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옛날 여자들은 어떻게 벚꽃놀이를 했을까

김훤주 2011. 4. 1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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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책을 뒤적거리다가 아마도 1960년대거나 아무리 늦잡아70년대로 보이는 사진을 하나 봤습니다. 진해 군항제에서 '아낙'들이 노는 장면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람한 소나무 즐비한 가운데 멀리 꽃이 피어 있는 벚나무가 있고요 그 한가운데서 아홉 명 여자들이 춤판을 벌이고 있습니다. 장구가 두 채 꽹과리가 하나 동원이 됐습니다. 북이나 징은 보이지 않습니다.

먹을 것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지만, 아무래도 이 아낙들 또한 먹을거리를 싸 갖고 왔을 것입니다. 길거리는 아니겠고요, 어쩌면 지금은 옮겨갔지만 진해 육군대학 안쪽 같은 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풍경이 제게는 낯설지 않습니다.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에 10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 시절에 제가 어머니 치마 꼬리를 잡고 가서 본 풍경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머니는 신명이 없고 노래도 잘 못해 흥겹게 노시지는 못했고 그래서 이런 자리를 즐기시지도 않았지만, 한 번쯤은 이런 자리에 나가곤 했으며 그러면 막내인 저를 끼워넣으셨습니다.

제 기억에는 어머니 따라갔던 꽃놀이 자리가 두 군데 남아 있습니다. 하나는 창녕군 영산면 함박산이고요 다른 하나는 성춘향과 이몽룡으로 이름난 전북 남원시 광한루랍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노는 모양과 견줘보면 많이 다릅니다. 80년대부터 사람들은 확성기 틀어놓고 유행가 가사에 맞춰 흥청거렸습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 그러했다고 저는 기억합니다.

물론 꽹과리나 장구 같은 물건은 간데 없이 사라졌고요, 확성기에서는 악기 반주 소리까지 흘러나오니까 다른 악기도 이제는 필요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옷차림도 달라졌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이런 데 가실 때는 한복을 잆으셨는데요, 돈이 따로 들기에 늘 그리하셨는지는 장담을 못합니다만, 미장원에서 머리를 '고데'로 손질하신 적이 있었다고 기억이 돼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놀러 간다고 미장원에 들러 일부러 머리를 손질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지요. 놀러 다니기를 예전에는 크게 마음을 먹어야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 아닐까요.

물론 유리창이 시커멓게 돼 있는 관광버스 안에서 노래를 확성기로 틀어놓고 마구 흔들어대는 막춤이 없어지지 않았겠지만, 이처럼 공공연하게 노는 판을 펼치는 경우는 없어진 것 같습니다.

이것은 짐작일 따름이지만, 이렇게 공공연하게 노는 판이 없어진 배경에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이른바 '성숙한 시민의식' 따위만 있지는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노래방의 존재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노래방 기기들의 발빠른 확산이 그것입니다. 노래방도 곳곳에 널려 있을 뿐 아니라 관광지나 유흥지의 횟집 같은 대형 음식점에 가면 이런 기기들을 대부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활짝 흐드러진 꽃판 잘 구경하는 자리에서 저리 나서 즐기지 않아도 되게 된 셈입니다. 주린 배를 술과 밥으로 채우면서 노래방 기기를 벗 삼아 노는 것입니다.

이러고 보면 저 사진 하나에도 당대 현실이 담겨 있고, 그 당대 현실이 지금과 비교 또는 대조가 되면서 이런저런 변화를 짐작하게 해 줍니다. 

출판사 '뿌리깊은 나무'에서 1983년 5월 10일 펴낸 <한국의 발견/한반도와 한국 사람 '경상남도'편> 382쪽에 있습니다. 이 사진에 대한 설명은 이렇습니다.

"군항제 때에 벚꽃을 즐기려고 모여 든 아낙들이 한번 '놀아 보는' 풍경(마이클 오브라이언 사진). 진해의 봄 축제인 군항제는 4월 초순에 열린다. 이 순신의 정신을 기림과 함께 벚꽃의 아름다움을 즐길 뜻으로 만들어진 이 행사 기간 동안에는 진해 시가지가 시장 바닥처럼 붐빈다."

더불어, 4월 8일 저녁 지난해 낙동강 사진 전시 활동을 함께했던 진해의 '실비단 안개'님이 불러서 진해 갔던 사진을 몇 장 올립니다.

창원역에서 오후 4시 59분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갔는데요, 진해역에서 내려 경화역 만나는 장소까지 옮겨갔습니다. 벚꽃이 장관이어서 진해 시가지가 온통 꽃으로 만든 배 같았습니다.

마찬가지 낙동강 사진 전시를 함께했던 달그리메랑 같이 갔는데요, 셋이는 벚꽃일랑 대충 보고 대신에 경화시장 들어가 정구지전과 명태전에 막걸리를 마시고 국수를 곁들이는 데 열을 내었습니다.

진해역에서 만난 어르신들. 노란옷 '롯데여행사' 표지를 든 사람을 따라 기차를 타고 돌아가려고 기다리는 장면입니다.

진해역 맞은편 모습입니다.

경화역 안쪽 풍경입니다. 대구로 향하는 기차이지 싶습니다.

마찬가지 경화역 사진입니다.

이런 사람도 있네요. 어떤 이는 꽃 꺾는 사람이 "배은망덕하다"고 했습니다. 꽃으로 즐거움을 누리는 은혜를 입고도 꽃에게는 자연스레 시들 기회조차 빼앗는 해코지를 한다는 말입니다.


행여나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한국의 발견/한반도와 한국 사람 '경상남도'편>에서 진해 군항제와 진해 벚나무에 대해 적어놓은 대목을 옮겨놓아 봅니다. 

