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인간 문화와 자연 역사가 어우러진 우포늪

김훤주 2011. 8. 2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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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람사르 협약에 등록된 대한민국 최대 자연늪

우포늪(소벌)은 경상남도 창녕군에 있는 내륙 자연습지다. 한반도의 남쪽을 흐르는 큰 강인 낙동강의 동쪽에 있다. 창녕군의 대지·대합·유어·이방면에 걸쳐 있는데 1998년 8월 람사르 협약(물새 서식지로서 특히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에 관한 협약)에 등록된 데 이어 1999년 2월 일대 8.54㎢가 환경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이 가운데 물이 담겨 있는 부분만도 2.31㎢일 정도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자연늪이다.

우포늪에는 동물과 식물이 매우 많이 살고 있다. 오경환 경상대학교 교수 등의 2004년 조사에 따르면 물 속 또는 물가에 사는 식물이 모두 350가지나 됐다. 누가 어떻게 조사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이는 다른 습지와 견주면 아주 많은 편이다.

소벌 시작하는 들머리 창산다리 아래에 핀 노랑어리연꽃. /유은상 기자


풀에 더해 나무는 물론 풀섶과 나무숲 또는 논밭이나 물에 깃들어 사는 생물을 합하면 가짓수가 1000은 쉽게 넘어간다. 이 가운데 가시연꽃·삵·재두루미·큰고니·고니·개구리매·황조롱이·큰기러기·가창오리·남생이·귀이빨대칭이는 한국 정부에서 천연기념물 또는 멸종위기 동·식물로 지정돼 보호를 받고 있다.

이들 식물은 질소나 인과 같은 무기물질을 빨아들여 물을 정화하는 한편 물고기와 철새와 조개와 벌레 따위들의 먹이가 되기도 한다. 세상에 나타나 살다가 죽어가는 과정에서 양쪽으로 착한 노릇을 하는 셈이다. 습지가 이른바 생물 다양성이 풍부한 까닭이 바로 이들에게 있다. 이들은 또 죽어서는 영양분이 풍부한 거름 노릇을 함으로써 스스로에게 다시 태어나게 하는 바탕이 돼 주기까지 한다.

우포늪은 나이가 1억4000만 살 가량 된다고 알려져 있다. 우포늪 둘레 퇴적암에서, 1억1000만~1억2000만 년 전에 살았던 공룡의 발자국 화석과 곤충 화석이 발견된 데 따라 이렇게 짐작한다. 한편에서는 6000년 전인 기원전 4000년 전후에 기온이 따뜻해지는 바람에 얼어 있던 빙하가 녹으면서 지금과 같은 해안선이 형성됐는데, 이 때 우포늪이 낙동강과 더불어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아마 이 둘 다 틀리지 않는 얘기이리라는 생각이 든다.

2. 우포늪 이름에 스며 있는 자연과 인간의 역사·문화

하지만 우포늪의 값어치가 이런 큰 규모, 살고 있는 생물의 다양성, 그리고 오래 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에만 있지는 않다. 따지고 보면 이런 것은 우포늪 아니라 다른 모든 습지들도 나름대로 갖추고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어쩌면 우포늪이 이렇게 들판 한가운데 눌러앉아 있으면서 둘레 사람들이랑 만들어온 이런저런 사연들은 다른 습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일 테고 그래서 그 독특함에 사람들 눈길이 끌릴 수 있겠다 싶다.

소벌 사지포 제방에서 보는 해 돋는 모습. /달그리메


먼저 우포늪을 이루는 네 습지의 이름과 우포늪의 옛 이름에 이야기가 담겨 있다. 우포늪은 우포(牛浦)·사지포(沙旨浦)·목포(木浦)·쪽지벌로 이뤄져 있다. 한글 고유어로 옮기면 이들은 저마다 소벌·모래벌·나무(개)벌이 된다.

말 뜻을 살펴보면 저마다 갖고 있는 특징이 나타난다. 먼저, 소벌은 생긴 모양이 소를 닮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 알려져 있다. 물을 먹으러 길게 뻗은 소대가리 형상이 목덜미까지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뒷덜미에 해당하는 지점에 있는 언덕의 이름이 소목(우항산=牛項山)이 됐다고도 한다.

