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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양의 화림동은 이미 잘 알려진 골짜기입니다. 물도 풍성하고 바위들 하얀 빛도 대단하고 둘러싼 산과 들도 빼어납니다. 옛날 사람들은 여기다 정자를 앉혔습니다. 선비들은 여기서 웃고 마시고 얘기하고 노래부르고 시를 지으며 놀았습니다. 화림동(花林洞)도 이들이 붙인 이름이겠지요.
꽃 피는 봄에 오면 화림동이 화림동인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꽃 피는 봄에만 아니고 네 철 모두 아름다우니 양반들이 지은 정자가 모두 여덟이나 됐답니다. 팔담팔정(八潭八亭)이라 하지요. 여울져 흐르던 물이 잠시 머물러 풍경을 자아내는 웅덩이 여덟 개마다 정자를 들여앉혔습니다.
지금은 거연정(居然亭)과 군자정(君子亭)과 동호정(東湖亭)만 남았습니다. 셋 가운데 가장 위쪽 거연정에서 걸음을 시작했습니다. 9월 21일 오후 2시 함양버스터미널에서 서상 종점으로 가는 버스를 3000원 내고 타고 가다 45분 남짓 걸려 봉전(우전) 마을 들머리에 내렸습니다.
오늘이 10월 9일이니 대략 20일 정도 전에 다녀왔습니다. 그 때는 나뭇잎이 푸른 가운데 살짝 단풍이 들려는 기색을 보이는 것들이 드문드문 띄었는데, 지금 찾아가면 막 시작하는 단풍을 눈에 담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
가는 길에 버스를 타고 보는 함양 풍경도 괜찮았습니다. 곡식 익어가는 들판 가장자리를 따라 두렁콩은 나지막하게 아직 푸른 빛이었습니다. 길가에 심긴 여러 꽃들도 그럭저럭 자연 풍경과 어울려 그럴 듯한 느낌을 뿜었습니다.
버스 기사와 손님들 사이에는 친절을 넘어서 친근이 흐릅니다. 서로 얘기와 낯빛을 주고받는 품이 도시 지역 버스들과는 사뭇 다르답니다. 열댓 남짓 탄 손님 가운데 누구도 어디서 내려달라거나 벨을 누르거나 하지 않았는데도 버스는 정류장에 멈춰 섭니다. 그런 다음에야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느릿느릿 일어나 버스에서 내립니다.
친근 모드는 손님이 탈 때부터 느껴집니다. 요금이 거리에 따라 제각각 다른데도, 손님이 어디까지 간다 말하지 않아도 기사는 묻지도 않고 알아서 거스름돈도 내어줍니다. 이렇게 동전을 주고받으면서 손님과 기사는 무심한 듯 툭툭 던지는 한두 마디로 안부까지 챙깁니다.
거연정은 바로 아래 군자정이나 좀더 아래 동호정과 마찬가지로 도드라져 있지 않습니다. 자연석 위에 일부는 주춧돌을 깔고 기둥을 세운 다음 건물을 세우고 지붕을 올렸습니다. 이런 정자를 둘레 우람한 나무들이 감싸고 덮습니다.
아래에는 물길이 이모저모 조각을 새겨넣은 바위들이 제법 하얗고 가볍게 빛납니다. 위쪽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줄을 이어 섰고 한 쪽 물은 촬촬촬 소리내어 흐르고 다른 한 쪽은 고요히 고여 있는데 그 푸른 빛 때문에 깊이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거연정은 바깥에서 보는 모습도 괜찮지만 정자에 올라 내다보는 눈맛이 더없이 상큼하답니다. 아래로 내려가 개울 건너 맞은편에 섰습니다. 전봇대 아래 자리잡고 앉아 거연정과 바위와 물과 위쪽 산을 10분 정도 쳐다보다 길을 걷습니다.
