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총선과 대선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다

김훤주 2012. 3. 3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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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노'인가 '분개'인가


한진중공업 대량 해고와 김진숙 지도위원의 크레인 농성에 대한 침탈 시도, 서민대출기관 미소금융의 부패 비리, 재벌신문 특혜 종편, 한나라당 선관위 디도스 공격,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의 정수재단 소유 논란, 이어지는 주한미군 범죄, 이명박 대통령 아들 내곡동 땅 투기 의혹.

끊이지 않는 저축은행 부실 사태,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기름값·우윳값 등 물가 폭등, 인천공항·KTX 등의 사유화 움직임, 삼성그룹의 계속되는 노조 탄압, KBS 기자의 민주당 회의 도청 의혹, 치솟는 대학 등록금…….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적어봤습니다. 죄다 2011년 한 해에 일어났거나 문제가 됐던 것들입니다. 2011년에도 이렇게 대단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모두 사람들을 분노하도록 만드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2011년 아니라 2010년에도 마찬가지로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고 이들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2011년에는 별나게 '분노'를 중심으로 이런저런 담론이 이뤄졌습니다. 다른 해에는 있지 않았던 일입니다. 이렇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바로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노전사 스테판 에셀(Stephane Eessel)이 쓴 <분노하라(Indignez-vous)>였습니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 거둔 <분노하라>의 성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분노'는 2011년 한 해 동안 가장 눈길을 많이 끌고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린 낱말 가운데 하나가 됐습니다. 그런데 이 분노가 바탕은 우리 말이 아닙니다. 다른 나라에서 하는 말을 우리 말로 옮겼을 뿐입니다. 이 '분노'는 앞에서 말씀드린 책의 프랑스어 제목 <Indignez-vous>에서 왔습니다.

저는 이 '분노'가 가시처럼 목에 걸렸습니다. 제가 알기로 분노는 사리분별이 안 되는 상태입니다. 사리분별이 안 되면 제대로 행동하기가 어렵습니다. 제대로 행동하기 어려운 감정 상태로 가라니 받아들이기 어려웠지요. 

이런 생각을 저 혼자만 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돌베개에서 펴낸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84쪽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분노'인가? 분노(憤怒)란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여 벌컥 성냄이 아닌가? 여기에 번역의 어려움이 있었다. … 사실 이 책의 제목인 명령문 '앵디녜부(indignez-vous)!'를 처음에는 '분개하라!'로 번역하고자 했다.

프랑스어에서 '분노하다'를 의미하는 동사는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 'sindigner'라는 동사의 뜻은 평정을 잃지 않은 채 '분개'하는 쪽에 가깝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정의에 어긋나는 일에 비분강개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적인 원한에 복받쳐 욱하는 것이 아니라 옳지 못한 일에 '의분'을 표출하는 것이다.

다만 원뜻에 좀 더 가깝게 '분개하라'라고 번역했을 때 상황과 맞물리는 호소력이 떨어진다고 보아, 편집부와 상의하여 '분노하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니까 '분노하라'라는 말은 여기서 지은이가 주창하는 사회정의와 공공선의 실현을 위한 정당한 분개, 정의롭지 못한 것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저항해 고쳐야 한다는 당위성 등을 강조하고 그 절실함을 전달하기 위해 선택한 어휘인 셈이다." 좀 길어지기는 했지만, 이것으로 지금 쓰이고 있는 분노가 원래 뜻 그대로 분노가 아님은 뚜렷해졌습니다.

2. 작은 데에는 분개하면 안 되나

그러니까 '분개'를 좀 더 확실하게 전달하려는 뜻으로 '분노'라는 낱말을 썼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물론 국어사전에는 분노나 분개나 거의 같은 뜻으로 풀이해 놓고 있지만 일상에서는 두 낱말의 쓰임새가 많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분개 대신 분노를 쓰고 보니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분노의 뜻이 분개보다 훨씬 강하다 보니 분노는 좀 더 크고 공식적이고 도드라져 있는 데에 쓰이고 일상에서 마주치는 소소한 것들은 묻히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현장으로 이른바 '용산 학살', '쌍용자동차·한진중공업 해고 사태',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따위의 거창한 것들만 꼽힙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사는 일상 언저리에서 손쉽게 마주치는 부조리 같은 것들은 바로 분노(=분개)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충분히 여겨지지 않고 맙니다.