최근에는 이런 주장이 나왔다. 우포의 옛 이름은 누포(漏浦:1864년 발행된 지리지인 <대동지지>에 나옴)인데 한자로는 ‘샐 루’에 ‘개 포’가 된다. 우포 또한 ‘소 우’에 ‘개 포’를 쓴다. ‘루’와 ‘우’가 여기서 뜻하는 바는 다르지 않다. 동쪽을 가리키는 옛말 ‘살’ ‘사라’를 품었다. 낙동강 동쪽에 있어 붙은 이름이라는 얘기다. 대지와 유어를 잇는 언덕 같은 야산의 이름인 소맥산(小麥山)도 여기 더해진다. ‘소’에서 소리(소)를 따고 ‘맥’에서 뜻(보리)을 따면 소보리산=소버리산=소벌 옆에 있는 산이 되는 것이다. 소(小)의 쓰임새는 누(漏), 우(牛)와 같다.

이렇게 보면 이해되지 않는 하나가 남는다. 소목(우항=牛項)이 그것이다. 여기서 소(牛)는 ‘동쪽’으로 해석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일까? 한국 고유어 ‘소=새’에서 ‘동쪽’이라는 뜻이 많이 탈색되고 나서 이른바 ‘스토리 텔링’이 진행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면서 ‘소머리 모양 지형’이 입에 올려졌을 테고 그러면서 소목이 생기지 않았을까 짐작해 보는 것이다.

다음 모래벌은, 지금은 우포늪의 근원이 되는 토평천과 이어지지 않고 인공으로 조절되지만 위치로 보면 토평천 물줄기가 갑자기 확 넓어지면서 늪이 이뤄지는 첫머리에 있다. 그러니까 토평천 따라 쓸려온 모래 같은 것들이 가장 먼저 쌓이는 자리다. 여기는 마름 같은 물풀이 많다. 우포를 이루는 다른 세 벌에서는 여기처럼 빽빽하게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나무(개)벌은 수심이 깊다. 여기에는 헤엄을 치면서 먹이를 잡는 오리·기러기 같은 새들이 즐겨 찾는다. 수심이 깊다 보니 여름철 홍수 때 산에서 떠내려온 나무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그런 나무들을 건사해 땔감으로 썼다. 한편으로는 둘레 사람들이 나무를 하려고 여기를 건너다녔다 해서 나무(개)벌이라 한다는 얘기도 있다.

커다란 호수처럼 그윽한 맛이 나는 나무개벌.


쪽지벌은 말 그대로 ‘쪽지’처럼 조그맣다. 토평천이 확 펼쳐지면서 우포늪을 이룬 다음 다시 낙동강으로 나아가 합류하려고 몸을 추스르는 지점에 쪽지벌이 놓여 있다. 작기는 하지만 나무(개)벌과 소벌의 특징이 모두 담겨 있어 깊은 데도 있고 얕은 데도 있다. 게다가 사람의 침입과 간섭이 가장 적기 때문에 갖은 새들이 여기를 찾아 쉬곤 한다.

조금 끌어당겨 찍은 쪽지벌.

끌어당기지 않고 찍은 쪽지벌.


3. 우포늪에 기대어 사는 사람의 자취들

여기 사람들은 우포늪에 기대어 삶을 누려 왔다. 농사짓는 물도 여기서 나왔다. 우포에 들어가 논고둥도 잡고 물고기도 잡았다. 또 30년 전만 해도 여기서 마름 열매인 물밤(말밤)을 따 삶아 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요즘은 보기 어렵지만, 논고둥을 잡기 위해 동네 아낙들이 한 손으로는 빨간 ‘다라이’(‘대야’를 뜻하는 일본말 변종, 일본 식민 지배의 아픈 과거가 남아 있다)를 끼고 다른 한 손은 물 속 바닥을 더듬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곤 했다.

