가 없으니까 물장사 나무장사라도 한 거죠.”


-그렇군요. 회장님 쓰신 책 <노키아와 영혼을 바꾸다>에서 보니 1950년 전쟁 중 부산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1.4 후퇴 때 피란지 부산에서 돌아가셨죠. 제 나이 열한 살, 초등학교 4학년 때였죠. 어머니는 서른 살 젊은 나이에 홀로 되셨고….”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어떤 회사를 다니시기도 하고, 이것저것 하신 것 같은데, 제가 워낙 어릴 때여서 정확히는 몰라요.”


-원래 고향인 북청에 계실 때 선대 할아버지는 농사를 하셨나요?

“농사를 지었죠. 거긴 모두 농사였어요. 우리 고향 할아버지·할머니 사시던 곳 앞에 개천이 흐르는데, 그걸 남대천이라고 해요. 한국에서 원자력발전소를 이북에 세우려 한 데가 바로 거기예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준 열사, 그 분이 바로 그 남대천 너머 산 너머에 사셨어요. 이준 열사는 워낙 학문이 높으시고 벼슬도 하시고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되셨죠. 그래서 저도 이준 열사 기념사업에 참여하고 있죠.”


‘북청물장수’의 타고난 성실성과 향학열


@사진 박일호 경남도민일보 기자


-그런데 왜 부모님이 서울로 이사하신 걸까요?

“인구는 많고 땅은 좁아서 농사만 해갖고는 살 수 없으니까, 젊은 사람들은 대개 서울로 왔어요. 그래서 물장수도 하고…. 그래서인지 북청은 우리나라에서 향학열은 넘버 원이에요.”


-북청 사람들의 향학열이 특별히 높은 배경이 있을까요?

“옛날부터 그랬어요. 공부를 안 하면 살 방법이 없었어요. 함경남도 장학회가 있는데, 군 단위, 면 단위 장학회까지 있어요. 저도 대학 다닐 때 2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함경남도 장학회에서 장학금을 받았죠. 아무리 못사는 마을이라도 공부 잘하는 아이는 지원을 해주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마산에 와서 성공했잖아요. 돈도 명예도 모든 걸 여기서 얻었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열심히 장학재단을 만들고 지원을 하는 거죠.”


-봉림재단은 언제 만들었나요?

“장학사업은 그 전부터 해왔지만, 봉림재단은 2003년 여름에 만들었죠.”


-저희 경남도민일보를 통해 지급되는 장학금 말고도 다른 경로로 지급되는 장학금이 많더군요.

“한 군데에 줘서 운영하게 하는 건 효율적이지 않다고 봐요. 필요한 곳에 필요한 장학금이 지원되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경남신문을 통해서도 삼영장학회라고 하여 매년 얼마씩 기금을 조성했죠. 그러다가 나중에 경남도민일보를 통해서도 지원하게 된 거죠. 그 다음에 피폭력 여성을 위해서도 지원을 하고 있어요.”


-어떤 여성들인가요?

“가정폭력 피해자들이죠. 그런 피해 여성들을 위한 피난처가 있는데, 나라에서 도와주는 것은 6개월뿐이에요. 여섯 달 후에는 그 여성이 어딜 갈까요? 그래서 6개월 동안 독립하지 못한 여성을 더 머물 수 있게 해주고,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교육도 시켜주고, 또 아이를 데리고 나온 여성은 그 애들과 함께 머물도록 하면서 아이들 학교 교육도 시켜주고, 그런 지원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와서 도와주고 있어요. 그리고 몸 파는 10대 여성들, 나라에서 붙잡아 오는데, 그 아이들을 소년원에 보내면 더 악화되겠죠? 그래서 그 아이들을 돌봐주는 단체가 있어요. 거기 있는 아이들 중·고등학교, 전문학교, 대학교에 진학할 경우 교육비도 지원하고 있죠. 인원 제한 없이 누구든지 학교 진학하면 도와주고 있어요. 그 애들이 부모도 못 믿고 사회도 못 믿고, 우리 봉림재단만이라도 믿을 수 있게끔 하는 거죠.”


