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주(53)씨는 마산·창원 지역 역사학자랍니다. 자기가 사는 지역에 대해 그이처럼 풍부한 지식을 갖춘 사람은 보기 어렵습니다. 그이는 사회운동도 오래 했습니다. 지금도 6월항쟁정신계승 경남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또 걷기 바람이 일기 전인 2000년 '걷는 사람들' 모임을 뜻있는 이들과 만들어 카페(http://cafe.daum.net/mswalker)지기 노릇도 하고 있습니다.

박영주씨는 자기 앞으로 이루거나 가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습니다. 운동을 했지만 세력을 이루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소유 집도 없고 보증금이 몇 천만원씩 내고 전세를 얻은 그런 집에 살지도 않는답니다. 마산의 북카페 '시와 자작나무'가 있는 건물 한 켠이 그이가 혼자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그이는 "지식이나 이념이 아니라 살아가는 자세 또는 태도가 사람으로 하여금 운동을 하게 하는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그이가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이들에게는 이같은 박영주씨의 말이 힌트가 될 수 있겠습니다.

왼쪽이 저고, 오른편이 박영주.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자세·태도

1980년 즈음 군대 가기 위해 회사를 그만둔 때였습니다. 한 선배가, 자기가 방위 복무를 하게 됐는데, 대신 자기 이름으로 자기 회사에 나가 일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이는 남의 이름으로 남의 일을 서너 달 대신해 줬습니다. 나사 공장인데 무척 힘들었습니다. 기름 투성이였고 소음도 심했고 벌겋게 달아오른 쇳조각에 다치기도 많이 했고 철야도 많이 했습니다. 대가는 선배가 받은 자기 월급에서 떼어주는 일부분이 전부였습니다.

왜 그랬느냐는 물음에 그이는 "어리고 순진한 마음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0년 넘게 세월이 흐른 1994년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해부터 가포 바닷가 판잣집에 살게 됐는데, 그 까닭이 이랬습니다.

미술을 하는 후배가 살던 집이었습니다. 창원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돼 거들어주러 판잣집에 왔습니다. 이삿짐을 꾸리고 같이 자는데 후배가 그림이나 도구 따위를 한꺼번에 옮겨갈 수 없어서 걱정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그이는 그러면 살면서 지켜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사를 오게 됐고 후배는 몇 해 동안 두고두고 짐 정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자세 또는 태도는 '어리고 순진한' 시절은 물론이고, '어리지 않고 순진하지 않은' 시절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천성이라 해도 되겠습니다.
또 그이는 무엇이 자기 몫인지를 똑바로 분별할 줄도 안답니다.

2003년 태풍 매미 때 예보를 보니 9월 12일 저녁 태풍 상륙 시간대가 물이 가장 높은 사리였습니다. 그래서 가포 안동네 사람들에게 해일이 오게 생겼으니 대피하라 이르고는 창원 후배 집에 갔습니다. 이튿날 돌아와 보니 그이가 살던 집은 반파돼 있었고 1.5m 낮은 데 있던 집은 자취도 없었습니다.

"사람 목숨 여럿 구한 셈"이라 했더니 "그렇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파악한 상황을 주장했을 뿐"이라 했습니다. 목숨을 구한 것은 그 사람들 스스로의 몫이라는 얘기입니다. 그이는 이렇게 자기가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을 제대로 구분할 줄 알고, 이는 때때로 겸손함으로 비치기도 한답니다.

자기 앞으로는 아무것도 쌓지 않은 운동 인생

어쩌면 이런 자세 또는 태도 때문에 운동을 할 수 있었지 싶습니다. 그이는 대가를 바라지 않았고 자기 앞으로 성과를 쌓지도 않았습니다.

밀양 호박소에서.


"마산공고 3학년 때 실습을 나갔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창원공단에 있던 한국캬브레타에 1978년 들어갔다. 설계실에서 일했다. 회사는 좋았다. 일도 편했고 사람들도 나쁘지 않았고 보수도 셌다. 월급 많기로 이름난 삼성보다 많았다.

