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희망버스 취재 중 최루액 직접 맞아보니

기록하는 사람 2011. 7. 10.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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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속았다. 난 그게 그냥 물대포인줄 알았다. 폭우도 맞았는데 이쯤이야, 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내쪽으로 향하는 하얀 물대포를 향해 아이폰 카메라를 조준했다. 찰칵! … 촤~악!

그 순간부터 암흑이었다. 눈이 아파 뜰 수 없었다. 호흡도 잘 되지 않았다. 숨을 쉬려면 기침이 먼저 나왔다. 방향감각도 잃어버렸다. 그냥 밀물처럼 쏠려가는 인파에 몸을 맡길뿐이었다.

떠밀리는 동안 몸에 부딪히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여기서 쓰러지면 밟혀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누군가 구령처럼 "천·천·히, 천·천·히"를 외쳤다. 주위 사람들이 따라서 "천·천·히"를 연호했다. 아~ 다행이다.

나를 덮친 최루액이다. 촬영하고 약 1초 후 이걸 정면으로 맞았다.


그렇게 한참을 인파 속에 떠밀렸다. 그 사이 카메라 가방에서 타월을 꺼내 눈을 닦았다. 그러나 눈을 뜰 수 없었다. 옆에서 "눈 닦지 마세요. 그냥 눈물 흐르는 대로 두세요. 닦으면 더 아파요"라고 말해줬다.

이어 "여기 물 좀 주세요" 하는 외침이 들렸다. 여성의 목소리였다. "눈 떠 보세요. 물로 씼을께요." 역시 눈을 뜰 수 없었다. 생수통의 물이 내 얼굴과 목을 적시며 가슴을 타고 내려왔다. 살갗이 따가웠다. 또다른 누군가가 내 왼손에 물티슈를 한웅큼 쥐어줬다.

저 물줄기가 방향을 바꿔 내쪽으로 왔다. 위 사진보다 약 3~4초 전 찍은 사진.


말로만 듣던 최루액(캡사이신인가?) 폭탄을 정통으로 맞았던 것이다. 물티슈 한 웅큼을 다 쓸 무렵에야 겨우 실눈이나마 뜰 수 있었다.

1987년 사과탄이 내 발 앞에서 터졌을 때보다 더 독했다. 눈물 콧물, 호흡곤란은 최루탄과 비슷했지만, 최루액을 뒤집어쓴 얼굴과 목덜미, 양 손과 팔은 12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화상을 입은 듯 화끈거린다. 경찰의 최루액 살포로 화상을 입었다는 보도는 이래서 나온 거로구나 싶었다.

마지막으로 내 아이폰에 찍힌 사진은 그냥 시커멓기만 했다. 그걸 포토샵에서 자동대비 보정을 해봤더니 이런 색깔과 이런 무늬가 나왔다. 최루액이 덮친 아이폰 액정의 모습으로 짐작된다.


일선 취재기자는 아니지만 '역사의 현장'을 보고 싶었다. 9일 한진중공업에서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6개월 넘게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여성노동자 김진숙을 응원하기 위해 전국에서 '제2차 희망버스'를 타고 온 1만여 명의 인파는 이미 그 자체로 '역사'였다. 내가 사관이라면 이를 일컬어 '노동계의 핵심 의제를 놓고 노동계가 주최하지 않고, 자발적인 시민들이 만들어낸 최초의 대규모 집회'라고 기록할 것이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했을까? 트위터라는 소셜네트워크의 힘도 있었고, 배우 김여진 등 유명인의 역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무엇보다 '노동자 김진숙의 진정성'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보고 싶다.

내가 아는 김진숙은 대기업인 한진중공업 노조 조합원이고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의 지도위원이지만, 대기업과 정규직 중심의 노동조합운동에 대해 거침없이 쓴소리를 내온 흔치 않은 분이다. 따라서 김진숙은 정규직 노조 소속이면서도 우리 사회의 가장 힘없는 노동자인 비정규직을 가장 끔찍히 생각하는 노동운동 지도자다.

게다가 김진숙은 지금 자기 개인의 이익이 아닌 노동자 모두의 해고되지 않을 권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렇게 크레인 위에서 혹한의 겨울을 지내고, 이제 한 여름의 폭염을 맞이하고 있다.

나는 이런 김진숙과 1만여 자발적 시민이 만나는 역사의 현장을 대한민국 저널리스트의 한 명으로서 꼭 봐두고 싶었다. 그래서 카메라를 둘러매고 폭우가 쏟아지는 부산역으로 향한 것이다.

기자들이 경찰과 시민의 대치선 엎에 있는 한 건물 옥상에 올라가 취재하고 있다. 나는 시민들과 함께 도로에 있다가 변을 당했다.


그러나 만남의 현장을 목격하기는커녕 최루액 폭탄을 얻어맞고 말았다. 2011년 7월 10일 새벽 2시 46분의 일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3시 15분이었다. 약 30분동안 넋이 나간 상태였던 것이다. 그제서야 트위터에 최루액이 쏟아지는 사진을 올렸다. 몇 몇 사람들이 아는 체 하며 "괜찮느냐"고 인사를 건넸지만,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이 들자 화가 치밀었다. 기자의 본분을 잠시 잊고, 돌멩이라도 들고 물대포 차벽에 돌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최루액 폭탄의 충격이 너무나 강력했고, 내 담력은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경찰은 영리했다. 당초 경찰은 영도다리에서 시민들의 행렬을 막을 것이라는 소문을 냈다. 시민들은 그럴 경우 곧바로 뒤돌아서 부산의 전통적 번화가인 남포동과 광복동 일대에서 시위를 벌인다는 작전계획도 내 귀에 들어왔다.

하지만, 경찰은 영도다리에서 막지 않았다. 대신 한진중공업을 700미터쯤 남겨놓은 봉래 교차로에 차벽을 쌓고 더 이상의 전진을 막았다. 영도다리를 다시 넘어 남포동으로 되돌아가기엔 너무 먼 곳이었다.

좋다. 거기까진 경찰의 영리함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새벽에 꼭 최루액 폭탄을 발사하고, 사람들을 강제연행까지 해야 했을까? 그렇게 하여 거기에 있었던 1만여 시민은 물론 트위터로 현장 상황을 지켜보던 수많은 국민들까지 분노를 자극할 필요가 있었을까?

경찰의 의도대로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끝내 김진숙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들은 3차, 4차 희망버스로 다시 오겠다고 다짐했다. 나 역시 3차, 4차에 참여할 예정이다. 나는 반드시 이들 역사적 시민과 역사적 노동자가 만나는 모습을 보고야 말 것이다. 그렇게 되는 날 경찰은 오늘 새벽, 나와 시민들, 야당 국회의원들에게 쏘았던 최루액이 큰 실수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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