-그게 어디에 있는 단체인가요? 범숙의 집?

“네. 그곳이에요. 그리고 고아원도 많잖아요? 그런데 거기 있는 아이들도 고등학교 졸업하면 떠나야 해요. 그러면 그 애들이 어딜 가요? 어디 가서 먹고 살아요? 그런 아이들 중 대학 진학하는 아이들에게도 장학금을 지원하죠. 전액은 아니지만. 그렇게 지원받은 아이들 중 둘에 하나는 성공을 해요. 그리고 삼진(진전·진북·진동면) 지역 아이들도 면장에게 추천해달라 하여 매년 20명, 30명씩 지원을 해주고 있어요. 이쪽에 고등학교가 딱 한 군데 있는데, 그동안 좋은 대학을 들어간 적이 없어요. 7~8년 전부터 특수반 운영비를 지원해주고 있어요.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조건이 있다. 나는 객지 사람이다. 내가 낸 만큼 지역사람들에게도 거둬라.’ 이렇게 지역에서 호응이 안 되면 어느 순간 다 끊을 거예요. 북청군 출신이 피난 와서 만든 장학회만 스무 개가 넘어요.”


@사진 박일호 경남도민일보 기자


그의 작심 발언 “객지 사람도 하는데, 이 지역 사람은 왜?”


이 대목에서 그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지역사회에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 제가 인터뷰에 응한 것은 사실 불만이 있어서예요. 10년 동안 장학회를 운영해왔는데, 나는 경남 사람 아니거든요? 여기서 학교도 안 나왔어요. 이렇게 객지 사람이 이 지역에서 장학회를 하고 있는데, 이 지역 사람들이라면 10분의 1이라도 따라와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그러지 않아서 불만이에요. 안 따라오는 이유 중에 돈이 없다고도 하지만, 난 그건 아니라고 봐요. 함경도 북청 사람들은 어딜 가든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장학회부터 만들어요. 그리고 묘역을 조성하기 위한 땅을 사죠. 3000평이든 5000평이든 임야를 사서 산소를 마련하죠. 그런데 이 지역은 어떻게 된 게 객지 사람이 와서 이렇게 판을 치는데, 왜 이 지역 사람들이 자기 지역을 위한 행위를 하지 않느냐는 거예요. 객지 사람들이 이러면 여기 사람들은 향토애 때문에라도 마을마다, 면 단위마다 장학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아무도 그러지 않죠. 난 그걸 이상하다고 봐요.”


단단히 작심하고 하는 이야기 같았다. 봉림재단 사무국을 통해 지난해까지 10년간 지원 금액을 알아봤다. 18억 3500만 원이었다. 이번 인터뷰를 마친 직후인 6월 20일에도 진전·진북·진동면 등 삼진지역과 구산면의 초·중·고·대학생 50명에게 3400만 원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이처럼 올해 상반기에 지원했거나 하반기에 지원될 금액까지 합치면 20억 원이 넘을 것이다.


-직함에 보니 ‘치릴로장학회’도 있던데, 그건 뭔가요?

“치릴로라는 신부가 있는데, 신부가 돈을 만들 줄을 모르니까. 몇 년간 짚세기로 뭔가를 만들어 팔아도 보고 했는데, 여성의 집 아이들 가르치려고 신부님이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안 되니까 나에게 좀 도와달라고 했어요. 당신 이름으로 하든 뭐로 하든…. 그래서 치릴로 장학회가 되었죠.”


-어느 여성의 집을 말하는 겁니까?

“창원여성의 집.”


-사단법인 날개는 뭡니까?