소벌(우포늪)의 명물 거룻배. /유은상 기자


또 우포늪에는 나무장대로 바닥을 밀어서 움직이는 조그만 거룻배가 있다. 고기잡이에 쓰는 녀석이다. 널빤지를 이어 붙여 만들었는데, 어부들이 습지 한가운데에 쳐놓은 그물을 살펴보거나 거기 걸린 고기를 실어나를 때 이 거룻배를 부린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 같은데 지켜보다 보면 금세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들이 여기 치는 그물도 자세히 보면 별나다. 가로 세로 또는 십자 모양으로 그물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뜨린 다음 한가운데에다 화살표가 서로 맞부딪치는 모양(→←)으로 설치하는 것이다. 그물에 닿은 물고기들이 되돌아가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 하면 죄다 걸려드는 장치인 셈이다. 이런 그물과 거룻배는, 나무(개)벌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다.

4. 그래도 으뜸은 우포늪의 아름다움이 내뿜는 매력

이런 역사와 문화의 가치도 우포늪 자체의 아름다움이 내뿜는 매력, 그 아름다움을 와서 보고 누리는 즐거움보다는 아무래도 값어치가 못하다. 아름다운 자연풍경 산천경개를 보는 데서 오는 상쾌함과 차분함과 편안함, 생각의 깊어짐, 마음의 비워짐, 발상의 새로워짐, 영감의 활발한 작동 등은 몇 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다.

소벌 한가운데 이제는 농사짓기를 그만둔 묵정논 묵정밭에는 이렇게 고운 풀들이 자란다.


하루 24시간 가운데 어느 때나 좋고 한 해 사시사철 언제나 편안한 데가 바로 우포늪이다. 그래서 ‘힘찬 녹색 생명을 움틔우는 버드나무’(봄), ‘가시연꽃 무리의 화려함’과 ‘물풀들이 연출하는 드넓은 녹색 융단’(여름), ‘노란 들판과 날아들기 시작하는 철새’(가을), ‘떼 지어 다니는 겨울 철새들’(겨울) 하는 식으로 철마다 다르게 주안점을 잡아주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면 개인 취향일 수 있지만 우포늪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은 봄철 다닥다닥 붙은 버들들에서 연둣빛 잎이 막 솟아나는 이른 봄이 가장 그럴 듯하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새 세상을 향해 내미는 연둣빛 잎들의 조심스러움이 귀엽다. 통째로 보면 얼어붙은 땅바닥에서 솟아오른 봄 기운이 습지 전체를 몽글몽글한 이파리로 채워 부드럽다. 때 맞춰 우포늪 곳곳에 나 있는 ‘우포늪 생명길’을 걸으면 이런 보람을 온 몸으로 누릴 수 있다.

우포늪의 은은함을 누리려거든 새벽에 찾으면 좋다. 새벽에 안개까지 끼어 주면 더없이 좋다. 새벽 우포늪은 인간의 개입이 거의 없는 시간대다. 자연이 내는 소리밖에 없기에 그것을 있는 대로 누릴 수 있다. 게다가 어스름이 주는 효과도 상당하다. 여기에 나 있는 길을 걸으면서 이쪽저쪽 눈길을 던지면 우포늪이 통째로 신비로워진다.

안개가 자욱한 날 아침에 찾아가 본 소벌의 모습.


깜깜한 밤중에 우포늪을 찾는 수도 있다. 한밤에 달이 뜨지 않는 그믐에 맞추면 가장 좋다. 우포늪 드넓은 일대는 몇몇 마을 말고는 밤에 빛을 내는 존재가 없다. 멀리 새가 우는 소리만 들릴 뿐 바닷가나 산골짜기와 달리 물 흐르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깜깜한 가운데 혼자 조용하게 앉아 있거나 아니면 둘이 조곤조곤 얘기를 나누는 즐거움이 보통 아니게 커다랗다. 여름에는 우포늪 언덕에서 늪반딧불이의 반짝거림과 마주치는 기쁨도 있다.

언제 시간나면 한 번 와 보시든지.
김훤주
※ 8월 초순 국가브랜드위원회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www.koreabrand.net/kr/know/know_view.do?CATE_CD=0010&SEQ=2265&pageIndex=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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