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9일 합천 명소 블로거 탐방단 활동의 하나로 해인사 홍류동 소리길을 걸었습니다. 제가 소속돼 있는 경남도민일보 갱상도 문화학교 추진단이 주관하는 행사였습니다. 비에 젖은 서어나무. 비가 마치 땀처럼 보입니다.
한 주 전부터 이 날 비가 많이는 아니지만 어쨌든 내린다는 예보가 있어서 조금 걱정이 됐습니다. 비가 오면 첫 날 일정인 홍류동 소리길 걷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탐방에 참여한 블로거들 대부분은 소리길의 아름다움과 멋에 크게 감탄을 했습니다. 해인사를 그동안 오갔는데도 이렇게 좋은 길이 홍류동 골짜기에 숨어 있는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사실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자가용 자동차나 버스를 타고 오가면 홍류동도 대부분 절간 들머리에 있는 그렇고 그런 골짜기와 다를 바 없다고 여겨지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안으로 들어와 넘나들면 자기 진면목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줍니다.
게다가 걱정과 달리 이렇게 알맞게 비가 내리는 가운데 걸으니 또다른 즐거움과 보람이 있었습니다. 해가 쨍쨍하게 빛나는 맑은 날에 왔다면 이런 것들은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물이 적당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맑은 날 볼 때와는 다른 느낌을 주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서어나무입니다. 서어나무는 표면이 세로로 울퉁불퉁해서 보디빌딩을 제대로 한 남자 근육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맑은 날 보면 이것이 뽀송뽀송 매말라 있어서 서먹서먹할 때가 있습니다. 근육을 쓰면 땀이 나 젖게 마련인데 그렇지 않으니 낯설어 보이는 것입니다. 비오는 날 이렇게 보니 상태와 조건이 딱 맞았습니다. 땀이 날만큼 운동을 해서 촉촉하게 젖은 그런 근육 같았습니다.
비에 젖은 낙엽이랑 활엽수가 내뿜는 냄새도 좋았습니다. 조금 텁텁하면서도 달콤한 냄새가 났습니다. 맑은 날에는 그런 담콤한 냄새만 나고, 또 그것이 곧바로 휘발돼 버리지만 이 날은 냄새가 몸에 착착 감겨 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짙지 않고 옅게 끼인 안개도 좋았습니다. 사람이 가까이 있어도 거리감이 느껴지게 하는 안개였습니다. 딱 붙어서 얘기하지 않는 이상은 모두 조금 떨어진 데에서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것입니다.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들도 실루엣이 흐릿해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나란히 걸어올 때는 그이들 인연이 더욱 정겹게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함께 우산을 썼어도 그렇고, 여자만 우산을 썼어도 그랬습니다.
안개는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들을 가려주는 구실도 합니다. 사람이란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통째로 다 보일 때보다는 무언가가 가려져서 보일 듯 말 듯할 때 더 호기심이 동하는 법이지요. 홍류동 골짜기가 무언가 더욱 아름답고 멋진 것을 안개로 살짝 가린 것 같은, 그래서 더욱 멋스러워 보이는…….
홍류동 소리길에 있는 명승 낙화담(落花潭)이 내려다보이는 길목에는 이런 한시가 적혀 있었습니다. 읽어보니 과연 그러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속세를 떠난 도인조차도 두고 온 세상 인연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한자는 옮기지 않고 한글 풀이만 적어 보겠습니다. 여기 나오는 정근(情根)은 '애정의 뿌리, 깊고 깊은 애정의 근원'을 뜻한답니다.
"어젯밤 비바람에 골짜기가 요란하더니
여울 가득 흐르는 물에 꽃이 많이 졌구나
도인조차 아직까지 정근(情根)이 남아
두 줄기 눈물이 흘러 푸른 물결에 더해지네"
또 사진으로 담지는 못했지만 다람쥐 녀석이 참 자주 눈에 띈 것도 보람이었습니다. 6km남짓 되는 길이었는데, 다람쥐랑 마주친 것이 다섯 차례나 됐습니다. 여태 많은 산길을 거닐었지만 대부분은 한 번 보기도 어려운 존재가 다람쥐였습니다.
물론 다람쥐의 잦은 '출몰'이 비 때문은 아니었겠고, 제가 여기 이렇게 쓰는 것도 알맞추 내린 비로 말미암은 또다른 아름다움과 멋스러움에 더해 다람쥐까지 더해지니 더욱 좋더라는 취지랍니다.
비 오는 날 걸으면 맑은 날과는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길이었습니다. 소리길은 또 비가 와도 미끄럽지 않을 정도로 잘 가꿔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다람쥐까지 자주 마중나오는 그런 길이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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