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비굴해질 각오없이 시외버스 타지 마라

기록하는 사람 2010. 4. 20.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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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에서 시외버스로 내 고향인 남해까지 가려면 보통 2시간 정도 걸린다. 명절이나 주말에 고속도로가 밀리면 3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중간에 들르는 휴게소가 없다는 것이다. 소변이라도 마렵게 되면 정말 낭패다. 물론 휴게소에 들어가지 않는 대신 경유지인 하동군 진교 터미널에서 잠시 정차한다. 급할 경우 여기서 퍼뜩 화장실을 다녀오지만 그러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버스 타는 사람들의 말못하는 고통

그날 나는 진교에 버스가 닿자마자 운전석 앞으로 나가 아주 비굴한 표정으로 "저~ 화장실 좀 다녀오면 안될까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날따라 진교에서 내리고 타는 승객이 한 두명 뿐이었고, 말하는 사이 버스 문은 닫히고 있었다.

버스 기사는 시간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황당했다. 더 강력히 말해야 했지만, 다른 승객들의 눈치와 내 특유의 소심함 때문에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다시 자리로 되돌아오는 심정은 비참하고도 모욕적이었다. 초등학생이 수업시간에 화장실 가겠다는 청을 선생님으로부터 거절당한 심정이 이럴까. 다 큰 40대 중년남자는 그렇게 다시 40분을 참아야 했다.

청주-마산간 시외버스 내부.


그런 경험이 15년 동안 딱 두 번 있었다. 두 번 째는 첫 번 째의 거절당한 경험 때문에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 때도 보기좋게 거절당했다. 물론 앞으로는 승객의 당당한 권리로 요구하여 반드시 소변을 보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이상의 글은 3년 전인 2007년 5월에 내가 썼던 칼럼 '확 운전면허를 따버릴까' 중 일부이다. 물론 지금도 나는 자가용이 없고 면허증 또한 없다. 마산-남해간 시외버스는 지금도 여전히 휴게소를 거치지 않는다. 진교정류소에서 소변이라도 볼라치면 그 때마다 비굴한 부탁을 해야 한다.

며칠 전 충북 청주에 중부매일 사원과 기자들을 대상으로 뉴미디어 환경 적응을 위한 강의를 다녀왔다. 강의를 마친 후 중부매일 지용익 사장님과 편집국장, 그리고 기자들과 함께 족발에 막걸리를 몇 잔 걸친 게 화근이었다.

중부매일 식구들과 함께 먹은 족발과 막걸리. 이게 화근이었다.


아시겠지만 청주는 KTX가 지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지 않는 한 시외버스 외에는 마산과 오갈 방법이 없다. 막차인 저녁 7시 버스를 탔다. 버스에 오르기 전 화장실을 다녀왔지만, 출발한 지 30분이도 지나지 않아 서서히 요의(尿意)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쩔 수 있나. 중간에 휴게소에 도착할 때까진 참을 수밖에…. (술 마시고 버스 탄 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청주와 마산은 시외버스로 3시간 20분이 걸린다. 그래서 중간에 한 번은 휴게소에 들르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이놈의 차가 출발한 지 두 시간이 다 되도록 휴게소에 들어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아뿔사! 그러고 보니 마산에서 청주로 갈 때도 시외버스는 휴게소에 들르지 않았었다. 그 때는 별로 요의가 없었으므로 별 문제도 없었다.

걸핏하면 휴게소 무시하는 시외버스

아이폰을 켜고 다음 지도를 열었다. 버스는 선산휴게소를 한참 지난 상태였다. 다음 휴게소를 찾아보니 남성주휴게소는 또 한참 남은 거리였다. 답답한 마음에 트위터로 이런 글을 날렸다. "고속버스로 청주에서 마산 가는중. 두 시간이 다됐는데 휴게소를 무시하고 달리는 버스. 소변은 터지려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ㅠㅠ"

트위터 친구들 중 일부는 재미있어하며 놀리는 멘션을 주기도 했고, 일부는 진지하게 조언을 해주신 분도 있었다.

"너무 진지모드지만...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건 많지요. "누군가 하겠지." 또는 "알아서 하겠지" 때문에 생기는 원망. 화장길 갔다 가자고 말씀하세요." (@indehana)

용기를 내서 운전석 앞으로 걸어나갔다. "저~, 휴게소 안 들르나요? 좀 급한데." 운전기사 왈, "그럼, 쉴까요?"

드디어 도착한 남성주휴게소. 내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여기도 그냥 지나칠 뻔 했다.


좀 허탈한 반응이었지만, 어쨌든 이렇게 하여 해결했다. 사소할 수도 있는 이런 이야기를 굳이 쓰는 이유는 그나마 내가 뻔뻔해진 40대 후반 아저씨였기에 망정이지, 나보다 소심하거나 순진한 사람들은 과거의 내 경우처럼 속으로만 고통을 참는 경우도 없지 않으리란 걱정 때문이다.

전국으로 강의다 토론회다 하여 출장이 많은 나로선 대중교통을 누구보다 많이 이용하는 편이다. 그런데, 고속버스는 그렇지 않은데, 이른바 시외버스는 대부분 이렇다. 안전벨트 착용 안내방송도 거의 없고, 들르도록 되어 있는 휴게소도 승객의 동의 한 번 묻지 않고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자꾸 이러면 나같은 사람도 확 운전면허를 따버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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