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공정 무역' '착한 소비'라고? 소가 웃는다"

김훤주 2010. 2. 22. 09:15
반응형

"요즘 세상은 하도 비정상이 정상인 듯 판을 치다 보니 그 비정상과 약간만 차별화한 것만으로도 특별 대접을 받으려 한다. '공정무역'이니, '윤리적 소비'니 '착한 초콜릿'이니 심지어 '착한 여행' 등으로 이름 붙인 신상품들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무슨 의도인지 이해를 해줄 수는 있겠지만…. 똑같은 에너지를 낭비 파괴하고 그만큼의 이산화탄소를 내놓는 국제무역이면서 생산자에게 주원료 값만 조금 더 주고 사다 가공해서 판다고 공정한 것은 아니다.

상대적 윤리성이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런 소비를 미화하다 보면 마침내 시장과 자본주의도 미화하는 자승자박이 될 것이다. 소비에 꼭 윤리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다면 그것은 (지역)자급소비밖에 없을 것이다."

"만성적인 식량 부족국인 제3세계 농민들의 한(恨) 자체인 카카오(초콜릿 원료)에 돈을 조금 더 주었다고 '착한 초콜릿'이 되겠는가?

이 같은 속임수는 쓴 카카오 원료에 설탕 칠갑을 해서 달콤 고소한 초콜릿으로 둔갑시켜 온 세계 청소년들의 주머니와 이를 녹여내는 다국적기업보다 오히려 더 위선적이 아닐까?

진정으로 착한 일은 초콜릿의 이름을 거듭 새로 개발해서 카카오 생산 농민들을 세계 시장에 영원히 종속시키기보다 오히려 초콜릿 불매운동과 함께 식량 부족국들의 식량 자급도를 높여줄 새로운 방략을 찾아주는 것이 아닐까?"

"'착한 초콜릿'이라니? 초콜릿을 생산한 사람이 상대적으로 착하다는 말인 줄은 알겠는데 그것을 수출하고 수입하는 공정무역과 '공정무역 여행'을 한다고 기름이 안 들고 환경오염이 안 되는가?

공정무역으로 득 본다는 제3세계 농민들의 향상된 생활의 내용이 무엇을 뜻하며 또 그것이 진정한 향상인지 생각해 보았는가?

20~30% 더 받은 돈으로 공정무역 아닌 다국적 기업의 세계 무역의 식량 등 수입품을 더 소비하는 것이 향상된 생활인가?

(공정무역품이 생필품 아닌 기호품으로 제한되어 있으니까 그것을 수출한 현지 주민들은 그 돈으로 대부분의 생필품을 세계 시장에서 사야 한다.)

제3세계의 경제적 약자들이 잘사는 나라의 NGO 등의 시혜에 언제까지나 의존하는 타율적인 삶도 진정으로 잘 사는 삶인가?"

이런 정도 대목만 들여다봐도 <천규석의 윤리적 소비>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훤하게 나타납니다.

지금 세계 시장을 그대로 인정하는 어떠한 공정무역도 공정하지 않으며 어떠한 착한 소비도 착하지 않다는 얘기랍니다. 오히려 세계 자본주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노릇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관점의 뿌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기획하는 새로운 공동체는 이 산업사회의 모든 기득권으로부터 벗어나 농업이 중심 산업이 됨으로써 지속이 가능하면서도 만인이 자유롭고 평등한 자급·자립·자주·자치 공동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그 어떤 '공정 무역'이나 '착한 소비'도, 자본주의 세계 질서가 관철되는 세계 시장을 확대·강화·유지·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할 뿐인 것입니다.

천규석 선생은 이를 위해 창녕 남지에 공생농두레농장을 열었습니다.

"소농두레공동체는 (다른 대부분 생태주의 공동체가 사회주의적인 공동체인 반면) 부분적인 공유와 함께 당시의 사회 규범에 어긋나지 않는 제한된 범위에서의 사적 소유도 인정한다.

큰일은 공동으로 하는 것이 개인에게도 유리하겠지만 작고 소소한 일은 사적으로 노동하고 소유하게 한다. 농지를 사적으로 구입 못 했거나 공동체에 늦게 들어와 자기 몫의 농지를 분배받지 못한 일부 구성원들에게는 공동 분배분이 있겠지만, 사적 분배가 원칙이다. 이 점에서는 전통 마을 두레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 공동체 운동은 대체로 실패라는 평가를 받는 모양입니다. '공생농두레 농장'의 지금 식구 숫자가, 다른 유사한 생태주의 공동체보다 너무 적다는 측면에서요.

천규석은 사회주의적으로 운영되는 다른 생태주의 공동체의 한계를 짚음으로써, 실패하는 이 공동체 운동을 끊임없이 지치지도 않고 하는 까닭을 풀어놓는답니다.

"시장을 부정하고 생태적 지속을 추구한다는 이런 공동체도 내부적으로는 공산주의적이지만, 식구를 먹여 살리고 영토를 확장(?)해가기 위해 외부적으로는 시장 지향적이다.

생태적으로 지속 불가능한 산업주의 생산방식으로 닭과 돼지와 소를 길러 달걀과 고기를 외부 시장에 팔아 그 공동체를 유지 또는 확장해 간다.

그러나 시장에 의존하는 산업사회주의 공동체, 개인을 국가에 예속시키는 산업사회주의 국가는 실패한 유산일 뿐 아니라 우리가 지향하는 지속 가능한 사회나 자급과 자치의 공동체와 크게 배치된다."

그러므로 공생농두레 농장의 끊임없는 실패는요, 실패가 아닌 성공이랍니다. 이 운동의 실패는 공생농두레 농장의 사라짐 말고는 없습니다.

실현되지 못하는 꿈을 실행하는 천규석 선생은 1938년 경남 창녕 영산 출생입니다.

천규석 선생.

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곧장 농촌으로 돌아온 '생태적 농경공동체 재건 운동가'입니다.

이런 그이에게 국가는 생태적 지속을 불가능하게 하는 시장과 함께, 반드시 극복하거나 지양돼야 할 대상일 따름입니다.

그런데요 이런 관점에 서면 역사도 달리 새롭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중앙집권화 이전의 소국 연맹으로 마감한 가야는 내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이상 사회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그 이상에 근접한 사회라 할 수 있다.…… 비슷한 조건의 신라와 백제는 보다 일찍이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로 전환하여 국경을 정하고 민중 지배의 강화로 나아간다.

이에 비해 가야의 지배층은 국경 내의 피지배층에 대한 지배의 강화보다 지역 간의 교류 확대를 통해 자신의 생존 전략을 확장해 갔다. …… 가야의 정체성은 국가 대신 연맹 단계의 교역이되 그 교역은 자연적 수운에 따른 생태적 문화적 교역이라는 것이 가야 사회가 가진 또 하나의 미덕이었다."

산뜻한 관점에서 나온, 상큼한 해석이라고 여겨지지 않으시는지요? 실천문학사. 399쪽. 1만5000원. 

김훤주

천규석의 윤리적 소비 - 10점
천규석 지음/실천문학사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