“집창촌에는 안 들어갔지만, 부모는 싫고, 길거리에 나와서 돌아다니는 여자애들이 꽤 있어요. 나라에서 그 아이들을 잡아서 부모에게 보내면, 또 뛰쳐나오고…. 들어가면 두들겨 맞으니까. 이런 아이들을 보호해줄 곳이 필요하다고 하여 경남도에서 어느 단체에 요청을 했어요. 그 단체에서 저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했죠. 여성의 집과 비슷한데, 타락하기 직전의 아이들이죠. 도에서 인건비는 나오고, 진해에다가 집을 얻어서 직원 채용해서 운영하고 있죠. 대학도 갈 수 있고, 필요하면 유학도 갈 수 있고, 지금 5명 있는 걸로 아는데, 아마 더 늘어날 거예요. (흐뭇한 표정으로 웃으며) 한 아이는 무조건 공부만 해요. 얼마 전 고입 검정고시 거쳤고, 금년 안에 대입 검정고시도 칠거예요. 나라에서 하긴 어렵고, 이 지역에선 해줄 사람이 없고…. 요즘 뉴스를 보니 아이들 수당 나오는 걸 갈취하는 곳도 심지어 있더군요.”


-동그라미회도 이사장을 맡고 계시죠.

“동그라미회도 제가 은퇴 직전에 만든 건데, 은퇴를 2003년 말, 2004년 1월에 했으니까….”


-당시 기업은행 마산지점장과 함께?

“박종권 지점장이 있을 때 박 지점장과 몇 사람이 추진을 했어요. 환경운동하던 백운길 그 사람 하는 일을 제가 도와줘요. 그 사람 하는 단체가 너무 열악하고, 좋은 일 많이 하는데, 그 사람이 박종권 지점장과 같이 와서 하는 말이 좋은 일 하는데 참여해달라고 해요. 설명을 주~욱 하는데 너무 좋은 일이라 이건 개인이 하기엔 너무 크다. 노키아가 개입을 해야겠다. 노키아 사장 입장에서 참여하겠다고 하여 활성화시켰죠. 언청이 수술이 지금은 많이 없는데다, 지금은 그 수술도 나라에서 해주는데, 10년 전엔 그걸 동그라미회가 해준 거죠. 지금은 다른 것도 많이 해줘요. 주종을 바꿨어요. 불법체류자들 많잖아요. 그런 어려운 이들 도와주고…. 2-3년 안 하다가 다시 들어가서 기금을 튼튼하게 했죠.”


@사진 박일호 경남도민일보 기자


노키아의 쇠락, 그러나 서서히 올라갈 것


-1941년생이니까 올해 일흔둘이시죠? 여전히 너무나 열정적으로 사시는 것 같네요. 

“재작년부터 내가 말한 것에 대해 책임 안 져요.(웃음) 약속을 해놓고 저녁에 돌아오면 후회해요. 힘도 없으면서, 내일 아침에 죽어 있을 지도 모르는데. 제가 뭘 할 때 온몸을 다 바쳐서 하거든요. 그렇게 하다간 지금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요. 제 책 제목도 <노키아와 영혼을 바꾸다>이잖아요. 온 육체와 두뇌를 다 동원해서 일으킨 회사거든요. 8시간 근무가 아니에요. 18년 동안 풀타임이었어요. 그러니까 회사가 되지.”


-그렇게 키워온 회사인데, 가슴 아프시겠지만, 공교롭게도 회장님 퇴임 후에 노키아가 쇠락하고 있잖아요.

“사람에게도 수명이 있죠. 유아기, 장년기, 노년기가 있죠. 나라도 초기, 중기, 말기가 있고, 민족도 흥망성쇠가 있잖아요. 기업도 마찬가지예요. 물론 예외도 있긴 있어요. 하지만 50년 역사로 봤을 때 아마 다섯 개도 안 될 거예요. 노키아로 따지면 역사가 약 150년 내지 200년 되요. 그동안 굴곡이 있었어요. 2차 세계대전 때도 그랬고, 그리고 제가 들어올 때가 노키아로선 가장 나쁠 때였어요. 경영 결과가 나빠서 회장이 연초에 자살을 했어요. 출근해서…. 도저히 안 되니까….”


-그게 1986년?

