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 씨가 혹독한 시집살이와 노동으로 거의 탈진할 때쯤이었다. 불쑥 친정 아버지가 구미의 시댁까지 찾아왔다. 어젯밤 꿈에 딸이 나왔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딸의 앙상한 모습을 확인한 아버지는 사돈 양반에게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딸 가진 죄인이 딸 데리러 왔습니다."

그 길로 딸의 등을 떠밀어 마산으로 데려오고 말았다. 애초 자신의 아버지를 모시는데 부정적이었던 남편 도연 씨도 곧 뒤따라왔다.

아버지 송병수(65) 씨는 5살 때, 아니 정확하게는 만 4세 때 폭발물 사고로 양 손목과 두 눈을 잃은 중증 장애인이다.

송병수 씨를 만나러 가는 동안 뭔가 음울하고 어두운 기운이 그를 감싸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는 호탕하고 밝았다. 목소리에도 자신감이 넘쳤다. 게다가 왼쪽 눈은 어느 정도 시력도 회복해 있었다. 개안 수술 덕분이란다.


1946년 경북 칠곡군 지천면 달서동에서 태어난 그는 1950년 한국전쟁 때 갖고 놀던 불발탄이 폭발하면서 평생 장애를 안고 살게 됐다. 특수학교도 없던 시절이라 초등학교마저 진학할 수 없었다.


"워낙 어릴 때 당한 일이라 서럽다든가 억울하다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자랐죠."

소작농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큰 아들의 사고 이후 낙심해 집안을 돌보지 않고 술만 마셨다. 가세는 더욱 기울었고, 먹고 사는 문제도 어린 병수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손이 없지만 짧은 팔로 밥을 먹는 것부터 터득했고, 열한 살 때부턴 술도가에서 막걸리 배달을 시작했다. '그런 몸으로 어떻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만나 본 그는 숟가락으로 밥과 반찬을 먹는 것은 물론 글씨까지 능숙하게 썼다. 요즘은 컴퓨터를 배워 인터넷에 글도 쓰고 있다.

열네 살 때 술도가 사장이 말 구루마(달구지)를 사줘 그걸 몰고 좀 편하게 막걸리 배달을 하게 됐다. 아버지가 방황하는 사이, 어린 병수는 그렇게 몸이 아픈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부양했다.

열여섯이 되어도 집을 나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와 식솔을 이끌고 무작정 김천으로 갔다. 일주일간 김천역 대합실에서 네 식구가 노숙을 했다. 송 씨는 그 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은인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박성수라는 분이었습니다. 지나가다 보니 팔도 없고 눈도 없는 병신이 콜록거리는 엄마와 아이들을 데리고 있으니 불쌍한 생각이 들었는가 봐요. 김천 지좌동 내를 건너 조그만 오두막이 하나 있었는데, 그걸 내주며 살아라고 하더군요."


산기슭 오막살이라 산에 가서 나무를 해와 불을 때고 가마니를 덮고 잤다. 낮에는 시내에 나가 연필을 팔아 연명했다. 7개월 후 그렇게 번 돈으로 평화동에 사글세 방 한 칸을 얻었다. 스물 두 살 때까지 송 씨의 연필장사는 계속됐다.


"그 때 연필장사를 그만 두고 의성으로 갔어요. 당시 월남 파병 갔던 군인들이 다쳐서 들어오고 하던 시절이었는데, 나도 상이군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죠. 가짜 소위 계급장을 달고 시골 면단위 유지들, 양조장 사장, 정미소 사장 이런 사람들을 찾아 다니면서 행패를 부리고 돈을 뜯어내곤 했죠."

그는 서서히 건달로 변해 갔다. 활동 반경도 의성에서 안동, 주덕, 청송으로 넓혀 갔다. 그러던 중 미영 씨 남매들의 엄마가 될 여자를 만나게 됐다.

"안동에서 사고를 치고 문경으로 피신했는데, 친구 후배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여관에 숨어 있었어요. 거기서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는 애들 엄마를 만났지요."

그의 나이 스물 네 살, 여자는 서른 두 살로 여덟 살이나 연상이었다.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이 셋을 낳았지만, 남편의 폭행이 워낙 심해 이혼을 하고 나왔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아내에게) 이야길 들어보니, '저 양반은 손이 없으니 때리진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와 함께 살 마음을 먹었다고 하더군요. 손 없는 덕에 아내를 얻은 거죠. 하하."

가정을 이뤘지만 장애의 몸으로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던 그의 떠돌이 생활은 계속됐다.

"별의별 짓을 다 했지요. 손이 없으니 남의 것을 가져올 수 없어 도둑질만 안 했다 뿐이지 건달 생활도 오래 했지요."

마산에서 삼랑진을 오가는 열차 안에서 도시락과 군밤, 땅콩, 신문 등을 팔았다. 그러는 사이 서서히 그를 따르는 장애인이나 건달도 생겨났다. 일종의 '거지왕초'가 된 것이다.

"요즘은 아예 열차 안에서 그런 장사를 못하지만, 그 땐 공안요원의 단속에 맞서 싸우면서 했죠. 그 과정에서 불상사도 많았고요. 고무튜브 질질 끌면서 수세미나 고무줄 파는 것도 내가 개발했어요. 앵벌이의 일종이었는데, 전국에 못들어 간 곳이 없었죠. 부산 광복동, 대구 동성로, 서울 영등포 역앞까지 진출하기도 했죠."

이런 생활을 하는 동안 아내는 미영 씨를 비롯해 4남매를 낳았다. 그러나 집에서 아이들만 키우고 있을 순 없었다. 팔과 눈이 없는 남편을 따라 함께 떠돌아다녔다. 게다가 당시엔 장애인에게 선뜻 방을 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미영 씨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마산 내서읍 중리의 한 경노당에 방 한 칸을 얻었다. 경노당 청소 등 관리를 해주는 조건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미영 씨의 이모에게 아이들을 맡겨두고 객지를 떠돌아 다녔다. 그런데, 그 이모라는 사람이 미영 씨에게는 평생 씼을 수 없는 상처를 주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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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기록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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