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윤미숙, '말 못하는 것'들을 위한 변호사

김훤주 2012. 10. 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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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6일 통영시 산양읍 연대도를 찾았습니다. 마을 만들기를 잘하는 섬이고, 중심에 윤미숙(50) 푸른통영21추진협의회 사무국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연대도는 에코아일랜드(eco-island:생태 섬)를 지향한답니다. 태양광 발전을 합니다. 마을회관은 패시브 하우스(Passive House: 화석연료 제로 건축물)입니다. 냉·난방을 하는 데 다른 에너지가 필요 없도록 만든 건물이라 합니다.

조양분교 폐교는 '연대에코아일랜드체험센터'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갖은 발전(發電) 체험도 할 수 있고 밥을 지어 먹거나 잠을 잘 수도 있는 곳입니다.


'연대 지겟길'도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며 몽돌해변이나 우거진 솔숲 등을 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숲에서 바다에서 거기 사는 여러 풀과 나무를 볼 수 있고 예쁘게 가꾼 꽃밭도 누릴 수 있습니다. 집집마다 그럴 듯한 문패도 달려 있고 골목마다 자세한 표지판도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따위는 '솔까말' 돈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연대도에는 다른 무엇이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애정과 관심이라고 합니다. 주민들이 원래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텐데, 무엇이 그이들을 이렇게 바꿔 놓았을까요?


폐교 사들인 연대 주민에게 반했지만


연대도는 2007년 들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만들기 사업 대상으로 선정되면서랍니다. 윤미숙 국장은 당시 선정을 앞장서 이끈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푸른통영21은 통영에 있는 섬들을 빠짐없이 돌아다니며 전수(全數) 실태조사를 했습니다. 8월 1일 다시 만난 윤 국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연 경관이나 주민 참여 등을 조사했는데 연대도가 두 번째였어요. 그런데 첫 번째를 제치고 선정됐습니다. 2003년에 문을 닫은 산양초등학교 조양분교가 문제였어요. 이를 마을 사람들이 빚을 내어 경남도교육청으로부터 사들인 사실을 알게 됐거든요.


폐교가 외지인한테 팔리지 않고 마을 주민들이 사들인 데는 여기뿐이에요. 물어봤어요. 왜 사들였는지. 별다른 까닭은 없고 마을에서 유일한 교육기관이고 아이들 까막눈을 뜨게 하겠다고 다 같이 부역해서 지었고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건물인데 바깥사람한테 팔려나가는 꼴을 볼 수 없어 그랬다고 해요.

공동으로 농협에서 2억8000만원을 빌렸다는 것도 확인했지요. '아, 이 분들이 마을에 애정이 많구나' 싶어서 첫 번째 마을 만들기 섬으로 꼽았지요."

"미친 × 지랄 안 하나!", "에콘지 개콘지 필요 없다!"던 주민들


"하하. 그런데 아니었어요. 마을에 대한 애정의 크기가 아니었고, 여기 사람들이 그만큼 대차고 고집스럽다는 증거였어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마음을 전혀 열지 않았습니다. 여태 자기네 섬 것들을 짓밟고 무시해온 뭍엣것들에 대한 타고난 거부감이 있었고 불신도 굉장했지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 마음을 열지 않고 얻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음을 알게 됐습니다.

지금은 주민들이랑 이렇게 아무 데서나 퍼질러 앉아 먹고 마실 정도가 됐습니다.


처음엔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욕을 숱하게 들었어요. '미친 × 지랄 안 하나!'는 점잖은 편이지요. '에콘지 개콘지 암 것도 필요없다'고 소리 질렀지요.

그래도 마을 분들을 만나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조건 말을 걸고 무조건을 말을 들었습니다. 말을 할 때든 들을 때든 성심껏 하고 성심껏 들었습니다. 다른 생각이나 욕심 없이 진심으로 당신들을 위한다는 그런 느낌이 가도록 진정성이 조금이라도 전달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연대도 할매 가운데 제가 보듬어 드리지 않은 분은 없을 낍니다."


할매 할배 마음 얻는 데 걸린 세월이 5년


윤 국장은 그러면서 3년이 지나서야 경계를 푸는 느낌이 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완전히 푸는 데는 꼬박 5년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완전히는 아니지만 마을 주민들과 98% 소통이 된다고 했습니다.

