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졸업한 학교 왜 30년 가까이 안 찾았을까

김훤주 2011. 3. 2.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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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8일 제가 졸업한 대구 대건고등학교를 다녀왔습니다. 졸업한지 29년만입니다. 그 동안 한 번도 찾지 않았습니다. 말로는 대건학교를 사랑한다면서 말입니다.

제가 졸업한 대건고등학교는 지금 자리 학교가 아닙니다. 저는 남문시장 지나(지금도 30년 전과 마찬가지로 허름하더군요) 한 10분 걸어가면 나오는 지금 대구가톨릭대학교 건물들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했습니다.

왼쪽에 있는 성당 건물은 양쪽이  잘려 있었습니다. 다른 건물들 들이세우느라 그랬겠습니다. 제가 고3 시절을 보냈던 별관 건물은 없어지고 다른 건물이 있었습니다.

앞에 있던 연못도 사라졌습니다.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동상은, 그대로였지만, 그 사이 김대건 신부가 복자에서 성인으로 승격하는 바람에 '복자(福者)'가 '성(聖)'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1954년 세워졌다는 김대건 신부 동상. 왼쪽 벤치 자리에 옛날 식수대가 있었습니다.


1학년과 2학년이 썼고 1층에 교무실이 있었던 본관은 그대로였습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 교구청 별관 건물로 쓰이는 모양이었습니다.

대건중학교와 대건고등학교 경계에 있었던 실내체육관은 제가 졸업할 때는 뚜껑을 못 올린 미완이었는데, 지금은 완공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칠해진 색깔은 그 안목을 낮춰 보게 만들었습니다.

체육관 건물.


본관 오른쪽 우리들 가끔 담배를 피우던 변소들은 없어졌습니다. 대건학교 변소는 자랑거리였습니다. 선배나 선생들이 이래라저래라 시키지 않았는데도 전혀 낙서가 없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우리 학교 변소만 이렇다고 은근히 자랑스럽게 여기곤 했는데요, 지금 옮겨간 대건학교 변소들도 마찬가지 낙서가 전혀 없는지 좀은 궁금합니다.

저는 대건학교를 사랑합니다. 천주교 계열 학교라 그랬는지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공부만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고3이 돼서도 우리는 방과 후에 '담배 내기' 야구나 축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동안 학교를 한 번도 찾지 않았을까, 스스로 생각해도 알 수 없었는데, 이번에 찾아가 둘러보면서 그 까닭이 짐작이 됐습니다.

둘러보는 곳곳에서 옛날 기억이 났습니다. 학교 정문도 그대로였는데, 여기서부터 저는 옛날에 당했던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그다지 많이 당한 편이 아닌데도 그랬습니다.

옛날 학교 정문이 문패만 바뀐 채 그대로였습니다.


정문 통과는 아침마다 긴장시켰습니다. 복장이나 인사 불량으로 붙잡혀 벌서거나 맞는 일이 한 번씩 있었는데, 저는 그것이 싫어 선도부(善導部)가 정문 지키기 전인 아침 일찍 안개를 밟으며 등교하기도 했습니다.

고3 때는 제가 선도부에 차출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정학을 먹는 바람에 금방 그만뒀지만, 정문 지키는 선도부 대열에 어색하게 뻘쭘하게 끼여 있었던 제 모습은 그야말로 '개그' 수준이지 싶습니다.

선생의 오해로 유기정학을 먹은 때가 고3 3월말이었습니다. 그 뒤 한 달도 안 돼 제가 책임질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났고 이를 두고 학생부장은 저를 두고 '학교 명예 실추'를 이유로 퇴학시켜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담임 선생은 이리저리 알아보신 모양인지 저를 연못가로 불러내 말씀했습니다. "니 잘못은 아닌 것 같더라. 1학년 2학년 지낸 것 보니 괜찮은 놈 같은데. 걱정마라. 니를 자르려면 내 먼저 잘라라 그랬다."

덕분에 잘리지 않았습니다. 탈없이 졸업하고 대학에도 갔습니다. 학교를 이곳저곳 돌아보면서 옛날 잔인한 기억들이 줄줄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강당으로 쓰였던 이 성당 앞에 연못이 있었고, 고3 때 담임 선생이 거기로 불러 걱정말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운동장을 보니까 1학년 때 교장 선생의 훈화 폭력이 떠올랐습니다. 그 때는 월요일마다 전체 조회를 했는데, 당시 교장 선생은 기분에 따라 훈화가 엄청 길어지곤 했습니다.

느닷없이 전교생 1800명을 모이게 해놓고는 "아~~ 저기 버들 나뭇가지마다 연둣빛이 스며들었습니다! 아~~ 진정 봄입니다." 이렇게 제 기분을 내는 때도 있었습니다.