“제가 와서 4~5년 뒤였으니, 아마 1990년 전후였죠. 당시 노키아의 주종은 전화기가 아니었고, 전선(와이어)과 텔레비전 모니터 이런 거였는데, 경영이 나빠져서 90년이 되었을 때 자살했고…. 제가 사장으로 있던 마산만 괜찮았어요. 세계 시장에서 전화기가 1%도 안 될 때 제가 왔거든요. 노키아가 다른 건 다 안 됐는데 마산에서 이것만 잘 되니까 다시 올라간 거예요. 그러니까 전화기가 노키아를 살린 충신이죠. 그 중심에 한국의 노키아가 있었던 거죠. 그렇게 하여 20년 동안 잘 했거든요. 이제 한 번 내려와야죠. 지금 내려가는 중이에요. 너무 급히 올라갔기 때문에 내려올 때도 급히 내려오게 되는 거죠. 그런데, 제 육감으로 봐서는 아마 문은 안 닫을 거예요. 다시 올라갈 거예요. 그러나 예전에 제가 있을 때처럼 그렇게 급히 올라가진 않아요. 이제는 완만하게….”


-그러면 80년대 말, 90년대 초반에 그 전에는 텔레비전 모니터, 전선 이런 거 하시다가 전화기 사업을 시작한 곳이 한국 노키아였던 건가요?

“제가 오기 2년 전에 핀란드에서 시작은 했죠.”


-그걸 한국 마산에서 성공을 시킨 거로군요.

“네. 핀란드 사람들은 손도 바이킹이에요. 여자 손도 그래요. 손이 크다는 말이죠. 잽싸지가 않아요.”


-섬세한 작업을 못하겠군요.

“그리고 우리나라 문화를 잘 몰랐어요. 아시겠지만 한국인은 얼마나 머리가 빨라요? 문제 생기면 퇴근도 하지 않고 달려들죠. 그러나 선진국은 문제가 쌓여 있어도 퇴근 시간 되면 그냥 집에 가죠. 지금은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그러면 노키아의 휴대폰 신화는 한국 마산에서 비롯되어 전 세계 노키아로 확산되어 간 거로군요.

“네. 그렇죠.”


@사진 박일호 경남도민일보 기자


-1986년 대표이사·사장으로 왔다가, 99년 회장으로 승진하셨는데, 어쨌든 오너는 아니고 CEO였잖아요? 월급만 받나요? 아니면 배당을?

“월급.”


-월급 받아서 재산을 그렇게 많이 불릴 수 있나요?

“재산? 저 재산 많지 않은데요? 제가 외환위기 전까지는 경남에서 제일 많이 봉급을 받았으리라고 봐요. 그런데 외환위기 이후부터는 저보다 많이 받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우리나라 기업이 어떻게 된 건지 적자를 그렇게 냈는데도 월급이 많아요. 시시한 회사 임원도 월급이 저보다 많더라고…. 그래서 그 때부터 월급 이야기를 안 해요.”


-이렇게 장학사업도 많이 하려면 재산이 좀 있어야 하지 않나요?

“재산이 있긴 있죠. 그러나 생각보다 많지는 않고 여러 군데서 지원을 받죠. 제가 뿌려놓은 씨앗들이 있으니까.”


-지금도 회장님을 지원해주는 곳이 있나 보네요?

“그럼요. 노키아가 아니라 노키아에 근무했던 사람들.”


-1886년도에 대한전선에 계시던 중 노키아에서 회장님의 존재를 어떻게 알고 사장으로 스카우트하려는 생각을 했을까요?

“당시에도 전자산업에서는 저를 많아 알았어요. 여기선 잘 몰라도 중앙에서는…. 대한전선에서 컬러텔레비전을 제가 제일 먼저 했어요. 샤프라는 일본 회사와 제휴해서 만들었죠. 우리나라에서 전자레인지도 처음으로 만들었고….”


-대한전선에서 최종 직급이 뭐였나요?

“공장장. 공장이 구미에 있었죠.”


