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별 의미없는 것

훤주라는 내 이름이 '흰주'라고 불릴 때

김훤주 2010. 10. 7.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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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은 훤주(萱柱)입니다. '훤'은 '원추리'라는 야생풀을 뜻하고 '주'는 '기둥'을 이릅니다. 저는 제 이름에 그럭저럭 불만이 없는 편이지만 석연찮거나 속이 상하는 구석이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제대로 발음을 하지 못할 때는 속이 좀 상했습니다. 이제 돌아가신지 25년이 됐지만 할아버지께서는 제 이름을 당신 손으로 지어놓으시고도 발음은 제대로 하시지 못했습니다. '훤주'라 하시지 못하고 언제나 '훈주', '훈주'라 하셨습니다.

1. 은행 창구 직원은 "김흰주씨"라 부르고

물론 제가 이런 것 때문에는 속상해하지를 않습니다. 그런 정도는 참을만하다는 말씀입니다. 옛날 은행 창구에 통장을 맡기고 기다렸다가 이름을 부르면 찾아가 돈을 받거나 넣거나 하는 시절 일입니다.


은행 창구 직원이 제 이름을 "김훈주씨"라 하면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김흰주씨", 또는 "김휜주씨"라 하면 낯이 붉어졌습니다. 허여멀건한 '흰죽'이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김흰주'라는 창구 직원의 호출이 떨어지는 순간 같은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한꺼번에 눈길을 제게 던졌기 때문입니다. 참 별난 이름도 다 있구나 하는 표정으로 말입니다.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2006년 지금처럼 저희 경남도민일보에서 시민사회부 소속이었는데 무슨 제보를 담은 소포가 '김흔주'를 수취인으로 해서 왔습니다. '김흔주'는 바로 저를 이른 것이었습니다. 하하.

2. 어떻게 기둥을 풀로 만들 수 있나

이런 점은 제가 좀 마땅찮아하거나 석연찮게 여긴 구석입니다. '훤'과 '주'가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생각했습니다. 기둥(주)이라면 튼튼해야 할 텐데, 들풀-원추리로는 기둥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 이름이 독특하기 때문에, 누구든 한 번 들으면 어지간해서는 잊히지 않는 특징도 있습니다. 좋은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저더러 공직 선거에 한 번 나서보라 권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사람들한테 기억이 잘 돼 두 번째는 될 가능성이 높지 않느냐" 이러면서요.

3. 그건 아름다운 기둥이라는 뜻이야

그런데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을 만나는 일이 생겼습니다. 2004년 7월 16일입니다. 저희 경남도민일보가 경남은행과 함께 이이화 선생 초청 강연회를 마련했는데 제가 김해공항까지 모시러 간 것입니다.

창녕 남지 개비리길에서 찍은 사진. 저는 야생에서 이리 무리지어 핀 원추리를 다른 데서 본 적이 없습니다.


공항에서 마산으로 오는 길에 '노무현 대통령 생가'를 알리는 도로 표지판을 모신 모양입니다. 저더러 "대통령 생가가 멀어?" 물었습니다. 저는 "가깝습니다." 대답을 했습니다.

시간 되면 한 번 들렀다 가자고 했습니다. 일부러도 보러 오는데, 이렇게 지나는 길에 보면 좋지 않느냐 하시면서요. 저는 제가 몰던 자동차 방향을 틀어 김해 진영 봉하마을로 달려갔습니다. 

이이화 선생은 감회가 남다른 것 같았습니다. 마을을 이리저리 둘러보시고 생가에도 들어가 보시고 집 뒤에 있는 사자바위도 올려다 보시고 했습니다. "사자바위 기상이 대통령을 낳았네" 혼잣말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이화 선생은 2002년 12월 대선에서 노무현을 찍었으리라 짐작했습니다. 저는 물론 당연히 노무현을 찍지 않았습니다. 떨어지든 말든 권영길을 찍었지요. 

그렇다고 이이화 선생이 이상하고 다르게 보인 것은 아닙니다. 정치에 대한 견해나 노선은 누구나 언제나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개무량해 하시는 모습에서 그런 애정이나 관심이 읽혔을 따름이지요.

그러면서 문득 고개를 돌려 "자네 이름이 어떻게 되나?" 물었습니다. "김훤주라고 합니다." "한자로 어떻게 되지?" "원추리 훤자에 기둥 주자를 씁니다." "자네 이름이 괜찮아, 좋은데."

영주 소수서원에서 찍은 원추리 사진. 길가는 사람한테 안길 듯이 피어 있습니다.


저는 이이화 선생의 이름 좋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제가 제 이름에 대해 들었던 말들은, '이상하네'라든지 '발음하기 어렵다'든지 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리둥절 까닭을 여쭸습니다.

"훤은 원추리니까 아름답다는 뜻이 되고 주는 기둥이니까 튼튼하고 굳세다는 얘기잖아. 아름다우면서도 튼튼하니까 얼마나 좋아." 이러셨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나서 저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더 좋아졌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나서 제 이름에 대해 석연찮아하던 태도를 완전히 바꿀 수 있었습니다.

별것 아니지만, 지난 7월 9일 창녕 남지 낙동강이 아름다운 개비리길에서, 그리고 7월 16일 불쑥 찾아간 영주 소수서원에서 거기 나름 무리지어 피어 있는 원추리를 보면서 이런 옛날 일이 떠올랐습니다.

이이화 선생이 제 생각을 고치도록 해 주셔서 고맙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입가에 작으나마 웃음을 한 번 머금어 볼 수 있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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