가톨릭여성회관 '근로자 연극 동아리'를 동네 선배가 일러줘서 알게 됐다. '불씨 극회'였다. 78년인지 79년인지는 몰라도 날짜는 기억한다. 8월 15일이다. 재미가 있었고 사회적 관념을 형성하게 해 줬다. 조세희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각색도 하고 기획도 했다. 다른 연극에서는 연기도 했지만 <난쏘공>에서는 스태프로 참여했다."

그러다 그이는 부마항쟁에 참여합니다. '불씨 극단'을 알게 해 준 선배가 이번에도 그이를 이끌었다고 합니다.

통영 연대도에서 바퀴를 굴리면 전기가 생기는 자전거를 타고 있는 박영주.


"큰일이 났다고, 경남대학교 앞으로 오라고 연락이 왔어. 그래서 갔다가 더불어 시위를 벌이게 됐다. 정확하게 말하면 휩쓸렸다. 경남대를 거쳐 마산시내로 나가 계속 시위를 벌였다. 이튿날 출근길에 보니 오동동 지금 복개 주차장이 그 때는 바다였는데 거기 지프차가 처박혀 있었다. 10·18 참여는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늦깎이로 1981년 대학에 들어갔습니다만, 3년 뒤 두 번째 제적을 계기로 대학 생활을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게 된 계기가 재미있었습니다.

"친구가 체력장 원서를 대신 접수했다. 체력장은 20점이 만점이고 시험을 안 쳐도 15점을 줬다. '예비고사' 1주일 전부터 공부했다. 수학은 해 봐야 소용없으니 접고 국어 같은 과목을 열심히 했다. 340점 만점에 200점 안 되게 나왔다. 1주일 공부한 점수로는 높은 편이었다. 경남대 경제학과에 원서를 내 합격했는데 들어가니 후회가 됐다. '혼자서 책 읽으면 될 것 가지고 교수가 나와 강의를 하고…….' 게다가 졸업정원제 시행으로 학생들이 엄청 많았다.”

3·15의거 관련 전무후무한 구속 사건의 주인공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이어집니다. “1학년 2학기부터 1년 6개월 동안 방위 근무를 했다. 83년 복학해 유인물을 뿌리고 구속됐다. 3·15의거 관련으로는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없었던 일이다. '3·15 시민봉기 제23주년 기념 성명서'였다. 후배 이재업씨와 탈춤운동을 하던 유경호씨가 함께 했다. 등사기를 돌려 2000장을 만들었다. '3·15의거를 계승하려면 광주 학살 원흉 전두환을 타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3월 15일 새벽, 경남대에는 셋이 같이 뿌렸고 마산과 창원 그리고 창원대는 한 사람씩 맡아 뿌렸다. 마산·창원이 발칵 뒤집어졌다. 며칠 뒤 보고용으로 남겨놓은 7장을 들고 서익진(지금 경남대 교수)·박진해(전 마산MBC 사장)·주대환(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 등 선배를 만나 털어놨다. 선배들은 피하라면서 6만원을 줬다. 곧장 부산에 가 남포동 한 다방에서 부산 사는 후배를 만나는 순간 경찰이 덮쳐 팔을 뒤로 꺾더니 수갑을 채웠다.

경찰은 윗선을 불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선배들 지시를 받기는커녕 의논조차 하지 않았다. 의논이라도 했으면 폭행과 고문 앞에 불 수밖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 선고를 받고 항소심에서는 더 높은 징역 2년이 떨어졌다.

학교서는 이재업과 함께 제적됐다. 상고를 포기하고 아홉 달만에 전두환 정권 학원 자율화 조치로 석방됐다. 1984년 복교를 했으나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곧바로 다시 제적됐다. 학생운동은 정리하고 <마산문화>에 가담했고 이듬해에는 편집장을 맡았다.”