-아, 거기서 공장장 겸 이사로 계시다가 노키아로 스카우트 되신 거군요.

“네.”


-대한전선이 지금 대우전자죠?

“대우전자의 일부가 되었죠.”


-대한전선 이전에 계셨던 대한광학은 어떤 회사였나요?

“카메라하고 쌍안경 만들고, 방위산업에서 쓰는 대포의 조준경 그런 걸 만드는 회사였죠. 제가 7년 있었는데, 저 나오고 7년 만에 문 닫았죠.”


-대한광학 7년, 대한전선 11년, 노키아에 사장으로 오실 때 나이가 마흔 다섯밖에 안 됐잖아요. 그렇게 젊은 나이에 사장이 된 경우가 회장님 말고는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지금은 많죠. 지금 전자산업에서는 쉰이 넘으면 은퇴, 퇴물 취급을 받거든요. 삼성의 사장들도 다들 50대 초반이에요. 젊은 사람은 경험과 기술이 모자라는 대신 젊음과 열정이 있잖아요. 한국 사람이 열정을 가지면 안 되는 게 없거든요. 나쁜 일도 안 되는 게 없지만 좋은 일도 안 되는 게 없잖아요.”


노키아 회장 월급은 국영기업체의 1/3


-책을 보니 대한전선에 계시다가 노키아 사장으로 스카우트되실 때 대한전선에서 받던 월급의 3배를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던데, 그 3배의 월급이 당시 돈으로 얼마였나요?

“연봉으로 약 9000만 원 정도. 그런데 환율이 1300원대에서 800~900원대로 떨어지는 바람에 30% 이상 깎인 셈이 되었죠.”(웃음)


-노키아 본사에서는 핀란드 말을 쓰나요?

“아뇨. 다국적 기업이기 때문에 핀란드 사람도 있고 미국 사람도 있고, 여러 나라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영어로 쓰죠.”


-기업 내 공식 언어는 영어로 쓰는군요. 그러면 회장님이 구사하는 외국어는 영어와?

“일본어도 하죠. 일본 기업들과도 상대해야 하니까. 대한광학 다닐 때부터 영어와 일본어 공부를 했죠.”


-2004년 1월에 은퇴를 하셨으니까 1986년부터 18년 세월을 노키아와 함께 하셨는데, 은퇴는 회장님이 결정하신 건가요?

“제가 2000년 말에 수술을 했어요. 그 때 사실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운이 좋아 다시 살아났고, 그 때부터 일을 줄여왔죠. 그리고 본사에서도 대화가 안 되니까. 한국말도 이렇게 발음이 어려운데…. 제가 회의하는 상대는 한국 사람이 없어요. 전부 핀란드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매년 3조원 매출을 올리니까 본사에서도 그만 두라는 말을 못해요. 그런 상황에서 2004년 그만 둔 거예요.”


-사장으로 들어왔다가 나중에 회장으로 승진하셨는데, 회장 연봉은 얼마나 되었나요?

“음. 많지 않아요. 많지 않았어요.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다른 기업 임원들 연봉을 보고 창피해서…. 핀란드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발표하면 안 되겠다 생각했을 정도니까. 한 때 전산 문제가 발생하여 내부 컴퓨터에서 내 월급 명세서가 공개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우리 직원들이 ‘어! 회장님 월급이 이것밖에 안 돼?’ 하고 놀랐던 적도 있었어요. 20분 만에 회수하긴 했는데 그 때문에 간부들은 알고 있었지. 그런데 그 월급이 우리나라 기업 사장이 받아야 할 적정 월급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얼마나 되었나요.

“국영기업체 사장의 3분의 1 정도였어요. (국영기업체 사장들이) 일도 안 하면서 그렇게 많이 받는 것은 문제가 있죠.”


-어머니가 59세에 돌아가셨다고 하셨던데, 그러면 78년~79년 그 때쯤 되겠군요. 회장님이 대한전선에 계실 때였는데, 노키아 사장으로 오시는 걸 못보고 돌아가셨군요.