연대도 한가운데 우물. 70년대 대학생들이 와서 만들어줬다고 합니다.


"연대도에는 집도 있어요. 사는 집은 거제 둔덕에 있지만 연대도에 들어가 자고 먹고 하는 날이 더 많아요. 이제 대부분이 저를 연대도 구성원으로 받아들여 주시고요. 이렇게 하는 동안 저도 많이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연대 주민 대학을 진행하면서 그냥 이벤트 삼아 학사모와 학위복을 장만해 졸업식에 썼는데 이걸 쓰고는 한두 분이 눈물을 글썽거리시는 겁니다. 한 번 더 알았지요. 서러움의 뿌리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요. 못 배운 설움이 있고, 이것이 뭍엣것들의 천대와 무시와 겹쳐지면서 단단한 조가비가 됐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주민대학을 하면서도 허투루 하지는 않습니다. 한 번이라도 결석하면 졸업을 시키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정해도 바꾸지 않습니다. 기준이 허물어지면 오히려 이런 대학 자체가 별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지요."


"교육을 해도, 배우는 사람 따로 가르치는 사람 따로 이렇게 하면 안 되지요. 같이 놉니다. 거리감이 있으면 되지 않습니다. 너는 가르치는 사람, 나는 배우는 사람 이래서는 안 됩니다.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새로운 생각을 같이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쓰레기 관련 교육을 보기로 들면 이렇습니다. '할매, 오늘은 쓰레기 이야기를 좀 해 볼라고 하는데예.' '쓰레기? 그거 뭐 할라꼬? 니가 말 안 해도 우리 잘 하고 있구마. 깨끗하게 태아뿐다 아이가?' 우습지요?"


그래, 우스웠습니다. 쓰레기를 태우면 안 된다는 상식 하고 맞지 않으니, 자칫 웃음이 터질 법도 하겠습니다. 하지만 윤 국장은 웃으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진지한 얼굴로, 그러나 얼굴에서 웃음기를 빼지는 말고 말하는 것이랍니다.


"'할매예, 쓰레기도 잘만 모으모 돈이 되거덩예. 이거는 10원이고 요거는 20원이고 이것도 모아가면 돈이 되고요.' 이렇게 하려고 재활용이 되는 쓰레기를 미리 준비해 갑니다. 깨끗이 씻어갖고요. 그러면서 실제로 들어서 보여주고 돈이 된다면서 따로 모으시라 일러드립니다. 그래서 보통 다른 섬에서는 이렇게 쓰레기를 태우고 마는데 연대도는 통영에 있는 섬 가운데 유일하게 재활용 보관 창고가 있답니다."

할매 할배들이 동네에 대해 가장 지혜롭다는 믿음

뿐만 아닙니다. 윤 국장은 동네 할매 할배들로 하여금 계속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숙제를 내주는 것입니다. 마을 어르신들이 숙제를 해 오지 못할 것 같지만 전혀 아니라 합니다.


"'다음 시간까지는 이것 좀 찾아서 오세요. 이것 좀 생각해서 오세요.' 이렇게 말해요. 그러면 꼭 해 오십니다.  일은 손으로 하고 머리로는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연대도 조그만 해수욕장.


이런 숙제도 있습니다. '연대도에서 가장 좋은(아름다운) 것 찾기'. 그러면 할매 할배들 '머 빌 기 있나' 말하시지만 나중에 숙제 해 오신 것 듣고 보면 입이 딱 벌어집니다. 진짜로 멋진 게 많거든요.

'섣달 그믐날 밤 지짐 굽는 소리', '동제를 지내는 데서 북서쪽으로 쳐다보면 눈에 들어오는 풍경'. 본인들 느낌과 체험이 고스란히 담긴 그런 표현 아니에요? 하하. 우리는 이런 연대도 주민들의 이처럼 묵히기 아까운 지혜들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할 뿐이고, 주민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장어 외줄 낚시를 손질하는 한 할매.


