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생명 친교 깨달음이 있는 합천 정양늪

김훤주 2011. 10. 6.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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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다란님과 함께 거닌 정양늪

9월 29~30일 진행된 합천 명소 블로거 탐방에서 저는 거다란님과 함께 정양늪을 찾게 됐습니다. 30일 오전 10시 30분 즈음 시작해 두 시간 가까이 거닐었는데, 앞서 혼자서 노닐 때와는 또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혼자 왔을 때는 여기 있는 풀들과 새들에게 깊숙한 눈길이 갔는데, 거다란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에 더해 상대 마음과 제 마음에까지 제 눈길이 미치더라 이런 말씀입니다.

거다란님과 무슨 얘기를 나눴느냐고요? "요즘 사람들이 하늘만 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땅도 제대로 보지 않는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계기는 여기 놓여 있는 황톳길을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걸은 데에 있었습니다.


평소 신발과 양말로 둘러싸여 있던 발이 까칠까칠한 황토를 밟으니 따끔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황토만 깔려 있지 않고 조그만 자갈 따위도 함께 박혀 있으니 걸음을 옮길 때 발 밑을 내려다보고 밟을 자리를 고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신경을 써서 걸으니 평소 아무 느낌 없이 슥슥 내걷던 그래서 밟히기만 하던 땅바닥을 살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평소 고개를 들지 않고 다니던 사람이 하늘을 바라볼 때 머금는 그런 것과 비슷한 느낌도 바닥을 살필 때 들었습니다.

2. 사람만 다니지는 않는 황톳길

그것은 텅 빈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생명체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세상이 사람이 가장 독한 존재라서, 짐승이 다니는 길에는 풀이 나도 사람 다니는 길에는 풀이 나지 않는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풀은 나지 않았어도 여기 황톳길을 지나다니는 존재는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때는 길섶 풀더미에서 튀어나오는 여치나 메뚜기 따위들이 보였습니다만, 이번에는 조그마한 자라(아니면 남생이인지도 모르겠습니다)를 보게 됐습니다. 바닥에 눈길을 주면서 가다 보니 100원짜리 동전만한 조그만 것이 꼼지락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다란님과 가만히 앉아 한참을 바라보며 이리저리 뒤집기도 하다 사진을 찍고 풀밭에 넣어줬습니다. 따가운 햇볕을 가리라고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조금 더 가다보니 이번에는 애벌레가 하나 나타났습니다.


나중에 변태를 해서 무엇이 될는지는 제가 알지 못하지만, 이 녀석도 앞에 두고 뒤집어봤더니 원래대로 바로 돌아오는 힘이 제 손끝에까지 팽팽하게 느껴졌습니다. 사람은 이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지만 이 녀석들 다들 자기 깜냥에는 온 몸으로 팽팽하게 일생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렇게 돌아나오면서 다시 생각해 보니, 아마 오늘 거다란님과 제가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걷지 않았더라면 아까 둘이가 봤던 그 자라(또는 남생이)와 애벌레를 보지 못했을 테고, 어쩌면 그것들 오늘이 바로 제삿날이 될 수도 있었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깜짝 놀라 거다란님에게 그대로 얘기했습니다.


우리 둘이 무심하게 걷는 발걸음이 저것들을 깔아뭉갰을 수도 있겠지 않겠습니까? 무심히 지나치던 가까운 것들을 어떻게든 조금 더 살펴보게 되면 세상에는 자기 말고도 다른 많은 것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알게 되면 그렇게 알게 된 것들을 조금이라도 위하게 되는 모양입니다.

3. 나무 데크에서는 물풀과 새들에게 눈길이 갔고


정양늪에는 이런 황톳길 말고 나무로 만든 데크도 있습니다. 이 둘이 이어져 있지는 않아서 들어갔다가 같은 길을 도로 걸어나와야 하기는 했습니다. 이 둘이 나중에라도 이어져 푸근한 마음으로 한 바퀴 둘러볼 수 있게 되면 더 낫겠습니다만.


데크를 따라 들어가면 물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습니다. 습지임을 알리는 지표종인 왕버들도 곳곳에 무리지어 있고요. 이번 걸음에서는 청둥오리랑 왜가리 같은 새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더욱 제 눈길을 잡아당긴 녀석은 가시연이었는데요, 철이 지났는데도 이것들은 꽃봉오리들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안에서는 붉은 빛 꽃들 속살이 살짝 내비치기까지 했답니다.


