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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낙동강 비리길 팽개치면 직무유기다

김훤주 2011. 12. 2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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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남지뿐 아니라 의령에도 낙동강 비리길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썩 괜찮은 길입니다. 지정면 유곡리 백산마을에서 성산마을까지 5km남짓 거리입니다. 백산마을 들판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자기가 여기 시집 온 지 50년이 넘었는데, 옛날에는 이 비리길을 통해 창녕 남지장(2·7일)을 보러 다녔다고 했습니다.

할머니의 젊은 시절 장 보러 가는 길은 이랬을 것 같습니다. 먼저 장닭이나 푸성귀처럼 내다 팔 물건을 쟁여서 지거나 입니다. 다음 낙동강을 따라 열려 있는 비리길을 탑니다. 성산마을 와서는 기강(岐江=거름강)나루에서 강을 건너 동쪽 창녕군 남지읍 용산마을로 들어갑니다. 다시 들판을 가로지르고 학계마을을 지나 남지장에 듭니다. 아침에 이렇게 갔다면 점심이나 저녁 때는 간 길을 되짚어 나오기 마련이겠습니다.

며칠 전 바람이 세차게 불던 날 똥금이 된 배추를 뽑아 자식 주려고 갈무리하던 이 할머니는 "아직 길이 남아 있나요? 한 번 가 보고 싶어서요……"라는 물음에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머 할라꼬?" "그냥요." "길이야 있지만 다니기 어려울거로? 새가 우거지서……." '새'는 풀을 뜻하는 토종말이랍니다.

고개마루룰 넘으면서 버스에서 내다본 백산마을과 낙동강. 강물이 한 뼘쯤 보입니다.


나흘이 지난 12월 20일 다시 나섰습니다. 합성동 마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림면 소재지 신반마을 가는 버스를 10시 50분에 집어탔습니다. 거기 밥집 '민들레 선지국'에서 점심을 먹고는 백산마을행 농어촌버스를 기다렸습니다.


이 버스는 출발 시각인 오후 1시보다 10분 늦게 나타났습니다. 버스는 박진을 거쳐 산을 하나 비스듬히 넘더니 백산에서 멈춰섰습니다. 15분 남짓만입니다. 종점 양동마을을 하나 앞둔 지점이었는데, 저로서는 의령 낙동강 비리길을 찾아가는 첫걸음이었지요.

제방 위에 나 있는 길.


마을을 지나 제방에 올라 남쪽으로 낙동강 물길 흐름을 따라 발길을 놀립니다. 머리에 자동차 한 대 다닐만한 너비로 난 길을 이고 있는 제방은 얼마 안 가 끊어졌습니다. 그런데 길까지 바로 끊어지지는 않았답니다. 흙으로 바뀐 길은 조금씩 허물어진 채 낙동강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길은 같은 너비로 이어지다가 콘크리트로 만든 재실 같은 건물 있는 데서 멈췄습니다. 길은 여기서 대숲을 만나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정도로 좁아집니다. 맞은편에서 사람이 온다면 비켜가기도 어려운 너비입니다.

여름이나 가을이면 도저히 걸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겨울을 맞아 길을 덮었던 풀과 떨기나무들이 잎을 떨어뜨렸기에 열린 셈입니다.


그래도 사람이 계속 다닌 자취는 뚜렷했습니다. 좁고 때로는 가파르기까지 한 데다 초목이 가로막기조차 했지만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답니다. 물론 때때로 길을 잃기도 했습니다. 잃은 길을 찾으려고 강물 쪽으로 내려가면 어김없이 길은 끊어졌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비탈로 올라서면 사라진 길이 나타났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좀 에두르더라도 안전한 길을 확보하려 했나 봅니다. 강가로 내려가는 길은 물이 불어나면 언제든 끊어질 수 있다는 약점이 있기 때문이겠습니다.

길을 위해 돌을 쌓은 자취가 이런 데서 묻어납니다.


