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사람이야기

송미영 이야기(4)이모의 폭력에 시달렸던 어린 시절

기록하는 사람 2011. 6. 28.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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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보면 명백한 아동폭력이며 학대였다. 미영 씨가 초등학교 1~2학년 때였으니 벌써 30년이 넘은 이야기다.

'앵벌이'로 전국을 떠돌던 엄마와 아빠를 대신해 미영 씨 남매를 돌보던 이모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막내 애영 씨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미영 씨와 두 남동생은 이모와 함께 마산 내서읍 중리의 경노당에서 방 한 칸을 얻어 살고 있었다. 아홉 살밖에 안 된 미영이가 경노당 청소와 빨래를 도맡은 것도 모자라 걸핏하면 이모에게 매질을 당했다.

"경노당에 창문이 많았어요. 그 많은 창문을 다 걸어잠그게 했어요. 그리고 나서 동생 둘을 밖에 내보낸 후, 빨래나 청소를 깨끗이 하지 않았다며 허리띠를 손에 감고 온몸에 피멍이 들 정도로 때렸어요. 동생들은 문밖에서 '우리 누야 살리주이소'라며 울었지만 매질은 멈추지 않았죠. 어쩔 땐 큰 각목을 다리 사이에 끼워놓고 꿇어 앉힌 뒤 바늘로 찌르기도 했어요."

지금이야 그곳이 아파트촌으로 변해 있지만, 당시만 해도 경노당이 있는 곳은 외진 곳이었다. 아이들이 비명을 질러도 아무도 와주지 않았다.

"그래도 성이 안 풀리면 한 겨울에 발가벗겨 한데에 쫓아내기도 했어요. 온몸이 얼어 정신을 잃을만 할 때서야 들어오라고 했어요."

미영 씨(왼쪽)가 남동생 둘과 함께 이모 밑에서 힘들게 자라던 시절, 유일하게 남아 있는 빛바랜 사진이다.


당시 미영 씨는 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이모의 학대 사실을 일러 바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아빠 엄마가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내가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모가 시집 간 5학년 때까지 그렇게 살았다. 이모가 떠나자 이번엔 외숙모가 왔다. 외숙모는 아이들을 때리진 않았지만, 술과 담배, 도박에 빠져 있었다. 젖먹이 하나를 데려왔는데, 외숙모는 자기 아이조차 돌보지 않았다.

"외숙모가 데려온 아이를 제가 다 키웠어요. 분유 타 먹여 재우고, 기저귀 갈아주고…."

결국 외숙모의 술 때문에 동네사람들이 경노당을 비워달라고 하는 사태까지 닥쳤다.

"그 때 내가 엄마한테 빌었어요. 제발 이젠 우리끼리 살게 해달라고…."

경노당에서 쫓겨나 철길 밑에 겨우 연탄 방을 하나 얻었다. 미영 씨가 동생들을 보살피며 거기서 1년을 산 뒤, 두척동으로 이사를 했다. 역시 단칸방이었지만 이번엔 엄마와 함께였다. 하지만 엄마는 이미 객지로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병이 들어 있었다. 미영 씨가 중학생일 때였다. 그 때부터 병수발이 시작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즈음 작은아버지 댁에 살고 있던 할머니까지 치매에 걸려 미영 씨 집으로 왔다.

"노망 걸린 할머니 똥 오줌도 치우고, 집 나가면 찾으러 다니고, 밥 챙겨드리고…, 힘들었지만 할머니가 너무 불쌍했어요. 같이 사는 게 좋았죠. 두척동 옛 도살장에서 소 껍데기를 얻어와서 소금물에 팍팍 씼어 조선간장에 마늘 넣고 칼로 쪼아 드리면 할머니가 너무 좋아했어요."

할머니도 그런 손녀를 끔찍히 사랑했다. 정신이 돌아오면 손녀를 끌어안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햇님아, 달님아, 별님아, 내가 마지막에는 결국 손녀에게 밥을 얻어먹는구나. 내가 죽어 귀신이 되어도 꼭 너를 도와줄께."

그런 할머니가 어느 날 돌아가셨다. 미영 씨가 학교에 간 사이 집을 나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부터였는지는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아버지가 더 이상 객지에 돈 벌러 가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를 따르는 장애인들이 늘어나 매일 그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불우한 학창시절, 결국 학업을 포기하다

"아버지가 거지 왕초, 장애자 왕초였죠. 아버지가 무슨 장애인단체를 만들었는데, 그 세력이 점점 커졌나 봐요. 매일 집안에 장애자들이 들끓어 생리대를 갈 수도 없었어요. 화장실도 무서우니까…."

그런 가운데 어머니의 천식은 점점 심해져 갔다. 청소 한다고 빗자루만 들어도 기침이 멈추지 않아 병원에 실려가기 일쑤였다. 아버지 송병수 씨의 말이다.

"미영이 엄마와 결혼하고 10년 뒤에야 처갓집에 가서 장인 장모를 뵀는데, 장인영감이 천식병이 있더라구. 집안 내력이었던 거지. 잘한다는 병원에 다 가봤지만 끝내 고치질 못했어."

미영 씨가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병든 엄마 때문에 집안일과 병수발도 모두 미영 씨 몫이 됐다. 동생들도 돌봐야 했고, 집안에 아예 상주하다시피 하는 장애인들 뒤치닥거리도 해야 했다. 찾아온 장애인 중 미영씨와 동갑내기 여자 아이도 있었다. 엄마에게 버림받고 찾아와 '앵벌이'를 시켜달라고 했다. 생리도 분간 못하는 아이였다. 미영 씨는 동생들뿐 아니라 그런 장애인까지 함께 보살폈다.

미영 씨는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 끝내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를 다니며 그런 일까지 해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 길로 학교 가서 내가 자퇴서를 냈어요." 놀란 선생님이 집에까지 찾아와 "미영아, 너만은 안 된다. 너는 법원 서기가 되어야 한다. 학교 가자"라고 설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미영 씨의 선택은 가곡 명인 조순자 선생(현 마산 가곡전수관장)과의 안타까운 인연으로 이어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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