'민노래'라는 낱말을 만들기도 하고

이번 이야기는는 87년 6월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에서 시작합니다.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면 경찰로는 치안을 감당할 수 없게 되고, 경찰이 무너지면 민심이 확 바뀐다. 부마항쟁에서 겪은 일이다. 87년 6월 항쟁에서 시위를 기획하고 홍보와 화염병 제조·보급도 맡았다.

28일 도착해야 할 화염병이 오지 않았다. 점검을 위해 제조 장소에 들어가는데 한꺼번에 들이닥친 백골단에 몽땅 잡혀서 사파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태어나서 가장 많이 맞았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정신을 잃었다. 경찰이 병원에 입원까지 시켰다. 이튿날 경찰이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가는데 보니 집이 있는 북마산 쪽이었다. 걷지도 못하는 사람을 내려 놓고 신문을 주는데, '직선제 개헌'이 적혀 있었다. 노태우의 6·29선언이었다.

곧이어 노동자 대투쟁이 터졌다. 상담은커녕 현황 파악조차 어려웠다. 조직적 대응을 위해 7월 26일 경남노동자협의회를 만들고 '민노래' 보급을 맡았다. 밤새도록 테이프 복사기를 돌려도 모자랐다. '민노래'라는 낱말은 고심 끝에 내가 만들었는데 민중가요라는 말보다 상당히 부드럽고 뜻도 정확하게 전달된다.

88년 문화운동에 들어섰다. 예술을 하는 이들로 하여금 부문별로 조직을 만들게 추동했다. 노래패 소리새벽, 풍물패 베꾸마당, 노동자 문학회 참글, 사진 모임 빛과 힘, 영화 모임 청동 등이다. 무척 힘들었다. 예술인들이 보통 사람보다 까다로운 탓도 있었던 데다가 전체 상황이 민족주의 성향이 짙어져 있지만 적어도 마산·창원만큼은 노동자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키기가 더 힘들었다.

'마산창원노동자문화운동협의회'(마창노문협)를 만들고 초대 의장을 맡았다. 마산창원민족예술인총연합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손을 뗐다. 나는 문화운동을 했지만 예술인이 아니니까."

이런 다음 문창문화연구회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그이는 지역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창원군의 창원시 통합(95년)을 앞두고 94년 말 발행된 <창원군지>에 '근·현대사' 부분을 집필했습니다. 2000년 총선에서 권영길 후보 선거운동을 한 기간과 민주노동당 마산시당 준비위원회 사무국장을 맡은 이듬해를 빼고는 2004년까지 줄곧 문창문화연구회에 몸을 담았답니다.

어릴 적부터 남달랐던 지역에 대한 관심

그이는 지역과 기록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이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이런 관심이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으리라 여기지만, 아니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는 것입니다.

"지역에 대한 관심은 어린 시절부터 있었다. 1977년 고2 때 8·15 광복절 기념으로 마산 골목길 걷기를 했다. 친구 한 명이랑 마산 골목길을 끝에서 끝까지 모두 걸었다. 지역에 대한 관심이, 뚜렷한 형태를 갖추지는 않았지만 어린 시절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대로 1983년에 3.15의거 관련 선전물을 뿌리고 구속된 사건도 마찬가지 지역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도시탐사대 활동 모습.


지역 역사에 대한 첫 기록은 <마산문화>를 통해 이뤄졌다. 편집장을 맡고 있던 85년 발행한 <마산문화>에 실은 '부마항쟁 10·18 마산민중항쟁의 전개 과정'이 그것이다. <창작과 비평> 같은 계간지가 모두 폐간된 상태에서 새롭게 무크(mook=magazine+book)가 등장했고 그 효시가 1982년 창간된 <마산문화>였다. 이전부터 참여는 했지만 본격 활동은 84년부터였다.

그러자 안기부가 압수 수색을 나와 탈탈 털어갔다. 샅샅이 뒤졌지만 얽어넣을 꼬투리가 나오지 않자 '반성하며 앞으로는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라 했다. 보는 앞에서 좍좍 찢었다. 기분이 나빴던지 유언비어 유포 어쩌고 하면서 구류 10일을 살렸다.