“그렇죠. 원래 하느님이 그렇게 만들잖아요. 자식들이 성공하는 걸 못보고 돌아가시게….”


-그것도 회장님께 한이 많이 되셨겠습니다.

“아니, 하느님이 시키신 건데 뭐.”



-어머니가 참 고생을 많이 하셨겠습니다.

“내가 사진을 엄청나게 많이 갖고 있어요.”(어머니 사진을 하나하나 보여줬다.)


-이게 대학 졸업하실 때 사진인가요?

“네. 졸업 때…. 이건 내 돌, 그리고 초등학교 때.”


-남대문초등학교였죠.

“네. 부산 피난지에서 남대문초등학교. 그리고 이건 고등학교 때.”


-휘문고등학교?

“그렇죠.”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나오셨는데, 요즘은 전자공학이라는 분야가 일반적이지만 1965년도에 전자공학이면 새롭고 생경한 분야가 아니었나요? 그럴 때 어떻게 전자공학과를 가려고 생각을 하셨습니까?

“여러 가지 생각을 했었는데, 당시 통신공학과를 전자공학과로 바꾼 후 인재를 모으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거기 가게 됐죠.”



-원래 꿈은 농과대학이나 의과대학을 가려고 했었다면서요?

“하도 배가 고픈 시절이었으니까 농과대학에 가서 농업혁명을 일으키자고 생각했죠.”


-그 때 농과대학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지금도 이렇게 농사일을…?

“그것도 많은 관계가 있죠. 우리나라가 앞으로 살아갈 방법은 농업이라기보다는 농업이 기초가 된 좋은 환경, 좋은 물, 좋은 산, 들, 바다, 강 이런 모든 자연이 우리가 먹고 살 진짜 재산이라고 저는 봐요. 중국은 크지만 사람 살 만한 데가 별로 없어요. 걔들이 관광을 가서 가장 좋아할 곳이 어디냐? 대한민국 전체 어디에 데리고 가도 걔들은 다 좋아해요. 중국에는 이런 데가 없어요. 있다면 황산이라고 요만큼 있고, 태산이라고 요만큼 있는 것뿐이에요. 우리나라는 저 앞에 저수지 있어. 개울 있어.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있어. 이게 재산이에요. 그래서 우리 산업은 소프트웨어 쪽으로 가야 해요.”


-혼자되신 어머니 밑에서 대학 다니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대학에서 아르바이트도 많이 하셨겠네요.

“서울대는 등록금이 싸요. 게다가 장학금을 받았으니까. 제가 가정교사로 과외를 하면서 벌었죠.”


-ROCT 학사장교로 군 복무를 마친 것도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그렇죠. 월급 받으면서 군대생활을 할 수 있었으니까.”


-소위로 임관하셔서 일선 부대 소대장으로 복무하신 건가요?

“아뇨. 제가 전자공학을 했으니까 특수병과였죠. 유도탄 등 병기를 다뤘죠.”


-장교로 군 생활하셨던 게 이후 사회생활이나 기업 운영에 도움이 되셨나요?

“아주 많이 되었죠. 사람을 관리하는 방법이나 통솔력. 기술 계통이라 부하가 많지는 않지만 하나하나가 다 우수한 인력들이었어요. 그런 친구들을 엉성하게 통솔하면 아무 것도 안 되죠. 잘 해주고 도움 받고…. 그런데 재미있는 게 대학동기가 사병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있어요. 동기모임에선 친구지만 군대에선 졸병이 된 거죠. 그런데 역시 졸병은 졸병의 역할을 해요. 장교는 장교의 역할을 하고. 바보 같은 놈도 소위 계급장 달면 장교답게 말하고 행동을 해요. 참 이상해. 선생님들도 어디에 교육생으로 가서 학생 자리에 앉으면 그들도 다 꾸벅꾸벅 졸 거예요. ”(웃음)


-좌우명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데, 무조건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뜻인가요?