운동장에서 학생 1800명이 교장 선생 뜻없는 훈화가 쏟아지는 아래 20분 30분 지겨움에 몸부림을 쳤지만, 교장 감탄사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평교사들도 대부분 싫어하는 훈화 폭력이었습니다.

운동장은 교장 선생의 훈화폭력이 있었던 곳, 왼쪽 1층 들머리는 꿇어앉아 있던 곳. 2층 왼쪽에서 세 번째 교실은 기억하기에 가장 끔찍한 폭력이 일어났던 곳.


4층짜리 본관을 보니 그 시절 제가 듣고 보고 겪었던 갖은 폭력이 구름처럼 일어났습니다. 제가 본 폭력은 아주 많지만 가장 심한 폭력은 이렇습니다.

교단 앞에서 손바닥으로 뺨을 맞기 시작한 학생은 주춤주춤 자꾸 물러났고, 선생은 따라가면서 1분단과 2분단 사이, 2분단과 3분단 사이, 3분단과 4분단 사이를 지나 뒷문 근처에서 학생이 자빠질 때까지 때렸습니다.

교실은 공포였습니다. 폭력의 원인은 선생의 오해였습니다. 불려나간 학생은 자기의 '시~ 번 했다"는 말이 그렇게 만들 줄 몰랐습니다. '대~한민국' 할 때 '대'를 늘여 소리를 내는 '시~ 번'은, '세 차례'라는 말입니다.

짝지가 하품을 찢어지게 했습니다. 아이들 평소 장난대로 이 친구는 손가락을 하품하는 입에 집어넣었습니다. 빠른 속도로 세 번 잇달아 집어넣고 뺐습니다. 그러고는 웃으면서 '시~ 번 했다" 했습니다.

순간 선생이 이 친구를 불러냈습니다. 아마 자기 쓰는 사투리에 자격지심이 컸던 모양입니다. 이 선생 발음이 꼭 '세'라 하지 않고 '시~'라 했거든요. '손목시계도 끌르지 않고' 다짜고짜 두드려 패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폭력의 기억의 뇌관이 곳곳에 묻혀 있었습니다. 1층 교무실 들머리는 제가 아무 잘못 없이 1교시와 2교시와 3교시와 4교시와 점심 시간을 지날 때까지 꿇어앉아 있었던 자리입니다.

2학년 때 몸이 아파 결석했을 뿐인데(그리고 집에서 결석계를 써 갔는데도) 담임 선생은 저를 불러 아무 확인도 없이 꿇어앉혔습니다. 저는 제가 모르는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나 여기면서 내내 불안에 떨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많은 선생들이 지나갔습니다. 몇몇을 뺀 대부분은 손이나 출석부로 머리를 두드리고 지나갔습니다. 어떤 선생은 일부러 일으켜 세워 뺨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먼저 "여기 왜 이러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했는데, 이것이 어쩌면 선생들에게 더 거슬렸는지도 모릅니다. "임마 모르기는 뭘 몰라"라는 말이 매질과 함께 왔기 때문입니다.

담임은 5교시 시작할 때 저를 세웠습니다. 청소실에 가서 밀대 자루를 뽑아오라고 했습니다. 뽑아온 밀대자루로 제 엉덩이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밀대 자루는 세 개가 부러져 나갔습니다. 제가 몸은 말랐지만 맷집은 있는 편이었습니다. 국민학교 시절 2년 남짓 교실 공부는 않고 운동선수를 한 덕분입니다. 

덜 아프게 맞는 방법도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선생의 매가 닿기 직전에 엉덩이를 살짝 들어올림으로써, 때리는 사람의 힘이 집중되기 전에 맞아버리는 것입니다.

영문도 모르고 맞았는데, 맞고 나서 까닭이 전날 결석임을 알았을 때는 정말 허탈했습니다. 선생한테 감기로 결석했다는 큰형의 확인서(결석계)를 줬습니다. 수돗가에 가서 꼭지를 있는대로 틀고는 머리를 박고 펑펑 울었습니다.

이번에 가서 보니
식수대는 뜯겨나가고 그 자리에 벤치가 있었습니다. 당시 한 여자 선생이 제게 와서 어깨를 두드리며 달래주기도 했는데,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졸업한 학교 찾아간 이번으로 옛날 폭력의 기억들이 떨쳐질 것 같기도 합니다. 평소 의식되지 않았던 제 기억 속에 그토록 많은 폭력의 기억이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는데, 이번에 모두 표면으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오해를 막기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당시 이런 정도 폭력은 '양반'이었습니다. 제가 다닌 대건학교는 선생 폭력이 적은 편이었습니다. 제가 흥사단을 했는데, 다른 학교 학생들과 얘기하면서 알 수 있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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