김수영 시인.

물론 이런 현상의 배후에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바로 그런 분노를 전달하고 확산하는 매체가 주로 트위터라는 점도 어느 정도 깔려 있겠지만 말씀입니다. 트위터에서는 전국 규모 쟁점 중심으로 틀이 짜이고 또 트위터 세상을 이끄는 주요 인물 또한 전국 차원에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렇기에 일상 언저리가 묻힐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셈입니다.

분개와 분노의 차이를 우리 시인 김수영은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수영이 1965년 쓴 시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전문입니다. 여기에서 김수영이 '분개' 대신 '분노'라는 낱말을 썼다면 무척 우스워졌으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 수용소의 제십사 야전 병원(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 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김수영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분개를 말하고 저항을 했습니다. 제대로 분개하지 못한다고 말함으로써 제대로 분개했고 옹졸하게 반항한다고 말함으로써 제대로 저항했습니다.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을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했다고 말함으로써 바로 그 자유를 이행했습니다.

박정희가 총칼로 짓누르던 당시 상황 탓에 김수영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수영은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으며 그렇게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짓이라고 알고 있다고 내뱉음으로써 절정에 섰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것들의 상징인 모래와 바람과 먼지와 풀에게 "나는 얼마큼 작으냐"고 물음으로써 매우 커지게 됐습니다.

저는 김수영의 이 시를 조금 거꾸로 읽습니다. 40년 넘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시대가 그만큼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커다랗고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만 분개하거나 분노하면 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분개하거나 분노할 수 없게 만드는 정치권력에 대해 보이거나 보이지 않게 분개하거나 분노하면 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일상에서 부딪히는 조그마한 것들에 대해서도 분개하거나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분개 또는 분노의 대상이 옛날과 마찬가지로 정체를 뚜렷하게 나타낼 때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은 정체를 가리고 곳곳에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40년 전보다 엄청나게 복잡해진 결과입니다. 

미국 99%의 시위. 뉴시스 사진

 3. 프랑스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의 개혁안

프랑스의 노전사 스테판 에셀은 이렇게 말합니다. "프랑스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가 하나의 개혁안을 짜서 1944년 3월 15일에 채택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개혁안이 제안한 것이 향후 나치로부터 해방된 자유 프랑스(La France libre)가 지켜나갈 원칙과 가치, 곧 프랑스 현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될 가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것이 이러한 원칙과 가치들이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사회가 자랑스러운 사회일 수 있도록 그 원칙과 가치들을 다 같이 지켜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른바 '불법체류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기존 성과를 문제 삼는 사회, 언론 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 결코 이런 사회가 되지 않도록.(10쪽)"

"1945년부터 프랑스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 내에 존재하는 세력들은 야심찬 부활을 위해 전력투구했다. 돌이켜보자. 레지스탕스가 바라던 사회보장제도가 바로 이 시기에 구축되었다. 레지스탕스의 개혁안이 명시한 바는 '모든 시민에게, 그들이 노동을 통해 스스로 살길을 확보할 수 없는 어떤 경우에도 생존 방도를 보장해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회보장제도의 완벽한 구축, 늙고 병든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삶을 마칠 수 있게 해주는 퇴직연금제도'였다.