2008년에는 <경남지역 6월민주항쟁 자료집 - 항쟁의 시대와 그 기록>(모두 2권)을 만들었고 2009~2010년에는 <부마민주항쟁 증언집 - 마산편:마산, 다시 한국의 역사를 바꾸다>(2011년 발행)를 만들었다. 그런데 '하면 뭐 하나. 그래 봐야 세월이 지나면 잊혀지고 말 텐데' 이런 생각이 찾아왔다. 지금도 그런 바탕 위에는 있다. 물론 운동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대다수는 문제를 모르더라도 누군가가 문제 제기를 해야만 세상이 조금이라도 바뀌고 나아진다는 생각이다."

네팔 여행, 그리고 유라시아 대륙 횡단의 꿈

그이가 네팔 여행 마니아임은 그이를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지금 꿈도 다름 아닌 세계일주랍니다. 어릴 때부터 삶을 지배해온 '로망(roman)'이고 망상(妄想)이라 했습니다. 3년에 걸쳐 북한을 돌파해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이베리아반도의 끝 포르투갈까지 가는 꿈이지요.

네팔 트레킹하면서 찍은 사진 옆에 선 박영주.


"2004년 꿈에 그리던 타클라마칸사막으로 갔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텐진을 거쳐 베이징에 갔다. 5월 2일이었다. 다시 우루무치를 지나 타클라마칸으로 갔다. 불법으로 경계를 넘어 티벳으로 갔다가 네팔로 넘어갔다. 네팔에서 돌아오는데 값싼 노선을 찾아 티켓을 구하고 보니 보름 여유가 있었다. 누군가가 트레킹을 권했다. '산길 걷기'쯤으로 보면 된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했는데, 그 매력에 빠졌다.

앞서 98년 독일에 갔는데 9월부터 12월까지 석 달 동안 네덜란드 덴마크 체코 헝가리 등 동유럽까지 돌아봤지만 여행이라 하기는 좀 어렵다. 2005년 2006년 네팔에 가서 트레킹을 했다. 마지막 네팔 여행은 2011년 다녀왔다. 모두 다섯 차례다."

'자유로움'을 지향하는 한 평생

그이는 자기 삶을 관통하는 핵심은 '자유로움'이라 했습니다. '자유'가 아니라 '자유로움'이라 말하는 데서 이 둘의 차이가 느낌으로 선명하게 다가왔습니다. '자유라는 관념'이 아니라 '자유로운 상태'를 누리고 싶다는 바람이 담긴 듯했습니다.

"나는 평생 자유로움을 추구해 왔다. 자유로움에 대한 추구는 세계와 인간이 부자유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은 조건이자 비극이다. 자유는 개념이 아니다. 실제다. 틀에 매이지 않는 것이다. 살면서 구속이 없을 수 없는데 이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통제를 해야 하는 대상을 많이 버려야 한다. 통제할 거리를 줄이자는 얘기다.

'욕심이나 욕망을 버리자'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신의 경지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욕심이나 욕망에 매이지 말자', 이렇게 생각하며 산다. 여태까지는 세상 눈치를 보며 살아왔다면 앞으로는 자기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구별해 가면서 그에 맞춰 사는 것이다. 지금껏 살아온 내 삶이-그리고 지금 모습이-어떤 의도된 결과는 아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됐다.' 하하."

줄이거나 버려야 할 통제할 거리에는 물론 재산도 포함되고 가족도 포함될 것입니이다. 명예나 권위 또는 권력도 마찬가지 들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이가 버리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자료에 대한 욕심입니다. 지역을 알고 기록을 남기는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김훤주
시내버스타고길과사람100배즐기기경상남도푸근한풍경의공간
카테고리 여행/기행 > 국내여행
지은이 김훤주 (산지니,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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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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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unbee.tistory.com/224 선비 2012.08.16 1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촐해서 차~ㅁ 좋겠습니다.
    나도 빨리 버려야 하는데...

  2. 김종대 2012.08.16 17: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