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언론

언론, 언론인이라고요?

김훤주 2008. 2. 20.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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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지만, 저는 언론 또는 언론인이라는 말을 쉽게 쓰지 못합니다. 1990년대 후반, ‘리영희’ 선생 저작에서, 보도매체 또는 보도매체 종사자라고 일러야 맞다는 취지로 쓴 글을 읽은 뒤로 그렇게 됐지 싶습니다.

도덕 냄새가 짙게 배어 있는 낱말, '언론'

리영희 선생 글은, 제 기억에는, 아마도 조금은 ‘도덕’의 냄새가 났던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지금 신문.방송이 제대로 언론 노릇을 하고 있느냐 하는 다그침입니다. ‘언론’은 무엇인가를 놓고 그 옳고그름을 글(또는 말)로 이치에 맞게 제대로 따져 밝히는 일입니다. 사실관계 보도도 똑바로 못하면서 무슨 언론이고 언론인이냐, 이렇게 제게는 읽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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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언론노조 깃발입니다. 그러나 '매체노조'가 더 정확하지 않을까요?

언론이라는 말에서는 지사(志士)스러운 풍모도 느껴집니다. 지부상소(持斧上疏) 있지 않습니까. 임금이 잘못했을 때, 자기 머리 내리칠 도끼를 스스로 지고, 상소를 올리는 선비의 꼬장꼬장한 모습 말입니다.

언론과 언론인에서는 이처럼 개인의 사사로운 이해를 떠나 천하를 위해(滅私奉公) 옳음을 지키고 삿됨을 물리친다(衛正斥邪)는 분위기가 꽤나 드세게 풍깁니다. 경술국치로 조선 왕조가 무너졌을 때 자결한, 매천 황현의 마지막 같은 풍모 말입니다.

제가 '언론인'이라고요?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오래 전부터 언론이라는 말 대신 매체(媒體) 또는 보도매체 또는 미디어(media)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사실 하는 일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보면, 매체 또는 미디어라 일컫는 편이 가장 적당하기도 하고요. 또 제가 몸담고 있는 일터를, 스스로 언론이라 하면은 적지 않게 낯이 간질간질하기도 해서 그랬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언론이라 하고 나아가 자기까지 언론인이라 하는 것은, 좀 폭력적으로 단순화하자면, ‘우리가 지사다운 일을 하니까 너희들은 마땅히 존경해야 한다.’고 스스로 떠드는 꼴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게다가 보도매체가 언론이 되려면, 언제나 옳아야 하며(그러나 누구든 어떤 집단이든 언제나 옳기는 불가능합니다) 언제나 서슬도 시퍼래야 합니다. 또 사실 보도에서 그치면 안 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한 차례도 시류에 쓸리면 안 되며, 날카로운 칼날로 시비(是非)를 가리고 꼿꼿한 기준으로 포폄(褒貶)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일이 쉽지 않음을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더욱더 절감하고 있습니다. 언제가 될는지는 모르지만, 그 날카로운 칼날에 제가 다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글러서 다칠 수도 있고-그러면 억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날카로운 칼날이 글러서 다칠 수도 있습니다-이럴 때는 아주 억울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언론 또는 언론인이라는 말을 쓰기가 더 어렵습니다.

'언론'노조를 넘어 '매체'노조로

‘전국언론노조’가 있습니다. 들으니 1988년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을 만들 때 이름을 두고 이런저런 얘기들이 있었답니다. 언론이라 하느냐 아니면 미디어라 하느냐. 그러다가 결국 ‘언론’이 주는 고상한 느낌-다르게는 무어라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을 좇아 언론노련이라 이름을 정했다고 합니다.(지금은 산별 단일노조로 전환해 언론노조라 합니다만.)

느낌은 이렇습니다. 조선시대 언론삼사(言論三司)가 있었습니다. 감찰을 주로 하는 사헌부와 간언(諫言)을 많이 맡아한 사간원, 임금에게 자문하던 홍문관이 그것입니다. 글로 논한다는, 언론이란 말의 뿌리도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언론은 그러니까 봉건시대에 생겨난 개념으로, 어떤 절대 권력에도 굽히지 않아야 하며 목숨을 걸고라도 바른 소리를 내야 하는 일입니다. 아주 대단한 사람이 하는 훌륭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언론인입니다. 언론인이라는 낱말에서 저는 노동자성(性)을 느끼지 못합니다. 지사 풍모만 떠오릅니다. 그러나 요즘 언론.언론인의 모습을 보노라면, 연암 박지원이 쓴 ‘범의 꾸중(虎叱)’에 나오는, 겉과 속이 완전 다른 도학자 북곽 선생보다도 더하다는 생각만 자꾸 커집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언론’은 ‘노조’와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규모가 크든작든, 성격이 공공이든 민간이든, 자본에 고용돼 밥벌이를 하는 종업원들이 사회.경제.정치.문화적으로 제대로 살아보자고 하는 몸부림이 바로 노조입니다. 근본 바탕이 자본에 고용된 종업원 신분임을 똑바로 인정하지 않는 언론인이 어떻게 이런 노조를 하겠습니까?(이런 관점에서, ‘언론’과 ‘언론인’ 대부분이 노조와 그 활동을 적대적으로 보도하는 것이 때로는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노조와 어울리기로는 매체가 으뜸입니다. 지금 있는 ‘전국언론노조’도 영자로는 ‘National Union of Mediaworkers(내셔널 유니언 오브 미디어 워커스)’입니다. 매체 근로자들의 전국 조합이라는 뜻입니다. 신문.방송이나 뉴미디어 종사자뿐 아니라 인쇄.출판 종사자까지 들어와 있으니 가장 합당한 이름이라 하겠습니다.

언론노조도 언젠가는 노조 이름에서 ‘언론’을 떼어내고 ‘매체’로 바꿔 달아야 하리라 저는 여깁니다. 그러면서 보도매체 종사자들의 언론인 연(然)하는 태도도 언젠가는 가시고 말 것이다 저는 여깁니다.

김훤주(전국언론노동조합 경남도민일보지부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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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지음 | 산지니 펴냄
『절망 사회에서 길 찾기』는 변화하는 진보가 가야 할 길을 시시각각 모색하고, 그것을 현장에서 찾는다는 것을 모토로 삼아 만든 무크지 <현장>의 첫 번째 결과물이다. 두 꼭지의 좌담과 현장 활동가 6인의 글을 통해서 노무현 정권 5년을 평가하고, 이명박 정부 5년의 진보운동을 전망해본다. 이데올로그들의 논평이 아닌 현장 노동자와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을 초심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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