또 마름(뿌리에는 물밤이라 해서 사람들 따서 삶아 먹는 밤 맛이 나는 것들이 달려 있을 것입니다)이 잔뜩 깔린 사이사이로 물옥잠이랑 노랑어리연도 곳곳에 있었는데요, 노랑어리연은 꽃이 노랗고 물옥잠은 꽃이 자줏빛이랍니다.


사실 정양늪은 습지 치고는 그리 큰 편이 못됩니다. 바로 이웃 창녕의 소벌(우포늪)에 견주자면 그 넓이가 100분의1도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여기에 이렇게 여러가지 생명들이 깃들이고 있었습니다.

4. 친교도 하고 깨달음도 얻는 정양늪 생명길


이렇게 생명이 넘쳐나는 정양늪을 거다란님과 거닐면서 얘기를 많이 나누지 않았을 리가 없습지요. 저는 평소 거다란님 커다란 배포에 조금은 감탄을 하곤 했는데, 거다란님이 조그만 자기 사정 같은 데 매이지 않고 통크게 상대 배려하며 노실 줄 알게 된 까닭을 조금 눈치챘답니다.


바로 그 까닭은 사회에서 철저하게 '갑이 아닌 을'을 경험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말문은 제가 먼저 열었습니다. 예전에는 기자 노릇만 했기에 말하자면 주로 '갑'으로 살았는데 '갱상도 문화학교 추진단'을 맡고부터는 이런저런 계약 관계에서 '을'의 지위에 놓이게 됐다, 그러니까 세상이 달리 보이더라, 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블로거 탐방단 운영도 그렇고 경남도람사르환경재단의 지원을 받아 진행하는 생태·역사기행도 그렇습니다. 물론 다른 많은 사람들 일상에서 겪는 그런 정도로까지 '을'을 겪지는 않지만, 이런저런 주문을 하고 자기한테 필요한 것 취재 대상에게 요구하는 기자 노릇에 견주자면 지금 하는 일이 확실히 을은 을인 것이거든요.


블로거 탐방단 운영을 보기로 삼아 말씀드리자면 저희한테 블로거 탐방단 운영을 맡기는 기획업체나 자치단체에서 이런저런 주문을 하면 어지간하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참가해 주신 블로거들에게도 최대한 편하게 대해야 마땅합니다.


이를테면 자기 필요보다는 상대 필요에 자기 행동이나 생각이나 말을 맞춰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전에 살았던 세상에 견주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보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거다란님은 제 말에 많이 동의하셨습니다. 1990년대 중반에 제주에서 한 해 동안 제약 업체 외판을 했는데 하루에도 여러 번 생각이 왔다갔다 하더라 했습니다. 약품 주문이야 약국 마음대로니까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 비위를 최대한 맞추지 않으면 못해 먹는 노릇이 약품 외판원이겠지요.


그래서 약사 개인의 이런저런 일정도 챙겨야 했겠고 때로는 리베이트 명목으로 돈을 건네기도 했을 테고, 어떤 때는 이도저도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하는 설움도 겪었겠지요. 그리고 이 외판원이라는 것이 우리 경제로 치면 실핏줄과 같은 역할이어서 거다란님 아니라도 누구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도 했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방법을 깨달았답니다. 약품의 효능이 발생하는 시스템을 상대 약사가 잘 알아듣도록 설명할 수 있을 때 잘 팔리더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너무 뻔한 얘기이기도 하지만 제게는 거다란님 이 말씀이 크게 울려 왔습니다.


하나는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빨리 알아채고 그것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고요, 다른 하나는 상대방에 눈높이를 맞춰서 자기가 스스로 먼저 상대방 필요를 체득해야 상대방 요구를 제대로 충족시킬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갱상도 문화학교'를 통해 이런저런 인문학 강의도 진행하고 문화예술 창작교실도 운영하는 한편으로 SNS를 통한 소통 강화 방법, 지역 밀착형 기행, 새로운 여행·관광 프로그램 개발과 보급 등등을 하는 데 필요한 자세와 관점을, 거다란님과 함께 정양늪 그 길을 거닐면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5. 합천에는 해인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한 번 더 말씀드리자면, 잘 가꿔진 정양늪에는 숱한 생명도 있었고 친교도 있었으며 새로운 깨달음도 있었습니다. 하나 더, 이렇게 맨발로 걸으니 발바닥 따끔따끔한 느낌을 통해 건강도 제 몸 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답니다.


합천에는 해인사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그맣지만 색다른 정양늪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가지 못했지만 건너편 황강변에는 역사가 오랜 함벽루라는 멋진 누각도 있습니다. 여기서 바라보는 황강 풍경은 그지 없이 멋지답니다.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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