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글을 읽으면서 탄복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화려찬란한 입심이 부럽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나는 발버둥이쳐지지 않는 발버둥이를 버둥거리다가 잠에서 깨어났다."처럼, 말장난에 그치는 때도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그런 글에는 김훈에게 고유한 숨결과 손결이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자전거 여행> 22쪽, '꽃피는 해안선' 부분입니다.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오리를 치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 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참 멋집니다.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따위 표현에서 힘이 느껴집니다.
어쨌거나,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절정'이라는 김훈의 관점에서 보자면 오늘 제가 찍은 이 목련은, 오르가즘이 한 차례 지나가 버린, 그러나 여전히 몸매는 아름다운, 그러한 청춘 남녀처럼도 보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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