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누나의 3월 : 비루한 욕망과 남루한 폭력

김훤주 2010. 4. 2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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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마산 3·15 의거를 다룬 <누나의 3월>이 18일 밤 전국 방송을 탔습니다. 3월 27일 마산MBC 권역 방송을 했을 때 전국 방송을 하기가 쉽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4월 혁명 기념일 4월 19일을 하루 앞두고 이렇게 방송에 나왔습니다. MBC가 고맙군요.

저는 3월 26일 마산 MBC 아트센터에서 한 시사회에 가서 봤습니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기 때문에 정식 방송으로는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래도 전국 방송에 때맞춰 당시 제게 들었던 느낌을 좀 얘기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 잘 짜인 드라마에서 50년 전 상황을 아주 잘 구현해 냈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엉뚱하게도 제 감수성이 시대에 뒤떨어졌음과, 욕망에 대한 남자의 비열함과, 폭력에 대한 인간의 남루함을 느꼈습니다.

1. 시대에 뒤떨어진 나의 감수성

드라마는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위해 부정 선거를 제대로 저지르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주인공인 다방 레지 양미도 선거 부정에 동원됩니다. 악질 경찰 박종표와 부정선거 무효 시위를 이끈 민주당 간부는 둘 다 양미랑 관련이 돼 있습니다.

양미가 공개 투표를 하고 나오는 길에 민주당 간부가 항의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자유당 사람들에게 얻어터집니다. 이어서 민주당 당원들과 시민들과 학생들이 시위를 벌입니다.

시위대는 나중에 경찰에게 폭행 당하며 해산이 됩니다. 80년 광주에서 일어난 그런 폭행이 여기서도 화면을 채웁니다. 양미는 숨고, 시위 학생은 쓰러진 채 질질 끌려 나갑니다.

학생들 시위 장면. 마산mbc 제공.

이런 모습이 드라마 초반에는 곳곳에서 나오는데, 이상하게도 저는 한 군데도 빠짐없이 눈물이 나왔습니다. 아마도 저의 체세포에 유전자처럼 새겨진 80년대의 기억 때문일 것입니다.

전두환 지배하던 그 때도 20년 전 마산에서와 마찬가지로 정권에 맞서는 시위가 잇달았고 그것을 진압하는 폭력이 저질러졌습니다. 그 때 그 상황이 전해주는 공포와 긴장이 저를 그렇게 만들었지 싶습니다.

2000 하고도 10이 더해진 2010년에도, 정신과 육체가 예전과는 견줄 수도 없을 정도로 세상이 자유로워진 지금에도 그런 유전자가 박혀 있는 제가 싫었습니다. 이제는 좀 떨쳐졌을 텐데, 하고 머리는 생각하지만, 몸이 그렇게 말을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2. 욕망에 대한 남자의 비열함

악질 경찰 박종표는 양미를 집적거립니다. 양미는 김주열 열사 어머니 권찬주 여사를 만나기 전에는 이 박종표에게 끊임없이 휘둘립니다.

박종표가, 경찰에 잡혀 있는 양미 동생 양철을 빌미삼아 자꾸자꾸 집적거립니다. 한편으로는 양미가 '아는 안면'에 박종표를 찾아가 매달린 탓도 있습니다만.

남자의 성욕과 여자의 성욕은 그 발현하는 양태가 다르다고들 합니다. 여자는 제가 잘 모르지만, 어쨌거나 남자의 성욕은 좀 너저분한 구석이 있습니다. 남자의 성욕은 대상이 없어도 흘러내립니다. 대상이 없어도 흘러내려야 하는 그게 저는 너저분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단순합니다. 여기서 단순하다는 좋은 뜻이 아닙니다. 마음이 동반하지 않아도, 몸만으로도 성욕이 발동되고 흘러내리도록 발현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성욕의 발현에 도움이 된다면, 갖은 짓을 다할 수도 있는 것이 남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 드라마에서 양미와 박종표의 관계 설정은, 인간 박종표의 악랄함을 드러내는 데에 아마 초점이 맞춰져 있을 것입니다. 자기 욕망을 위해서는 갖은 더러운 짓을 다해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자는 취지이지 싶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남자 일반의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제가 평소에도 여성을 편드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남자를 욕보이는 생각까지 자주 하는 것은 아닌데, 그 때는 어쩐지 그랬습니다.

박종표는 자기의 단순하고도 너저분한 성욕을 채우기 위해, 양미 동생 양철이 경찰에 잡혀 있는 상황을 악용합니다. 박종표는 양철의 석방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고 또 미치려고 애를 쓰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조건으로 양미에게 성관계를 강요합니다.

박종표는 양미가 동생 양철의 석방을 위해 힘써달라며 들고 온 돈을 돌려 보냅니다. 대신 자기하고 함께 자기를 요구합니다. 양미는 이것을 첫 번째는 당연히 거절하고 두 번째 또한 당연히 체념을 한 채로 끌려갑니다.

양미와 박종표. 제 기억으로는, 첫 번째 거절하고 돌아가는 장면입니다. 마찬가지 마산mbc 제공.