각종 에너지원, 전기와 가스, 탄전(炭田), 거대 은행들이 국영화되었다. 이 역시 레지스탕스의 개혁안이 권장한 바였다. 또한 이 개혁안은 '공동 노동의 결실인 대표적 생산수단-에너지원, 지하자원, 보험회사, 거대 은행들-을 국가로 복귀시키는 것', '경제계·금융계의 대재벌들이 경제 전체를 주도하지 못하게 하는 일까지 포함하는 진정한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 정립' 같은 것들도 권고했다. 특정인의 이익보다 전체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며, 노동계가 창출한 부를 정당하게 분배하는 일을 금권(金權)보다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레지스탕스가 제안한 것은 '파시스트 국가들의 모습을 본떠 구축된 전문적 독재에서 놓여난, 일반의 이익을 특정인의 이익보다 확실히 존중할 합리적인 경제조직'이었다. 그리고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는 이 제안을 넘겨받아 추진했다.(11쪽)"

4.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

프랑스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는 우리로 치자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해당될 것입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독일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것처럼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웠습니다. 또 프랑스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가 개혁안을 만들어 나치로부터 해방된 자유 프랑스가 지켜나갈 원칙과 가치를 밝힌 것처럼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건국강령을 만들어 일제에서 해방된 대한민국이 지켜나갈 원칙과 가치를 밝혔습니다.

프랑스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의 개혁안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에 나오는 개혁안 내용에 비춰 볼 때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조금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겠는데 그것은 아마도 저마다 놓여 있는 자리가 서로 다르다는 데서 오는 필연 정도로 여겨집니다.

1941년 11월 처음 만들어진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간추려 보겠습니다. △건국 정신은 삼균제도(三均制度)에 역사적 근거를 두었으니 사회 각층의 지력(智力)과 권력과 부력의 가짐을 고르게 하여 국가를 진흥하며 태평을 보전·유지하려 함이다. △우리나라의 토지제도는 국유의 유법을 두었으니 이는 문란한 사유제도를 국유로 환원하라는 토지혁명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은) 민족의 힘으로써 이족(異族=일본) 전제를 전복하고 5000년 군주정치의 허울을 파괴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건립하여 사회의 계급을 없애는 제일보의 착수였다.

이런 원칙에 따라 ▲토지·대생산기관의 국유화 ▲학령 아동 전체에 대한 고등교육의 면비수학(免費修學) ▲적산(敵産=일본 재산) 몰수와 국유화 ▲몰수 재산은 빈공(貧工)·빈농·무산자의 이익을 위한 국영·공영 집단 생산기관에 충당 ▲노공(老工)·유공(幼工)·여인의 야간노동과 연령·지대(地帶)·시간의 불합리한 노동 금지 ▲농공인 면비의료(免費醫療)로 질병 소멸·건강 보장 등을 밝혀 놓았습니다.

정부 구성은 보통선거로 하게 했습니다. 선거권은 만 18세 이상 남녀에게 모두 주어졌고 피선거권 또한 만 23세 이상 남녀에게 모두 주어졌니다. 12세 이하 초등기본교육과 12세 이상 고등기본교육에 관한 일체 비용은 국가가 부담하고 의무로 시행한다는 규정도 있습니다. 신체와 거주, 언론, 저작, 신앙, 집회, 결사, 여행, 시위, 운동, 통신 등의 자유 보장은 기본입니다.

어떠신지요? 저절로 분개(=분노)가 되지 않으시는지요? 국유화는 어쩌면 지나치게 크고 복잡한 사안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잠깐 옆으로 젖혀놓더라도, 1940년대에 이미 무상(=면비)의료를 규정하였는데도 아직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뤄지기는커녕 의료 부담은 갈수록 늘어나고 자본과 권력은 의료기관 영리 추구까지 보장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무상교육(=면비 수학)은 어떻습니까? 모든 학령이 아닌 초등학교 전면 무상급식조차 실현되지 않고 있으며 이같은 전면 무상급식을 주장하면 마치 사회를 좀먹는 암적 존재로 몰아가는 정치인과 언론이 판을 치는 대한민국입니다.