“무식하게 말하자면 그게 진리인 것 같아요. 아까도 하느님, 조물주 이야기를 했지만, 살고 죽는 걸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막아요? 그건 천명이지.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열심히 하는 것밖에 없죠.”


경영자는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그래도 열심히만 하는 것 외에 회장님 나름의 성공 비결은 없나요?

“독서는 기본이고, 많이 읽어야죠. 서울 공대에는 다들 머리 좋은 학생들이 들어오는데, 저는 머리가 좀 덜 좋은 편이었어요. 다른 학생들은 한 번 보면 다 외우는데, 나는 그게 안 되니까 그들이 한두 번 책을 볼 때 나는 열 번 스무 번 본다는 생각으로 했죠. 머리 좋은 그들이 당구도 치러 다니고 이것저것 다른 일을 할 때 나는 오직 한 가지 공부만 했던 거죠. 남들 하는 것 나도 다 하면서 그들을 이길 수는 없으니까요.”


이재욱 회장은 2004년에 펴낸 자전적 에세이 <노키아와 영혼을 바꾸다>(신원)에서 경영자가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우선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간에 경영자는 시대와 시장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지식과 지혜가 필요하다. 오늘날처럼 상황이 급변하는 시대에선 조금만 잘못하면 쉽게 회복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경영자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변화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경영자는 신문 하나 제대로 읽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생활한다.

윗사람이 항상 아랫사람보고 공부해라 공부해라 말로만 하지 말고 자신부터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위에서부터 철저하게 학습하는 풍토가 지금처럼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선 기업의 사활을 결정짓는다.”


@사진 박일호 경남도민일보 기자


-책은 주로 어떤 걸 읽으셨나요?

“주로 역사와 지리.”


-지리책은 왜?

“지도를 보면서 꿈을 꾸고 미래를 볼 수 있으니까. 예를 들어 북경은 모래바람 때문에 애를 먹고 있는데 100년쯤 뒤에는 사막이 될 거예요. 역사와 함께 지리를 공부하면 알 수 있어요. 또한 사우디아라비아 사하라 사막은 원래 정글이었죠. 거기서 나오는 유물들을 보면 알 수 있죠.”


-지리와 역사를 알면 미래 예측이 가능하다는 거죠?

“그럼요. 깊이 보면.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그리고 발트 3국 이런 나라는 인구가 500만이 안 되거든요? 800만 되는 나라도 있지만, 옛날에는 200만밖에 안 되었겠죠. 그런데 다를 그 나라의 언어를 써요. 그 나라의 문자를 쓰고. 그 나라의 풍습, 음악을 계속 지켜가고 있거든요. 우리나라는 5000년 역사를 갖고 있고, 5000만, 아니 8000만 인구가 있는데, 왜 우리말 중에 외국말이 많아요? 나보다 영어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우리말 속에 영어를 너무 많이 섞어서 쓰죠. 쓰려면 제대로 정확히 쓰든지. 이상한 외국말이 왜 그렇게 많아요? 라디오 텔레비전에서도 다 그래요. 좋은 우리말이 있는데. 500만도 안 되는 나라는 다들 자기 나라말을 쓰고 있는데. 나는 그게 불만이에요. 핀란드 말에는 영어가 안 섞여 있는데…. 음악도 그렇죠. 지금 우리나라 음악이 뭐 있어요? 언어 음악 문화 모든 게 오염이 되어도 너무 되었어요.”


-우리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거죠?

“지켜야 한다기보다 멋있게 유지해야 하는 거죠. 아까 제가 노키아 사이클을 이야길 했지만, 역사를 보면 중국도 200년마다 흥망성쇠가 있었어요. 그래서 노키아에 있던 친구들이 ‘창피하다’고 하면 내가 이래요. 네가 회사 다닐 때 네 부서를 더 튼튼히 했으면 이러지 않을 것 아니냐, 어따 대고 지금 하는 사람 잘못한다고 하느냐. 때가 되어서 지금 이렇게 내려가고 다시 이제 슬슬 올라오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말하지 마라.”


