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30년 경력 노동운동가가 활동 접은 사연

김훤주 2011. 3. 7.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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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대표적인 노동운동가 가운데 한 사람이 활동을 접었습니다. 아내의 발병과 생활고 때문입니다. 최은석 전국금속노동조합 경남지부 부지부장(동명모트롤지회 소속).
 

최은석 금속노조 경남지부 부지부장은 2월 14일 노조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부지부장직을 '사퇴'했다고 알렸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부지부장이 아닌 셈입니다.

최 부지부장은 여기서 "2009년 12월 부지부장에 당선돼 지부에 파견나왔는데 소속된 사업장 단협이 해지된 상황이라 노조 활동이 인정되지 않고 부득이 무급휴직으로 부지부장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며 "그러나 최근 아내의 병고로 더 이상 지부 임원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됐습니다"고 밝혔습니다.

최 부지부장은 이어 "지난해 12월 제 여동생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뒤 아내가 원인을 알 수 없는 극심한 두통에 시달려오게 되어 아내를 돌보는 일에 전념할 수밖에 없고 언제까지 치료를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습니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또한 수입이 거의 없어 계속되는 과중한 병원 비용을 감당하기도 어렵게 됐습니다"며 "지부에 파견 나온 1년 2개월 동안 주변 동료들에게 도움 받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하기에 부득이 회사로 복귀하게 됐습니다" 라 했습니다.

2009년 금속노조 경남지부 선거 당시 최은석 부지부장 홍보 포스터.


최 부지부장은 고교 중퇴 학력으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비서를 지냈습니다. 앞서 1979년 10월 마산수출자유지역 삼양광학에 입사해 노조 결성에 나섰다가 1980년 4월 해고됐습니다. 

그 뒤 신부가 되려고 가톨릭 수도원에 들어가 있다가 코리아타코마조선에 다시 들어갔습니다. 마산 양덕성당에 다니던 김명숙(54)씨와 1981년 11월 25일 결혼했는데 당시 급여가 너무 적어 1982년 5월 시험을 쳐서 거제 대우조선으로 일터를 옮겼습니다.

대우조선서 최 부지부장은 노동운동을 벌였습니다. 6월 항쟁과 뒤이은 7·8·9월 노동자 대투쟁이 터지기 전인 1987년 4월 노조 결성에 나섰다가 해고가 됐습니다. 

대우조선 노동조합은 그 해 8월 11일 결성되지만 최 부지부장은 계속 해고자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89년 임금투쟁에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당시 노사는 해고자 문제는 1년 동안 계열사로 갔다가 복직하되 구체 내용은 김우중 대우 회장과 직접 교섭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최 부지부장은 "거제도는 떠날 수 없다"고 했고 김 회장은 "그러면 대우조선 비서실에 있으면 되겠네"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 부지부장은 90년 9월부터 1년 동안 비서실에서 김 회장과 가까이에서 지냈습니다.

그룹의 의도는 이렇게 해서 최 부지부장을 바꾸는 것이었겠지만 그것이 먹혀들지는 않았습니다. 1992년 11월 13일 대우조선 노조 제5대 위원장으로 취임한 것입니다. 

이에 앞서 아내 김명숙씨는 도저히 거제도에서는 살 수 없다면서 창원으로 옮겨갔습니다. 남편인 최 부지부장은 그래도 노동운동을 해야겠다면서 거제에 남아 3년 가까이 주말 부부로 지냈답니다.

아내 김씨가 거제를 뜬 데에는 최 부지부장이 당한 고초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최 부지부장은 1987년 해고를 전후해 사용자로부터 납치를 당한 적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게다가 1989년 임금투쟁 때는 상황실장을 맡고 있다가 지역 깡패들에게 납치당해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쇠파이프에 얻어맞고 여관에 끌려갔는데 (나를) 찾으러 나온 조합원들한테 당한 깡패들이 횟칼을 들고 와서 죽이려 했는데 다행히 경찰이 들이닥쳤습니다."

최 부지부장은 구속도 여러 차례 됐습니다. 1987년 해고 과정에서 한 차례, 같은 해 창원지검 충무지청 항의 방문 갔다가 한 차례, 1991년 파업이 금지된 방위산업 부서에서 파업을 이끌었다가 또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구속됐을 때는 병으로 구속 집행 정지가 됐다가 다시 구속되는 곡절을 겪기도 했습니다.

최 부지부장이 두산모트롤의 전신인 동명중공업으로 옮긴 때는 1995년 4월. "창원에 가도 충분히 운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이 바뀌어 자영업이라도 하려고 사표를 냈더니 그동안 괴롭힌 데 대한 '일말의 무엇'이 있었는지 취업 알선을 회사가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 당시 대우조선에 51% 지분이 있던 동명중공업에 사무직으로 오게 됐습니다."

최 부지부장은 오자마자 노조에 가입했습니다. 유일한 사무직 조합원이었답니다. 그런데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가입하자마자 동명중공업 노조가 민주노총에 가입하고 96년 노동법 재개정 투쟁에 열성으로 나섰습니다. 

그런데 97년에는 조합원 자격이 없는 과장으로 최 부지부장이 진급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노조는 1998년 과장에게도 노조 가입 자격을 주도록 규약을 바꿨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을 보면, 이 사이 노사간에 적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2002년 노사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져 현장직으로 옮긴 최 부지부장은 앞서 99년부터 교육선전부장을 했고 교선부장 같은 집행부 일을 맡지 않았을 때는 대의원 활동을 했습니다. 

이 같은 일은 조합원이 8000명 선인 대우조선이라는 대규모 노조에서 우두머리에 해당되는 위원장을 했던 이로서는 보기 드문 행보입니다.

"우리나라 노동운동 역사는 일천합니다. 대기업이거나 전국적인 뭔가를 했다 해도 경험이 소중한데 그 경험을 실무에서나 현장에서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러면 배신입니다. 

위원장을 했다면 그것을 하면서 얻은 모든 것을 다시 돌려야 합니다. 운동은 공공의 전체의 자산입니다. 노동운동은 왜 합니까? 위원장 한 번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러던 최 부지부장이 운동을 떠났습니다. 3월 2일자로 공장에 들어갔습니다. 동명모트롤 단위 노조에서도 활동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노조 활동을 하면 그에 해당하는 시간에 대한 급여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산모트롤 사용자가 2008년 10월 단체협약 해지를 통보했고 2009년 4월부터는 단체협약에 보장돼 있던 노조 활동을 거의 대부분 인정하지 않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아내 김명숙씨가 오랜 세월 벌여온 남편의 노동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크게 받았다고 최 부지부장이 여기는 것도 중요한 이유랍니다. 

"2010년 12월 25일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는데 이런저런 병원에서 조사를 했는데도 병명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무 이상이 없다는데 계속 아팠습니다. 

진통제만 맞고 통증이 심해 잠도 못자고 눈이나 코로 증상이 옮겨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2월 14일 부산백병원에서 수술했는데 뇌에 있는 주먹 반 개정도 크기 염증에서 고름을 덜어냈습니다. 일단 안정이 된 것 같기는 한데……."

1999년부터 노조 활동을 함께 해온 손송주(46) 동명모트롤지회장은 이런 최 부지부장을 두고 "노동자다운 관점과 철학이 있는 선배"라면서 "거들먹거리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고 크든 작든 전체 노동자를 위하는 일이라면 어떤 자리든 마다지 않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산모트롤 사용자가 단체협약을 해지하지 않고 노동조합 활동만 보장해 줬더라도 생기지 않았을 일입니다. 이 글 읽으시는 여러 분들 생각은 어떠신지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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