5. 프랑스 개혁안과 우리나라 건국강령의 다른 운명

제대로 된 분개 또는 분노가 프랑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가까운 역사에도 있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독일 강점 아래서 자유 프랑스를 위해 싸운 노전사 스테판 에셀이 아니라도 분개와 분노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 아래에서 조선 해방을 위해 풍찬노숙을 하며 고군분투한 우리나라 노전사도 같은 말을 하고 같은 계획을 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에서 프랑스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가 70년 전에 구축한 개혁안을 돌이켜 봅니다. 그러고는 프랑스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의 개혁안이 1945년 이후 실행되어 왔으나, 신자유주의가 넘실대는 요즘은 그렇지 않게 바뀌어 가는 사정을 일러줍니다.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에서 언론 자유와 평등 교육 두 가지를 보기로 들었지만 어디 둘뿐이겠습니까? 다른 많은 것들도 비슷한 상황이라 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12쪽입니다.

"진정한 민주주의에 필요한 것은 독립된 언론이다. 레지스탕스는 이 사실을 알고 강력히 요구했으며 '언론의 자유, 언론의 명예, 그리고 국가, 금권, 외세로부터의 언론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레지스탕스에 이어 1944년부터 각계각층이 언론에 대해 줄곧 주장해 온 바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바로 이 '언론의 독립'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레지스탕스가 호소했던 바는 어떤 차별도 없이 '프랑스의 모든 어린이가 가장 발전된 교육의 혜택을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2008년 실시된 개혁은 레지스탕스의 이 생각에 역행하는 내용이었다."

그런 다음에 70년 전 개혁안이 지금도 여전히 분노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레지스탕스가 사회적으로 얻은 성과의 토대 그 자체인 것이다"라고 잘라 말합니다.

우리는 나라를 새롭게 세우는 과정에서 건국강령을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나라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싸운 전사들은 대부분 최후가 아름답지 못하고 비참했으며 그이들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꿈꿨던 새로운 세상,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합의됐던 원칙과 가치는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프랑스와 대한민국이 다른 점입니다. 프랑스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 개혁안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 강령의 다른 운명입니다.

이런 차이는 또 다른 차이를 낳았습니다. 프랑스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의 개혁안은 지금도 여전히 널리 알려져 있고, 그래서 현실에 미치는 영향도 여전히 엄청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은 거의 잊혀져서 현실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은 70년 전에 발표된 것임에도 아직 실행되지 못한 대목이 많습니다. 1944년 당시의 세계 조류와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의 보편적 인식이 건국강령의 토대가 됐을 텐데, 2012년을 사는 후손들이 아직 이것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건국강령(개혁안)이 완성되지 않은 사정은 프랑스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건국강령을 한 번도 실행해 보지 못한 채 떠밀려 가고 있다면 프랑스는 개혁안을 실행해 봤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아무래도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때문이겠지요.

스테판 에셀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2004년 3월 8일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분명 '레지스탕스에 동참한 형제자매들의 희생과 파시즘의 야만에 맞선 여러 나라의 단결 덕분에 나치즘은 궤멸되었다. 그러나 그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불의에 맞서는 우리의 분노는 여전히 그대로 살아 있다'고. 그렇다, 그 위협은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輕視),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39쪽)"

스테판 에셀은 아울러 프랑스 대혁명의 기본 정신인 자유·평등·박애를 분노의 기준으로 제시했습니다. 세상이 복잡해져서 분노해야 하는 이유를 한 눈에 알아채지 못할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식별할 수 있는 커다란 도전 두 가지를 밝혔습니다. "첫째,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 사이에 가로놓인, 점점 더 커져만 가는 격차. 둘째, 인권, 그리고 지구의 현재 상태.(22쪽)"

이 두 가지가 자유·평등·박애를 가로막고 해치며, 그래서 이 두 가지에는 분노하고 저항해야 한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저는 앞에서 말씀드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도 이와 똑같은 가치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아닌 것인지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이 여전히 되고 있습니다.