푸른통영21추진협의회는 지방의제 추진기구로 거버넌스(governance) 조직입니다. 민과 관의 협치(協治) 기구입니다. 통영시에 이와 같은 기구가 생긴 때는 다른 자치단체에 견줘 조금 늦은 편인 2006년. 늦었지만 시작은 '프로'답게 잘해보자는 시장의 방침이 있었다고 합니다.


초기 푸른통영21 추진위원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윤 국장이 이 일을 맡게 됐습니다. 한 때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그래 무십은 사람을 어찌 데려다 쓸 생각을 했느냐'는 뒷담화도 있었다고 말해집니다.


또 다른 보람은 할매 아지매들의 마을 참여


이렇게 해서 윤 국장은 오랜 시간 몸을 담았던 통영·거제환경운동연합이라는 시민단체를 떠나 이른바 관변단체로 분류되는 푸른통영21추진협의회 사무국장을 맡게 됐습니다.

이렇게 6년 동안 전국적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동피랑 벽화 마을 마을 만들기를 했고 이어서 연대 마을 만들기를 하면서 얻은 보람이 또 하나 있습니다. 여성들의 마을 참여라고 하네요.


"마을 제사를 지낼 때 여성들이 소외되는 것은 여느 다른 섬마을과 똑같아요. 그런데 연대도는 이장을 뽑거나 하는 마을 의사 결정 과정에서도 여자들은 제외돼 있습니다. 남자들이 회의를 하면 여자들은 밖에서 먹을거리나 준비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마을 만들기를 하면서 여자들이 또다른 주체로 나서게 됐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밥이나 반찬 같은 먹을거리를 내놓는 일은 여자밖에 할 수 없잖아요.(밥은 30명 이상일 때 한 끼 6000원, 잠자리는 인원 제한 없이 1인당 1만원) 여자들이 주체적으로 나서 소득을 올릴 수 있게 됐고 덩달아 활기도 띠게 됐습니다.


'할매공방'이라고, 산국차, 쑥차, 민들레차라든지 섬에서 나는 갯방풍나물, 취나물, 달래로 장아찌를 만들어 파는 마을기업도 만들었습니다. 인기가 좋아서 민들레차는 다 나가고 없어요. 여기에 할매 32명이 취업해 있습니다. 그래서 연대도는 취업률이 100%랍니다."


어머니 중풍 때문에 고향에 돌아와


윤 국장은 거제도 출신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그이도 일찌감치 외지에 나가 공부와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잘 나가던'  서른 살 무렵에 갑자기 돌아왔다고 합니다.


"어느 날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당시 풍을 맞은 상태였지요. '숙아, 니 나랑 같이 살모 안되것나……' 직장에서 전화를 받고 약 2~3초 뒤에 딱 한 마디 했습니다. '알았어요.' 그러고는 짐을 싸서 고향 거제로 돌아왔습니다.


중풍을 맞았으니 그 병의 징후가 어떤지를 잘 알고, 며느리에게 짐을 지우기 싫었고 해서 비혼으로 살겠다는 딸에게 어렵사리 요청한 것이지요. 어쩌면 거절당할 수도 있겠다는 마음으로요. 돌아와서는 최근까지 19년 넘게 어머니랑 함께 살았습니다.


지금은 집 근처 조그만 요양원에 계시구요, 일주일에 한두 번 뵈러 다니지요. 어머니랑 함께 지낸 시절은 제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어요. 해마다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듯이 병환이 깊어지는 것을 지켜보기는 힘들었지만 나이 들어서 엄마랑 함께여서 행복했고, 엄마의 잔소리를  듣는 것도 즐겁고 그랬어요."


물론 지금은 함께 살지 않는답니다. 바깥 활동이 특히 출장이 많아졌기 때문에, 가까운 요양원에 어머니를 모셔두고 정기적으로 찾아간답니다. 일 때문에 어머니의 마지막 노후를 함께 알콩달콩 지내지 못하는 것이 늘 마음에 가시가 되어 걸린다고 합니다.


인생을 풍요롭게 바꿔 준 환경운동


윤 국장은 돌아와서 지역신문에서 기자 노릇을 했습니다. 예전 직장도 잡지사 등속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환경운동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이에게는 두 가지 일이 그다지 다르지 않았습니다.