382~383쪽 기사는 이렇습니다.

"진해가 벚꽃으로 나라 안에 이름을 들날리게 된 것은 이미 말했듯이 제국주의 일본 때문이다. 그들은 진해를 자기들의 도시로 바꾸려고 벚나무를 심고도 모자라 아예 오늘날에 통제부가 자리잡은 땅의 한 귀퉁이를 '사꾸라 마찌' 곧 벚나무 숲으로 가꾸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정성들여 가꾼 진해의 벚나무는 해방이 되자 잠깐 수난을 당했다. 그것은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니 이 땅에서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서서 마구잡이로 베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벚나무가 정확한 이름인 이 벚나무가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남쪽 지방에서도 흔히 자생한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진해의 벚나무들은 가까스로 다시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오늘날에 진해에서 자라는 벚나무는 오만사천 그루쯤이다.

진해의 벚꽃은 대체로 4월 초순부터 피기 시작한다. 이곳보다 더 따뜻한 남해안의 섬 지방에서는 이미 벚꽃이 피었을 때쯤이건담 이 나라 사람들은 흔히 진해에서 벚꽃이 피어야 비로소 다른 곳의 벚꽃도 피기 시작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듯하다. 그것은 아마도 제국주의 일본이 진해의 벚꽃이야말로 본격적인 봄 소식을 알려 주는 반가운 꽃인 것처럼 떠들어 댔던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버릇이겠다. 벚꽃의 속성이 워낙 그러하듯이 진해의 벚꽃도 꽃망울이 제법 부풀었는가 하면 어느새 만개하여 여린 바람에도 꽃잎을 눈처럼 떨구어 진해 시가지를 온통 하얗게 뒤덮는다.

진해의 봄 축제인 군항제는 이 벚꽃이 다투어 피고 지는 사이에 열린다. 대체로 4월 5일부터 4월 20일까지 사이의 열닷새에 걸쳐서 열리는 이 행사 기간 동안에는 진해 시가지에 벚꽃잎처럼 인파가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린다. 1963년에 이 나라 해군이 가장 높이 떠받드는 이 순신의 정신을 기림과 함께 벚꽃의 아름다움을 즐길 뜻으로 만들어진 이 축제는 해군 통제부의 갖가지 지원을 받아 별 뼈대는 없으나마 다채로운 행사로 꾸며진다. 이를테면 강강술래나 충무공 추모제 같은 것이 베풀어지는가 하면 바둑 대회, 낚시 대회, '노래 자랑' 같은 것도 곁들여진다. 그런데 군항제를 여는 동기가 된 이 순신의 정신과 제국주의 일본이 심은 벚꽃은 아무래도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어서 어쩌다가 이 행사의 성격에 관심을 갖는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차피 이런 종류의 행사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럴듯한 명분은 제쳐두고 우선 흥청거리는 즐거움을 맛보게 하는 뜻도 지니는 것이라면, 거기에다가 무리지어 피는 벚꽃의 화사함마저 함게 누릴 수 있는 진해의 군항제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 나라 사람들의 아낌을 받는 봄 축제로 남아 있을 듯하다.

그리고 앞서 376쪽과 377쪽에는 진해에 벚나무가 심긴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376쪽입니다.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이 땅을 넘보던 1900년에 이 나라 정부에서는 러시아의 요청에 못 이겨 그때에 율구미라 불리던 오늘날의 마산항 한 귀퉁이를 러시아에 조차하여 그곳에 동양 함대의 역탄 저장소와 해군 병원을 짓도록 허가하였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안 일본이 우리 정부에 그 조치를 취소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나섬과 함께 오히려 자기 나라에서 오늘날의 진해 땅을 사들여 군항을 건설할 수 있도록 허가하라고 강요했다. 허깨비처럼 무력했던 구한국 정부는 처음 얼마 동안은 국제 신의를 내세워 짐짓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율구미를 조차한 지 한해 만에 마침내 일본의 뜻을 받아들이고야 말았다.

그래서 그 이듬해인 1902년부터 일본은 진해를 군항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진해에 항만 시설이 완성되기 전인 1904년 2월에 노-일 전쟁이 터지자 일본은 진해를 전쟁에 나간 일본 해군에게 군수물을 대는 후방의 기지로 삼는 한편으로 항만 공사를 더욱더 서둘렀다. 그래서 1905년 4월에 오늘날의 육군대학 자리에 진해만 요항 사령부를 설치하였고 이어 1907년 10월에는 오늘날의 한국 함대 사령부 자리에 진해 방비대를 들어앉혔다. 곧 나라를 제국주의 일본에 빼앗기기 세해 전에 이미 진해는 제국주의 일본의 해군 세력이 굵은 뿌리를 내린 땅이 되었던 것이다."

이어서 377쪽입니다.

"그러나 진해가 오늘날과 같이 도시 계획이 잘 된 도시로 완전히 모습을 바꾸게 된 때는 면(마산부 진해면)에서 읍으로 된 1910년이다. 아마도 그때의 일본 사람들은 진해를 완벽한 일본 사람들의 도시로 만들고 싶었던지 이 나라의 어떤 도시보다도 더욱더 정성을 들여 도시 계획을 했는가 하면 가로수를 모두 벚나무로 심었다. 그러고는 시내 중심지에는 일본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살도록 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묵은 주택가인 여좌동과 태백동은 말할 것도 없고 상가가 즐비한 충무로 4가 5가, 6가에는 낡은 일본식 집이 많이 남아 있다."

광주에서 학살을 저지른 전두환 선수가 폐간시킨 월간지 <뿌리깊은 나무>에서 기자로 일했던 설호정이라는 이가 쓴 글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귀가 맞아떨어지고 단정하기까지 한 글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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