6. 무관심이 최악이기는 하지만

스테판 에셀은 "나는 언제나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편에 서왔다"(50쪽)고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스테판 에셀이 말하는 분노(=분개)는 바로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항과 참여는 바로 그 '아닌 것'을 바로잡는 행동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나 분노하고 저항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테판 에셀은 이렇게 말합니다.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다.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22쪽)"

스테판 에셀은 분노의 이유를 찾으면 찾아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제발 좀 찾아보시오. 그러면 찾아질 것이오'라고.(21-22쪽)" 26쪽에도 비슷한 발언이 되풀이됩니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이렇게 찾는 것만으로 충분한지는 몰라도 우리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저는 봅니다. 찾아도 구하지 못할 수도 있고 찾아도 제대로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눈에 콩깍지가 씌어 있거나 썩은 명태 껍질이 덮여 있다면 아무리 봐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7. 분노(=분개)는 아무나 하나

저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주류 논리에 휘둘리지 않아야 제대로 보고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 주류 논리는 욕심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남들보다 잘 살아야 한다는 욕심, 아니면 최소한 남들만큼은 제대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욕심, 자기 자식만큼은 좋은 대학에 보내고 싶다는 욕심, 자기 자식만큼은 제대로 된 직장에 다녀야 한다는 욕심, 이런 것들 말씀입니다.

수능 시험을 치는 학생들 모습.

이런 욕심을 가만 들여다보면, 생각과 가치가 획일화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 마음 속에 들어가 보지 않아도 대충 짐작이 됩니다. 좋은 대학이 무엇인지도 마찬가지이고 제대로 된 직장이 무엇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과 성적 상위권 학생이 들어가는 대학이 좋은 대학이고 보수가 많고 잘릴 위험이 적은 직장이 좋은 직장입니다. 다른 가치관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획일화된 생각과 가치, 그리고 그에 바탕을 둔 욕심이 무한 경쟁을 만들고 부추깁니다. 많은 사람들은 공교육이 무너지는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정작 그렇게 무너지게 만드는 사교육에 다른 한편으로는 열성입니다. 공교육인 정규 학교 선생님은 자기 자식을 때리면 항의하지만 사교육인 학원 선생님에게는 성적이 나쁘면 때려서라도 올려달라고 사정하는 학부모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른바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위한 정당한 노력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들 다 자식 사교육을 하는데 어떻게 자기 자식에게만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남들보다 잘해야 한다는 취지가 아니고 남들보다 처지지는 않아야 한다는 취지로 사교육을 시킨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 모두 학원에 가는 현실에서 자기 아이만 가지 않으면 외톨이가 된다고도 말합니다. 물론 모조리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과 행동이 바로 사교육을 지탱하고 있다는 점까지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교육만 봐도 이렇습니다. 다른 영역으로 눈을 돌리면 또 다른 욕심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 욕심이 얼핏 보면 자기자신에게서 말미암은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우리 사회, 우리 사회의 주류 논리에 지배당하고 휘둘린 결과일 따름입니다. 개인으로 보자면,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해 번 돈으로 결국은 사교육 장사꾼들 돈벌이를 시켜주는 꼴입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얻는 보람이라도 누리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른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1%나 5%는, 사회 전체로 보면 이미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류 논리 가운데 또 하나 말씀드릴 것은 바로 '편리할수록 더 좋다'는 생각입니다. 사람이 편리해지려면 소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것이 에너지가 됐든 물건이 됐든 서비스가 됐든 쓰는 것이 많아지면 그 사람은 더욱 편리해집니다. 그러고 보면 이 또한 우리 개개인의 욕심을 바탕으로 삼고 있는군요. 어쨌거나 우리 사회 주류 논리는 사람들 머릿속에 편리할수록 더 좋다는 생각을 집어넣어 대량 소비를 부추깁니다. 그리고 대량 소비를 통해 거대 자본은 엄청난 이윤을 누립니다.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당시 모습.