걷는 길은 전북 장수로 넘어가는 육십령 국도 건너편 비탈을 따라 나 있습니다. 나무 데크도 깔렸고 흙길도 나옵니다. 철이 바뀐 덕분도 있지만 빠르게 걷는데도 땀이 나지 않습니다. 함께 내려가는 개울물에서 시원한 기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길은 왼편으로도 꽤 많은 나무를 거느려 때로는 골짜기가 눈에 잘 들지 않습니다. 그러다 그런 나무 사이로 군자정을 찾아내고 동호정을 알아보는 재미가 숨어 있습니다. 물론 몰라보고 가다가도 시야가 트이는 데서는 절로 알아볼 수 있으니 신경은 쓰지 않아도 된답니다.
동호정 있는 데서 초행길 사람들은 잠깐 헤메기도 한답니다. 흙길이 끊어지고 징검돌을 따라 개울로 들어가는데, 징검다리 가운데가 건너기 어렵게 돼 있습니다. 아무래도 좀 손질하면 좋겠다 싶은데, 어지간한 사람들은 대부분 신발을 벗고 맨발로 물에 들어가 건넌답니다.
건넌 다음에는 아래쪽 솔숲으로 향합니다. 분위기가 그윽한 솔숲을 세로지르면 다시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개울을 끼고 숲을 지나면 이번에는 나락이 누렇게 고개를 숙인 들판과 불그스럼한 사과를 매단 과수원이 나타납니다.
과수원은 새들의 틈입이 두려운지 그물을 뒤집어썼습니다. 논들은 큼지막한 넓이로 입체감 있게 층층이 늘어서 있습니다. 길을 걸으며 바라봐서 그런지 느낌이 차 타고 볼 때보다 훨씬 푸근하고 풍성합니다.
호성 마을을 지나서까지 줄곧 개울을 왼편에 두고 걷다가 밤밭을 만나거든 바로 왼편으로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잘못해서 밤밭으로 들어갔다가는 땅바닥에 떨어진 밤톨들 탐스러운 모습에 견물생심이 될는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는 밤 한 톨이지만 농사짓는 이에게는 수백 수천 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음에는 아스팔트 도로를 버리고 곧바로 제방을 타는 편이 낫습니다. 제방길은 들판과 개울을 양쪽으로 거느립니다. 여기 걷다가 한 번 돌아보면 산들이 골짜기와 사람을 통째로 감싸준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 느낌을 햇살 아래 누리다 보면 길은 어느덧 농월정으로 이어집니다.
새로 난 국도 덕분에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아스팔트 옛길에는 농월정 내려가는 통로가 여럿 있습니다. 사실 지금은 농월정이 없습니다. 2003년 10월 5일 저녁 불에 타 사라졌습니다. 농월정 있던 자리가 대충 짐작이 됐습니다. 말끔하고 널찍하고 매우 커다란 너럭바위 뒤쪽 산비탈에 주춧돌로 썼음직한 자연석이 여럿 널려 있는 데랍니다.
달과 더불어 논다는 농월정(弄月亭)은 자연 환경에 묻혀 있는 거연정·군자정·동호정과 달리 탁 도드라져 나와 둘레를 제압하는 듯했었습니다. 바로 아래 월연암(月淵岩)이라 이름붙은 커다란 너럭바위를 독차지할 기세로 우뚝 솟아 있었습지요.
한참을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습니다. 저녁 약속만 없으면 퍼질러 앉아 30분이라도 놀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바위와 물이 어울리는 풍경이 끝나고 가게와 밥집이 늘어선 거리가 나옵니다.
한적한 주차장을 가로지르고 도로를 건너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서하에서 5시 38분 출발한 버스(2400원)를 5시 48분에 받아타고 도로 나왔습니다. 안의로 나오는 도로는 양쪽으로 피어 있는 코스모스꽃이 멋졌습니다. 여럿이 거닐면 더욱 멋질 것 같다는 생각이 깊이 들었답니다.
