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이름은 훤주(萱柱)입니다. '훤'은 '원추리'라는 야생풀을 뜻하고 '주'는 '기둥'을 이릅니다. 저는 제 이름에 그럭저럭 불만이 없는 편이지만 석연찮거나 속이 상하는 구석이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제대로 발음을 하지 못할 때는 속이 좀 상했습니다. 이제 돌아가신지 25년이 됐지만 할아버지께서는 제 이름을 당신 손으로 지어놓으시고도 발음은 제대로 하시지 못했습니다. '훤주'라 하시지 못하고 언제나 '훈주', '훈주'라 하셨습니다.

1. 은행 창구 직원은 "김흰주씨"라 부르고

물론 제가 이런 것 때문에는 속상해하지를 않습니다. 그런 정도는 참을만하다는 말씀입니다. 옛날 은행 창구에 통장을 맡기고 기다렸다가 이름을 부르면 찾아가 돈을 받거나 넣거나 하는 시절 일입니다.


은행 창구 직원이 제 이름을 "김훈주씨"라 하면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김흰주씨", 또는 "김휜주씨"라 하면 낯이 붉어졌습니다. 허여멀건한 '흰죽'이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김흰주'라는 창구 직원의 호출이 떨어지는 순간 같은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한꺼번에 눈길을 제게 던졌기 때문입니다. 참 별난 이름도 다 있구나 하는 표정으로 말입니다.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2006년 지금처럼 저희 경남도민일보에서 시민사회부 소속이었는데 무슨 제보를 담은 소포가 '김흔주'를 수취인으로 해서 왔습니다. '김흔주'는 바로 저를 이른 것이었습니다. 하하.

2. 어떻게 기둥을 풀로 만들 수 있나

이런 점은 제가 좀 마땅찮아하거나 석연찮게 여긴 구석입니다. '훤'과 '주'가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생각했습니다. 기둥(주)이라면 튼튼해야 할 텐데, 들풀-원추리로는 기둥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 이름이 독특하기 때문에, 누구든 한 번 들으면 어지간해서는 잊히지 않는 특징도 있습니다. 좋은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저더러 공직 선거에 한 번 나서보라 권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사람들한테 기억이 잘 돼 두 번째는 될 가능성이 높지 않느냐" 이러면서요.

3. 그건 아름다운 기둥이라는 뜻이야

그런데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을 만나는 일이 생겼습니다. 2004년 7월 16일입니다. 저희 경남도민일보가 경남은행과 함께 이이화 선생 초청 강연회를 마련했는데 제가 김해공항까지 모시러 간 것입니다.

창녕 남지 개비리길에서 찍은 사진. 저는 야생에서 이리 무리지어 핀 원추리를 다른 데서 본 적이 없습니다.


공항에서 마산으로 오는 길에 '노무현 대통령 생가'를 알리는 도로 표지판을 모신 모양입니다. 저더러 "대통령 생가가 멀어?" 물었습니다. 저는 "가깝습니다." 대답을 했습니다.

시간 되면 한 번 들렀다 가자고 했습니다. 일부러도 보러 오는데, 이렇게 지나는 길에 보면 좋지 않느냐 하시면서요. 저는 제가 몰던 자동차 방향을 틀어 김해 진영 봉하마을로 달려갔습니다. 

이이화 선생은 감회가 남다른 것 같았습니다. 마을을 이리저리 둘러보시고 생가에도 들어가 보시고 집 뒤에 있는 사자바위도 올려다 보시고 했습니다. "사자바위 기상이 대통령을 낳았네" 혼잣말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이화 선생은 2002년 12월 대선에서 노무현을 찍었으리라 짐작했습니다. 저는 물론 당연히 노무현을 찍지 않았습니다. 떨어지든 말든 권영길을 찍었지요. 

그렇다고 이이화 선생이 이상하고 다르게 보인 것은 아닙니다. 정치에 대한 견해나 노선은 누구나 언제나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개무량해 하시는 모습에서 그런 애정이나 관심이 읽혔을 따름이지요.

그러면서 문득 고개를 돌려 "자네 이름이 어떻게 되나?" 물었습니다. "김훤주라고 합니다." "한자로 어떻게 되지?" "원추리 훤자에 기둥 주자를 씁니다." "자네 이름이 괜찮아, 좋은데."

영주 소수서원에서 찍은 원추리 사진. 길가는 사람한테 안길 듯이 피어 있습니다.


저는 이이화 선생의 이름 좋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제가 제 이름에 대해 들었던 말들은, '이상하네'라든지 '발음하기 어렵다'든지 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리둥절 까닭을 여쭸습니다.

"훤은 원추리니까 아름답다는 뜻이 되고 주는 기둥이니까 튼튼하고 굳세다는 얘기잖아. 아름다우면서도 튼튼하니까 얼마나 좋아." 이러셨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나서 저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더 좋아졌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나서 제 이름에 대해 석연찮아하던 태도를 완전히 바꿀 수 있었습니다.