-예전에 노키아에서 함께 있는 분들이 그런다는 말이죠?

“네. 만나면 저한테 울면서 그래요. 그리고 우리 민요를 들으면 다들 한(恨)이 서려 있다고들 말하죠. 그런데 저는 그렇게 안 보거든요. 한보다는 신이 나는 게 우리 민요거든요. 밀양아리랑을 불러도 신이 나게 부를 수도 있고, 반대로 부를 수도 있어요. 여기에는 예술가의 책임도 커요. 우리 역사와 문화를 자꾸 어둡게만 만들고 있어요.”


@사진 박일호 경남도민일보 기자


-요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나요?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서 체조와 산책 두 시간 하고, 아홉 시에 밥 먹고 사무실 출근하죠. 봉림재단 사무실. 거기 두세 시간 책이나 신문 보다 머리 아프면 대우문화센터 갔다가 오후 네 시나 다섯 시 넘으면 체력이 떨어져서….”


-집 뒤에 있는 밭은 직접 경작을 하십니까?

“예. 머리 아플 때 흙 만지고 일하면 오히려 머리가 맑아져요. 밖에 있다가도 힘들면 빨리 이 골짜기로 들어와요.”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


그는 천생(天生) 농사꾼이었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 지난 2008년에는 고성군 거류면 들판 13.3㏊(4만 평)의 논에서 농민들과 함께 ‘지장(地藏)농법’으로 직접 가꾼 벼를 선보였다. 그리고 이 논에서 수확한 ‘고아미’ 벼를 주원료로 사용해 미세가공(건식, 습식)과 급속 냉동, 냉장의 과정을 거쳐 만든 소면, 잔치국수, 냉면, 자장면 등 4가지 음식을 700여 명에게 맛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또 그 쌀로 10만 명분 쌀국수 14톤(7000만 원 상당)을 경남도내 118개 초등학교에 급식용으로 기증했다.


연간 2억 원 가까이 들여 하고 있는 장학 사업이나 위기 청소년 돌보기 사업도 ‘사람농사’의 일환이다. 그는 자신이 돌봐주고 있는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때 표정이 가장 밝아보였다.


그가 노키아에서 일으킨 ‘신바람 경영’ 신화도 따지고 보면 ‘사람농사’의 한 영역이었다. 그는 책에서 신바람 경영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신바람 경영이란 말의 핵심은 종업원들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자기 방식대로 뜻을 펴서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것’으로 사원들의 아이디어와 뜻을 대부분 수정하지 않고 수용하고 내가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변경하도록 지도하여 업무를 추진하는 것이다. 나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면 일체 언급을 하지 않고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면 ‘내 생각은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식으로 얘기해주는 것으로 그친다. 요약하면 ‘네가 하고자 하는 뜻대로 일을 처리해라. 그리고 너의 책임 아래서 일을 마무리하라. 그러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가 도와주겠다’ 하고 말해주는 것뿐이다. 즉 책임보다 권한을 더 많이 주어 일을 찾아서 하게 하는 것이다.”


@사진 박일호 경남도민일보 기자


애초 한 시간 반 정도로 예정했던 인터뷰는 두 시간 반을 훌쩍 넘겼다. 그래서인지 이재욱 회장은 연신 물을 마시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와 인터뷰는 나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신문사야말로 ‘사람’이 가장 중요한, 아니 전부인 조직이다. 그런 신문사의 편집국장으로서 나는 과연 제대로 ‘사람농사’를 해왔을까 하는 반성이 밀려왔다.


이재욱 회장은 “사람이 가장 중요한 자원이고, 그런 자원을 엮어 하나의 큰 역량으로 만들어내는 원동력은 바로 믿음과 신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열심히 일해서 얻는 물질적 혹은 금전적 성과보다 중요한 것은, 진정 나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성취감이며 일에서 얻는 재미라고 생각한다.”


그래! 아무래도 나는 마음수련이 더 필요하다. 공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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