"신문 일이나 NGO 일이나 제게는 별로 다른 일이 아니었어요. 조사하고, 문제점 짚고, 기사(성명서) 쓰고, 바로잡고……. 다만 기자처럼 객관적 관찰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자로 함께 하는 점에서 더 낫다고 봐야죠.


고향에 온 다음날 제가 헤엄치고 놀던 연초천에 추억을 찾아서 갔어요. 은어가 놀던 아름다운 하천이 발을 담글 수도 없는 더러운 하수구로 변해가고 있더군요. 처음엔 신문을 통해 환경 문제를 짚어나가다가 결국 전문으로 가게 되었어요. 누구나 그렇듯이 고향에 대한 애정이 있었고, 누군가는 지키는 일을 해야지 않나 싶었지요.


거제환경운동연합 설립 당시 한창 잘나가던 지역신문 사회부 기자였는데, 결국 시민단체 사무국장으로 끌려가게 됐어요. 운동 선배들이 강제로……. '사람 구할 때 까지만'이라 했는데 10년 넘게 일하게 됐지요.


환경운동은 인생을 풍요롭게 했어요. 삶에 대한 철학도 확 바꿔놓았고요. 물질에 대한 가치, 이런 것이 어느 날 사라지고 없더라구요. 옷은 재활용센터나 '아름다운가게'에서 사 입고 비싼 쇠붙이를 목에 걸고 다니는 것도 무거워서 싫습니다. '제 값싼 취향은 정말 다행'이라고 신랑이 거듭 말하지요.


물질에 대한 욕구나 기대가 대량생산 대량소비 구조 아래에서 벌어지는 지구 차원의 범죄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에 대한 혐오 비슷하게 되더니 어느 날 싸그리 없어졌어요. 명품 가방 이런 거 있으면 '당장 되팔아서 좋은 사람들이 모여 맥주나 막걸리를 사먹으면 오래 많이 먹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어요. 빈곤감은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한 상대적인 불행감 같은 거잖아요? 그게 사라지니 마음이 부자가 됩디다.


시간 나면 야생화 찾으러 다니고, 숲에 가서 새나 보고, 습지에 가서 중얼중얼 안부를 물으면서 조사하고, 저는 스스로 말 못하는 것들의 변호사라고 생각하고 살았구요. 앞으로도 그러고 싶습니다. 그들이 수임료를 안줘서 좀 문제긴 하지만 그동안 살려낸 것들이 좀 있으니 능력 있는 변호사예요.(웃음)


또 진정서 하나 쓸 줄 모르는데 어렵고 복잡한 환경문제에 직면한 어무이 아부지 같은 시골마을 할매 할배들 도와서 일하고 동·식물이든 사람이든 바다든 산이든 주로 돕는 일이 많아서 비교적 행복했습니다. 성깔도 좀 있어서 사회적 강자들 그것도 착하지 않은 강자들 앞에서는 친절이나 인정 따위 이런 건 싹 없어지지요. 미꾸라지에 소금 뿌려 놓은 것처럼 지랄용천을 잘 합니다.


어려웠던 점도 물론 있지요.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활동비를 10년 내내 80만원 받았으니까, 또 제가 어머니를 모시는 소녀가장이었거든요. 어머니께 좀 더 잘해 드리지 못해서 그게 제일 죄송했어요.


그리고 환경 문제를 저지른 장본인들이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폭력적으로 대할 때, 억지를 쓰고 사무실에 와서 부시고 욕을 하거나 협박 공갈을 하는 데 더해 사람을 때리기까지 하고 그럴 때 많이 갑갑했지요."


마흔 들어 20만원으로 치른 혼인식


윤 국장도 이제는 쉰 줄에 접어들었습니다. 인생을 여든까지로 본다면 전체 트랙 가운데 3분의2 즈음을 돌고 있는 셈입니다. 남은 인생에 대한 계획은 어떨까 궁금해졌습니다.


"서른 즈음부터 해마다 유서를 쓰는데 자꾸 고쳐 쓰게 되고, 다행으로 점점 내용이 줄어들더군요. 수목장을 해달라, 최근에는 연대도 앞바다에 뿌려주면 더 좋겠다, 남은 재산이 있으면 어느 단체에 기부해 달라, 뭐 그 정도지요.