양미와 양철의 비참한 상황을 악용해 자기 성욕을 채우는 박종표는 더할 나위 없이 비열합니다. 그런데 그런 장면을 보면서, 우리 남자들은 누구나 다 저런 비열함을 조금씩은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자가 여자한테,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무엇을 빌미로 삼아 자기 성욕을 실현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닐까, 여겼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돈을 빌미 삼아, 어떤 때는 사랑을 빌미 삼아, 어떤 때는 폭력을 빌미 삼아, 어떤 때는 부부이거나 애인임을 빌미 삼아, 전혀 그런 것을 바라지 않는 상대방에게 자기 성욕을 들이다댄다는 것입니다.

3. 폭력에 대한 인간의 남루함

폭력은 인간을 옹졸하게 만듭니다. 제대로 맞아본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폭력 앞에 의연한 인간은, 제가 생각할 때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하, 저는 좀 제대로 맞아본 사람에 포함됩니다.

폭력은 인간을 쪼그라들게 만들 뿐 아니라 비굴하게도 만듭니다. 사람이 오로지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만 신경을 쓰는 모습이 옹졸함이라면, 오로지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목적만으로도 머리를 조아릴 수 있음은 비굴함입니다.

자기가 전혀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날아드는 주먹과 발길을 멈추게 하기 위해 잘못했다고 빌고, 또 상대방은 자비를 베풀 생각이 전혀 없는데도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은 비열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모습을, 저는 경찰에 잡혀간 양철에게서 절실하게 봤습니다. 연기를 나름대로 잘했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굴복시키는 가장 강제적인 방법이 폭력입니다.

저는 그 가장 강제적인 방법이 동원되는 현장에서 공포를 느낍니다. 그러나 아울러 그 가장 강제적인 방법은 절대 인간을 굴복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어리석음을 봅니다.

강제적인 방법은, 폭력은 절대 사람 마음을 사로잡지 못합니다. 사람은 마음이 굴복해야만 몸도 진정으로 굴복이 됩니다. 이런 사실을 지배집단이라 해서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당장 눈 앞 이익 실현에 목을 매면 이런 폭력이 서슴 없이 행해지고 맙니다.

50년 전에도 폭력이 저질러졌습니다. 그런데 슬픈 것은 그런 폭력이 지금도 저질러진다는 것입니다. 2008년 촛불 국면에서, 많은 시민들이 진압 경찰의 폭력성과 잔인함에 분개를 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민주노조로 조직된 노동자들은 대부분, 일반 시민들의 그런 반응을 제일 처음에는 별로 이해를 못했습니다. 자기네들이 일상으로 겪는 폭력이 더 심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가 한층 진전된 지금 2000년대에는, 이윤 창출의 원천이 되는 노동자에게 폭력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지배집단의 유형 무형 폭력으로 인간성이 말살된 그이들의 노동이, 우리 사회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남루한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4. 서울 출신 지식인의 약해빠짐

시사회를 마치고 <누나의 3월>을 제작한 허성진 PD를 잠깐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시사회에 오라고 전화로까지 얘기하셨기에 갔는데, 가니까 또 한 번 "이렇게 몸소 오시다니……" 말씀하셔서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래도 제가 속으로 마뜩찮다 여긴 구석이 있었기에 한 말씀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드라마에서 민주당 간부로 나오는 이-나중에 양미랑 결혼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였습니다.

이 사람은 서울에서 마산으로 왔다고 설정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서울말을 쓰게 돼 있었겠지요. 서울말을 쓰면 대부분 사람들은 어쩐지 우아하고 뭔가 있어 보인다고 여깁니다. 경상도 사투리는 그 반대이고요.

이 사람은 부정선거가 저질러진 3월 15일 당시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거리 시위를 이끕니다. 그러다 경찰에 잡혀가 죽도록 얻어터지고 양철보다 앞서 풀려납니다. 그런 다음에는 드라마에서 별 역할이 없습니다.

이를 두고 저는 "그 사람이 드라마에서 서울 사람이 시골로 '내려와' 뭔가 계몽을 하는 그런 느낌이 들게 했다"는 투로 얘기했습니다. 지역 사람에게조차, 서울에 대한 피지배 종속 관계가 내재화돼 있지 않느냐는 문제 제기였습니다.

허성진 PD는 마치 그런 따위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딱 잘라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시종일관 나약한 캐릭터로 나와요. 그리고 드라마를 제대로 보면 다 나와 있듯이 사태는 마산 사람들이 주도를 했어요. 오히려 서울 출신 지식인의 약해빠진 한계를 보여주는 전형이지요."

저는 싸움의 기술을 다는 모르지만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압니다. 자기가 잘못했거나 자기보다 센 상대를 만나면 바로 인정을 해버린다는 것입니다.

허성진 PD는 제 잘못을 바로 짚었고, 그래서 저보다 세었습니다. 저는 바로 인정하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입가에 웃음을 문 채로, "아! 맞네요……" 이랬습니다. 하하.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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