김훤주
꽃 피는 봄에 오면 화림동이 화림동인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꽃 피는 봄에만 아니고 네 철 모두 아름다우니 양반들이 지은 정자가 모두 여덟이나 됐답니다. 팔담팔정(八潭八亭)이라 하지요. 여울져 흐르던 물이 잠시 머물러 풍경을 자아내는 웅덩이 여덟 개마다 정자를 들여앉혔습니다.
지금은 거연정(居然亭)과 군자정(君子亭)과 동호정(東湖亭)만 남았습니다. 셋 가운데 가장 위쪽 거연정에서 걸음을 시작했습니다. 9월 21일 오후 2시 함양버스터미널에서 서상 종점으로 가는 버스를 3000원 내고 타고 가다 45분 남짓 걸려 봉전(우전) 마을 들머리에 내렸습니다.
오늘이 10월 9일이니 대략 20일 정도 전에 다녀왔습니다. 그 때는 나뭇잎이 푸른 가운데 살짝 단풍이 들려는 기색을 보이는 것들이 드문드문 띄었는데, 지금 찾아가면 막 시작하는 단풍을 눈에 담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
가는 길에 버스를 타고 보는 함양 풍경도 괜찮았습니다. 곡식 익어가는 들판 가장자리를 따라 두렁콩은 나지막하게 아직 푸른 빛이었습니다. 길가에 심긴 여러 꽃들도 그럭저럭 자연 풍경과 어울려 그럴 듯한 느낌을 뿜었습니다.
버스 기사와 손님들 사이에는 친절을 넘어서 친근이 흐릅니다. 서로 얘기와 낯빛을 주고받는 품이 도시 지역 버스들과는 사뭇 다르답니다. 열댓 남짓 탄 손님 가운데 누구도 어디서 내려달라거나 벨을 누르거나 하지 않았는데도 버스는 정류장에 멈춰 섭니다. 그런 다음에야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느릿느릿 일어나 버스에서 내립니다.
친근 모드는 손님이 탈 때부터 느껴집니다. 요금이 거리에 따라 제각각 다른데도, 손님이 어디까지 간다 말하지 않아도 기사는 묻지도 않고 알아서 거스름돈도 내어줍니다. 이렇게 동전을 주고받으면서 손님과 기사는 무심한 듯 툭툭 던지는 한두 마디로 안부까지 챙깁니다.
거연정은 바로 아래 군자정이나 좀더 아래 동호정과 마찬가지로 도드라져 있지 않습니다. 자연석 위에 일부는 주춧돌을 깔고 기둥을 세운 다음 건물을 세우고 지붕을 올렸습니다. 이런 정자를 둘레 우람한 나무들이 감싸고 덮습니다.
아래에는 물길이 이모저모 조각을 새겨넣은 바위들이 제법 하얗고 가볍게 빛납니다. 위쪽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줄을 이어 섰고 한 쪽 물은 촬촬촬 소리내어 흐르고 다른 한 쪽은 고요히 고여 있는데 그 푸른 빛 때문에 깊이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거연정 아래 개울에서 바라본 바위들과 뒤쪽 소나무들.
거연정은 바깥에서 보는 모습도 괜찮지만 정자에 올라 내다보는 눈맛이 더없이 상큼하답니다. 아래로 내려가 개울 건너 맞은편에 섰습니다. 전봇대 아래 자리잡고 앉아 거연정과 바위와 물과 위쪽 산을 10분 정도 쳐다보다 길을 걷습니다.
건너편 길가에서 바라본 거연정과 둘레 풍경.
걷는 길은 전북 장수로 넘어가는 육십령 국도 건너편 비탈을 따라 나 있습니다. 나무 데크도 깔렸고 흙길도 나옵니다. 철이 바뀐 덕분도 있지만 빠르게 걷는데도 땀이 나지 않습니다. 함께 내려가는 개울물에서 시원한 기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길은 왼편으로도 꽤 많은 나무를 거느려 때로는 골짜기가 눈에 잘 들지 않습니다. 그러다 그런 나무 사이로 군자정을 찾아내고 동호정을 알아보는 재미가 숨어 있습니다. 물론 몰라보고 가다가도 시야가 트이는 데서는 절로 알아볼 수 있으니 신경은 쓰지 않아도 된답니다.