2011년 3월 11일 터진 일본 동북부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편리할수록 더 좋다는 논리가 거짓임을 보여줬습니다. 좀 더 편리해지려고 원자력 발전을 했는데 그 원자력 발전소가 감당할 수 없는 재앙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를테면 '편리할수록 재앙이 가까이 있다'가 되겠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원자력과 원자력의 위험에 대해 민감하지 못합니다. 편리할수록 더 좋다는, 편리함에 더 가치를 두는 주류 논리에 대다수 사람들이 그대로 휘둘리기 때문입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게 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닌 것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됩니다. 원자력? 문제가 있는 줄은 알지만 우리가 세상을 편리하게 살려면 어쩔 수 없잖아? 사실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 이처럼 '편리할수록 더 좋다'는 주류 논리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터무니없는 논리에 휘둘리고서는 아닌 것을 아닌 것으로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사교육과 원자력만 본보기로 들었지만 사실은 모든 영역에서 크고 작은 장사꾼들이 무한경쟁의 길목마다 사람들 목에 꽂을 빨대를 든 채 지키고 있습니다. 무한 경쟁에 지친 이들을 위한 쉼터에도 크고 작은 장사꾼들이 설칩니다. 여행과 같은 건전한 쉼터도 있고 룸살롱 같은 그렇지 않은 장소도 있습니다. 거대 자본은 이런저런 장사꾼들을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어서 이윤을 뽑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권력은 이를 법률과 제도로 보장해 줍니다.

핵발전소에 들어가는 열교환기.

8. 자유로운 사람만이 제대로 분노(=분개)할 수 있다

좋은 대학이란 교과 성적 상위권 학생이 들어가는 대학이 아니고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는 대학이라고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 대학에 들어가지 않고도 인생을 충분히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제대로 된 직장이란 보수가 많고 잘릴 위험이 적은 직장이 아니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재미나게 할 수 있는 직장이라고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직장에 들어가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스스로 창업하는 방안도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편리하지 않을수록 더 좋다는 생각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편리하지 않게 살수록 좀 더 즐겁고 보람있고 인간적으로 살 수 있다고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편리함이 앗아가는 것이 그에 맞먹는 비용의 지출 말고도 많이 있다는 데에도 고개를 돌릴 줄 알아야 합니다. 편리함을 좇는 과정에서 석유나 가스 같은 에너지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인간 관계까지도 사라진다는 데에도 눈길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수능 시험 문제지. 어쩌면 이것 또한 욕망의 덩어리입니다.

이렇게 주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휘둘리면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지 못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닌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문제가 심각한 사교육도 원자력 발전도 아닌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부작용(副作用)이 있을 뿐이고 그 부작용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좋은 효과를 내는 주작용(主作用)에 필수로 따를 수밖에 없는 그 무엇으로 파악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고 우리 사회 주류 논리에 휘둘리지 않아야 '분노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자유(自由)로운 사람만이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유, 한자말을 풀어보면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물이 아니고 스스로[自]에게서 말미암는[由] 것입니다. 주류 논리에 휘둘리는 사람은 자유가 아닙니다. 주류 논리에 기반을 제공해주는 욕심에 휘둘리는 사람도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롭지 않은 사람은 자기 머리로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눈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 손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예외가 없지는 않지만-말하자면 자기 자신이 지배집단에 편입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결국은 우리 사회 지배 집단에게 좋은 일만 시키고 사라져 갑니다.

스테판 에셀은 변화의 근본을 '분노'에서 찾고 있습니다. 제대로 분노해야 세상도 제대로 바뀐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제대로 분노하려면 분노하는 주체인 사람이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사람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는 얘기를 하는 셈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올해 예정돼 있는 4·11 총선과 12·17 대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수당을 소수당으로 만들고 소수당을 다수당으로 만드는 일은 작은 일일 뿐입니다. 대통령 선거를 통해 한나라당에 주어져 있는 정치권력을 다른 정당이 갖도록 하는 일 또한 크지 않고 작은 일입니다. 총선과 대선을 통해 그런 정치적 변화가 생기더라도, 그 의미가 실제로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주류 논리에서 얼마나 벗어나고 욕심에서 얼마나 벗어나는지에 따라 달라지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오늘의 문예비평> 2012년 봄호에 '제대로 된 분노의 기준과 조건'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저도 이렇게 길고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오늘의 문예비평 쪽의 주문이 200자 원고지 70장 이상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양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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