별것 아니지만, 지난 7월 9일 창녕 남지 낙동강이 아름다운 개비리길에서, 그리고 7월 16일 불쑥 찾아간 영주 소수서원에서 거기 나름 무리지어 피어 있는 원추리를 보면서 이런 옛날 일이 떠올랐습니다.

이이화 선생이 제 생각을 고치도록 해 주셔서 고맙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입가에 작으나마 웃음을 한 번 머금어 볼 수 있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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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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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www.facebook.com/osaekri 정덕수 2010.10.07 0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훤주 라는 성함을 우리말로 풀으면 원추리 대궁이 되겠군요.
    저 아름다운 원추리에 코스모스의 그것과 같은 가느다란 줄기가 받치고 있다면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모두 고개를 꺾겠지요. 그런데 당찬 기둥과 같은 줄기가 지탱하니 얼마나 든든한가요. 이런 줄기라야 대궁이란 말을 들을 수 있다 싶습니다.
    성함 정말 좋습니다.

  2. 유림 2010.10.07 10: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 기자님 이름이 좀 어렵지요 부르기가..그래서 이름을 부르기전 먼저 오물거린뒤 입 밖으로 말을 합니다.

    전 작년에 개명을 하였답니다. 집안 어르신들이 지어준 이름이 내내 불만이였는데
    한번도 이름 좋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어서 나름 이름 열등감이 있던 것을 나이 마흔이 넘어 싹 바꾸고 나니
    체증이 내려가는 듯 아주 기분이 좋았답니다.

    물론 지금도 개명한 이름이 참 좋아요

    불러주는 사람도 내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준다면 더 좋겠지요?

    저도 남들에게 김기자님 이름을 말할때 좀 이상하게 발음을 했던 것 같네요 ㅎㅎ
    죄송합니다 ^^

  3. 실비단안개 2010.10.07 13: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페이지를 열어두고 두 시간이 됐는지 넘었는지 그렇게 됐습니다.
    페이지 열어두고 빨래 널고, 농협 마트 장 보고 - 낮술 한 잔 하고.^^

    개비리길에서 원추리를 담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여 저는 그 모습을 담았었지요.

    처음에 김주완, 김훤주 - 두 분이 헷갈려, 무식하다는 말을 들을까봐 혼자 이 블로그를 '주주클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잘 압니다.^^

    뜻을 몰랐을 때도 이름이 좋았습니다.
    제 이름이 흔하여 딸래미 이름을 전화 번호부에 없는 이름으로 짓는다고 고민했었고요.
    그러다보니 아이 둘 다 남자 이름 같기고 하고, 여자 이름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날이 서늘하여 일하기도 좋고 놀기도 좋습니다.^^

  4. Favicon of http://lovessym.tisotyr.com 크리스탈 2010.10.07 16: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훤자가 원추리 훤자였군요...
    저는 이름이 독특해서 좋다고 생각했어어요.. ㅎㅎㅎ

    저는 어렸을때 제 이름이 너무 흔해서 싫었는데
    흔한건 그만큼 이름이 좋다는 얘기라고 마음을 고쳐먹으니까 좋아지대요. ㅎㅎㅎ

  5. 정운현 2010.10.07 17: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좀 독특한 이름도 나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기억시키기엔 좋다고 봅니다.
    저는 사진 속의 꽃이 야생나리꽃인 줄 알았는데, 이게 원추리꽃이군요.
    이름의 뜻을 알고보니 더욱 친근감이 듭니다.
    '훤주'라는 이름에 자부심을 가지세요..^^

  6. 염좌 2010.10.07 2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특히 경상도 사람들이 정확하게 발음하기 어려운 글자이지요~ㅎ
    부르기 쉬운 이름도 좋은 이름이지만 타인에게 각인이 잘 되는 이름도 좋은 이름인거 같네요
    한자풀이도 다양하게 좋은 뜻으로 풀이되니 좋은 이름 가지고 계신듯~~~ㅎㅎㅎ

  7. Favicon of http://sunbee.tistory.com/ 선비 2010.10.08 09: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 아침 님 덕분에 한번 웃어 봅니다.
    그런데 흰주는 어떤 꽃일까요???

  8. Favicon of https://100in.tistory.com 김훤주 2010.10.10 10: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 적어 주신 모든 분들께 고맙다는 말씀 올립니당~~~~

    하나하나 답글 달려니 제가 낯이 좀 간지러워서리~~

    늘 건강하세요~~~

  9. 손훤주 2013.12.15 20: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이름도 훤주라서ㅇ몇개공감하고 갑니다ㅋ

  10. Favicon of http://www.naver.com 성원아 2015.05.29 15: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왜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