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20년만에 열린 한 노동운동가의 추모행사

기록하는 사람 2010. 10. 6.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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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소담(昭潭) 노현섭 선생은 마산시 구산면 안녕마을 출신으로 일본 중앙대 법과를 졸업한 인텔리였다.

마산보통상업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그는 한국전쟁 이후 3개 부두노조를 통합한 단일지역노조인 대한노총 자유연맹 마산부두노조를 결성,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이와 함께 그는 마산자유연맹 위원장과 전국자유연맹 위원장으로 한국 노동운동을 주도했으며, 노동자 자녀를 위한 마산고등공민학교와 노동병원을 설립·운영하기도 했던 마산노동운동의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다.

또한 6·25 때 친형인 노상도 씨가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된 후, 1960년 3·15의거로 학살책임자인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자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운동에 뛰어들어 마산유족회와 경남유족회를 결성한 데 이어 전국유족회 회장을 맡았다.

이 때문에 1961년 박정희 일당의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다음날인 5월 17일 곧바로 연행되어 이른바 '혁명재판소'의 판결로 징역 15년형을 받았다. 혐의는 '용공(容共)', 즉 빨갱이 딱지였다.

그런 '빨갱이 딱지' 때문에 그는 마산이 낳은 전국적인 노동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였으며 진보정치인이었지만, 오랫동안 지역에서조차 조명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의 활약이나 업적이 활자화해 기록된 것은 경남도민일보와 졸저 <토호세력의 뿌리> 정도가 유일할 정도였다.

1968년 교도소에서 병보석으로 풀려나왔을 때 그의 일본 중앙대학 동창등이 마련해준 자리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맨 왼쪽이 노현섭 선생.


이런 그를 추모하는 행사가 지난 2일 오후 6시 마산M호텔에서 열렸다. 지난 7월 진실화해위원회의 재심 권고에 따라 서울중앙지법에서 50년만에 무죄판결이 난 것을 축하하는 자리이자, 그동안 그의 업적을 조명하지 못해 안타까워 해온 사람들이 마련한 자리였다.

그가 누명을 쓰고 쿠데타정권에 구속된 지 50년 만의 일이며, 1991년 옥살이 후유증으로 숨진 지 20년 만에 열린 행사였다.

이날 모임 또한 중요한 '기록'이라 생각하여 여기 올려둔다.


이날 모임에서는 빈약하나마 그의 일생을 소개하는 동영상이 제작, 상영됐다.


노현섭 선생이 결성한 마산부두노조의 후신인 항운노조 위원장을 역임한 황창규 씨가 회고담을 하고 있다.


무학여중고 서익수 재단이사장도 참석했다. 그 역시 회고담을 했다.


경남대 김재윤 전 교수이다. 이번 모임의 대표를 맡아 행사를 준비했다.


재야사학자이자 경남도민일보 홍중조 전 논설실장이 노현섭 선생을 소개하고 있다. 옆에 걸어내려오고 있는 옆모습의 인물은 이번 행사의 사회를 맡은 극단 마산의 이상용 대표다.


노현섭 선생의 차남 노치웅 씨다. 그는 이번 법원의 재심에 원고였다.


김재윤 교수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이순항 전 대표이사다. 이순항 대표는 실질적으로 이날 행사를 발의한 주역이었다.


전체 행사장 모습이다. 약 90여 명이 모였다.

이날 행사를 계기로 노현섭 선생의 평전 발간작업과 계승사업이 본격화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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