비교적 스스로 만족할 만큼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별로 큰 후회는 없어요. 다만 좀 더 성실하게 보살폈어야 하는 사람들이 몇 있는데 그것을 못한 데는 죄의식이 많습니다. 돈 좀 생기면 가난한 시인들, 지인들 맛있는 술 사주는 재미도 즐겁고요.


지금 하는 일, '살기 좋고 살고 싶고 정감 있는 아름다운 마을 만들기'는 정말 즐겁습니다. 농·어촌 문제에 관심이 많지요.  제가 촌년이어서인지 더욱 애착이 있습니다. 마을에 대한 컨설팅, 코디네이터, 이런 돈 안되는 일을 조금 더 하면서 가진 재주를 미약하지만 나누면서 살다 가고 싶습니다.


제가 남들보다 조금 더 잘 할 수 있는 일이 자연해설사(에코가이드)라고 보는데  할머니가 되어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니 그런 일을 하다 늙으면 참 좋겠지요."

연대도로 견학 온 행정자치부 공무원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윤미숙 국장.


여태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세 가지를 꼽아보면 무엇인지를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여행 독서 사랑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많은 선각자들이 말해 왔는데 이 셋에 비교적 충실했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나라 안팎으로 다닌 여행과 여태 읽었던 책들을 줄줄이 대다가 끄트머리에 '돈 안 들이고 결혼한 이야기'를 올렸습니다.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20대부터요. 지금도 자주 다닙니다. 국내에서는 전국을 거의 답사했고요, 외국에도 나갔는데 첫 번째 갔던 인도와, 최근에 갔던 쿠바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가장 기억에 남거나 좋았던 책은 나이가 들면서 자꾸 바뀌어요. 책을 좋아하는 습관을 만난 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만큼 고마운 일인 것 같습니다. 이런 유전자를 물려준 부모님께 감사하지요. 충분히 행복한 시간을 돈도 적게 들이고 민폐도 안끼치고 즐길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마흔 무렵에 지금 신랑을 만나 결혼했는데 20만원 정도 들이고 결혼했어요, 이제 십년 차, 만년 주부 초보지요. 그것도 아름다운 수도원 푸른 숲 속에서 흰 수도복이 멋진 수도사의 오카리나 연주, 프랑스식의 짧은 결혼식을 한 것이 기억에 남지요.


옷은 흰 원피스를 빨아서 입고 갔고, 신랑도 입던 옷을 세탁해서 입었고요. 반지 하나씩 주고받았고-그 반지는 몇 년 뒤 가난한 어느 단체에 함께 기부했습니다만-수도원에 부조를 조금 한 것이 전부였으니 정말 신나고 보람찬 혼인식이었어요. 각자 증인으로 사용할 친구 한 사람씩 불렀고요, 부케조차 야생화로 만들었어요.


평생 함께할 친구를 얻는 날이고, 허례허식을 완벽하게 버린 날이어서 정말 유쾌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아이는 안 갖기로 서로 약속했어요. 인구가 이미 너무 많아서 안 보태기로 해서 둘이 살아요.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것을 날마다 실감하고 있지요. 하하."


'착하게 살면 행복하다'가 인생관이라는 윤미숙 국장. 자기가 가진 갖가지 재주를 남을 위해 쓰면 좋고 그것이 일상이 되고 습관이 되면 더욱 좋다고 했습니다. '지나가는 리어카를 보면 반드시 밀어야 하는, 시장 귀퉁이 할매가 들고 나온 호박 두 개는 당장 필요 없어도 사줘야 한다는 강박을 갖는 게 좋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이미 초등학교에서 배운 것, 그것이 사실 전부 아니겠어요?" 그러면서 자기 좌우명도 일러줬다. 듣고 나니 덩달아 웃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제 좌우명은 하루에 몇 번 웃는가, 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이라는 철학이지요. 잘 웃는 편이고, 잘 웃기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씰개'가 없다고들 하지요."


/김훤주

※ 경남도민일보가 펴내는 월간 <피플파워> 9월호에 실린 글을 조금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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