동호정. 군자정은 동호정보다 위쪽에 있는데, 데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답니다.
동호정 있는 데서 초행길 사람들은 잠깐 헤메기도 한답니다. 흙길이 끊어지고 징검돌을 따라 개울로 들어가는데, 징검다리 가운데가 건너기 어렵게 돼 있습니다. 아무래도 좀 손질하면 좋겠다 싶은데, 어지간한 사람들은 대부분 신발을 벗고 맨발로 물에 들어가 건넌답니다.
멀리 동호정이 보입니다. 앞에 있는 징검돌을 타고 오른쪽 아래로 갔습니다.
조금 당겨서 동호정과 소나무만 담아 봤습니다.
건넌 다음에는 아래쪽 솔숲으로 향합니다. 분위기가 그윽한 솔숲을 세로지르면 다시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개울을 끼고 숲을 지나면 이번에는 나락이 누렇게 고개를 숙인 들판과 불그스럼한 사과를 매단 과수원이 나타납니다.
과수원은 새들의 틈입이 두려운지 그물을 뒤집어썼습니다. 논들은 큼지막한 넓이로 입체감 있게 층층이 늘어서 있습니다. 길을 걸으며 바라봐서 그런지 느낌이 차 타고 볼 때보다 훨씬 푸근하고 풍성합니다.
호성 마을을 지나서까지 줄곧 개울을 왼편에 두고 걷다가 밤밭을 만나거든 바로 왼편으로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잘못해서 밤밭으로 들어갔다가는 땅바닥에 떨어진 밤톨들 탐스러운 모습에 견물생심이 될는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는 밤 한 톨이지만 농사짓는 이에게는 수백 수천 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음에는 아스팔트 도로를 버리고 곧바로 제방을 타는 편이 낫습니다. 제방길은 들판과 개울을 양쪽으로 거느립니다. 여기 걷다가 한 번 돌아보면 산들이 골짜기와 사람을 통째로 감싸준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 느낌을 햇살 아래 누리다 보면 길은 어느덧 농월정으로 이어집니다.
산마루가 햇빛을 받아 한결 부드러운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새로 난 국도 덕분에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아스팔트 옛길에는 농월정 내려가는 통로가 여럿 있습니다. 사실 지금은 농월정이 없습니다. 2003년 10월 5일 저녁 불에 타 사라졌습니다. 농월정 있던 자리가 대충 짐작이 됐습니다. 말끔하고 널찍하고 매우 커다란 너럭바위 뒤쪽 산비탈에 주춧돌로 썼음직한 자연석이 여럿 널려 있는 데랍니다.
농월정의 불타기 이전 모습. 합양군청 사진.
달과 더불어 논다는 농월정(弄月亭)은 자연 환경에 묻혀 있는 거연정·군자정·동호정과 달리 탁 도드라져 나와 둘레를 제압하는 듯했었습니다. 바로 아래 월연암(月淵岩)이라 이름붙은 커다란 너럭바위를 독차지할 기세로 우뚝 솟아 있었습지요.
한참을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습니다. 저녁 약속만 없으면 퍼질러 앉아 30분이라도 놀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바위와 물이 어울리는 풍경이 끝나고 가게와 밥집이 늘어선 거리가 나옵니다.
한적한 주차장을 가로지르고 도로를 건너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서하에서 5시 38분 출발한 버스(2400원)를 5시 48분에 받아타고 도로 나왔습니다. 안의로 나오는 도로는 양쪽으로 피어 있는 코스모스꽃이 멋졌습니다. 여럿이 거닐면 더욱 멋질 것 같다는 생각이 깊이 들었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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