비탈에는 소나무와 참나무 팽나무 은행나무 같은 것들이 장하게 자라 있습니다. 자기네들 뿌리내리고 있는 데가 사람이 손대기 어려운 지경이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사이로 떨기나무나 덩굴나무가 있었으나 잎이 진 덕분에 낙동강을 눈에 담기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응달이라 서리가 녹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대숲을 만났습니다. 대숲을 끼고 오른쪽으로 도니까 감밭이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농사지으러 여기까지 온다는 얘기겠지요. 아니나 다를까, 낫으로 나무를 찍어서 열어놓은 길이 있었습니다. 바로 성산 마을로 나가는 길목입니다. 시각을 확인하니 4시가 다 돼 있었습니다.


마산으로 가는 버스는 3시 10분 즈음에, 신반으로 들어가는 버스는 3시 40분 즈음에 성산마을 정류장에 들른답니다. 이미 이것들을 타기는 어렵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마산 나가는 6시 50분 즈음 버스만 남은 셈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정류장 앞 구멍가게에서 요기를 하고 막걸리 따위로 몸을 데울 수 있다면 끝까지 기다려서라도 막차를 타고, 그렇지 않으면 택시를 불러 타고 나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구멍가게서는 담배 말고는 파는 물건이 거의 없었습니다. 흔한 컵라면조차 없었습니다. 술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깡술'을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구멍가게 아주머니는 같은 의령의 신반보다 함안 대산 택시를 부르는 편이 낫다고 일러줬습니다. 택시를 불렀더니 10분 남짓 걸려 왔습니다. 비상금 1만 원을 털어 주고 대산 내릴 때 보니 5시 15분이었습니다. 10분 뒤 함안과 마산을 잇는 113-1번 시내버스가 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이 비리길을 되살려 보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을 걸으면서 옛날 사람들 5일장을 중심으로 모이고 흩어졌던 세상 사는 방식을 되씹어 볼 수도 있겠지요. 또 솔숲을 거닐면서 건강을 챙길 수도 있겠지요.


이에 더해 이 비리길 둘레를 간벌하고 조금만 다듬으면 널리 알려진 남지 개비리길보다 더 좋은 길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낙동강 바라보는 전망도 훨씬 더 좋아질 것 같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보는 낙동강 자태는 매우 의젓했습니다.


게다가 길이 끝나는 성산마을의 기강나루(남강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는 역사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매우 뚜렷하답니다. 의병장 곽재우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5월에 여기서 왜적의 척후선을 격침하고 첫 승리를 일궜습니다.

강바닥에 나무를 박고 그 나무를 밧줄로 엮어 적선을 꼼짝할 수 없게 만든 다음 화살 공격으로 상대를 해치웠다고 합니다.


그런 덕분에 여기 들머리에 곽재우의 기강 전투 승리를 기리는 보덕각이 있습니다. 기강 전투는 그 자체로만 보면 조그맣습니다. 하지만 이 승리가 없었다면 의병장 곽재우가 존재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이어지는 의령 들머리 정암진 전투 승리도 없었으리라 잘라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암진 전투는 왜적이 뭍으로 전라도 곡창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낸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기강 전투에서 이기는 바람에 의병에 대한 사람들 생각이 달라져서 곽재우 휘하 의병이 이전보다 네 배 가까이 늘어났고 이것이 바로 정암진 전투 승리의 밑거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덕각 옆에는 임진왜란 당시 마진 전투에서 숨을 거둔 의병장 손인갑·약해 부자를 기리는 쌍절각도 있습니다. 이런 유적과 비리길을 잘 연관지으면 스스로를 '충의의 고장'으로 내세우는 의령군으로서는 위상이 한 단계 더 높아질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걸어보시라 권해도 좋을 만큼 잘 다듬어져 있는 그런 길은 아닙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러 사람이 함께 숨쉬는 그런 길로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민간 차원에서든 아니면 자치단체 차원에서든 누구라도 시작하면 곧바로 성과를 낼 수 있는 그런 길이라 여겨졌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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