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좋은 시 읽는 기쁨과 좋은 일 겪는 즐거움

김훤주 2010. 1. 4.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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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해 첫날 저녁에 만난 좋은 시

그저께 새해 첫날 저녁에 이런 시를 들었습니다. 처음 들을 때는 제목조차 몰랐는데요, 다 듣고 저리는 바가 있어 쳐다봤더니 '다리 저는 사람'이라 돼 있었습니다.

저는 이 시를 읽고 기가 막혔습니다. 할 말을 잃었습니다. '정말 좋다'는 말을 빼면요. 사물과 딱 달라붙어 있어서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마치 그림을, 소리없이 돌아가는 동영상을 보는 듯합니다.

'절창(絶唱)'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빼어나지 않은 구석이 한 군데도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구절구절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습니다. 있어야 할 자리, 있어야 좋은 자리에 놓이지 않은 낱말도 전혀 없습니다.

설명이나 해설을 붙이면, 오히려 군더더기가 될 것 같은 작품입니다. 좀 심하게 말씀드리자면, 이런 작품이 있다는 것은 한국문학에 대한 축복이다, 이런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한 마디로, 제가 완전 반한 것이지요. 하하.

꼿꼿하게 걷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춤추는 사람처럼 보였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그는 앉았다 일어서듯 다리를 구부렸고
그 때마다 윗몸은 반쯤 쓰러졌다 일어났다
그 요란하고 기이한 걸음을
지하철 역사가 적막해지도록 조용하게 걸었다
어깨에 매달린 가방도
함께 소리 죽여 힘차게 흔들렸다
못 걷는 다리 하나를 위하여
온 몸이 다리가 되어 흔들어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기둥이 되어 우람하게 서 있는데
그 빽빽한 기둥 사이를
그만 홀로 팔랑팔랑 지나가고 있었다

꼿꼿 걸음 요란 기이 적막 조용 빽빽 기둥 같은 말들. 특히 "어깨에 매달린 가방도/ '함께' '소리 죽여' '힘차게' 흔들렸다"나, "못 걷는 다리 하나를 위하여/ 온 몸이 다리 하나를 위하여 흔들어주고 있었다."도 있고요.

이 시를 듣다 보니 두어 달 전 제가 본 풍경이 생각났고 그날 느낀 감동까지 새삼 솟아났습니다. 아침 아홉 시를 갓 지난 시각, 경남 창원 반송동 대동 그린코아 앞 도로에서였습니다. 차로가 왕복으로 여섯 개입니다.

2. 창원 어느 건널목에 실현된 평화

반송대동아파트 쪽에서 맞은편 봉곡시장으로 가는 건널목이 열렸습니다. 초록불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자동차를 탄 채로 자동차가 달리는 신호가 어서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팡이.

지팡이를 짚은 장애인 한 분이 길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나이까지 드신 분이었습니다. 허리는 구부정해 있었고 머리는 아래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다리를 재게 놀리기는 했지만 불편한 다리는 더디 가게 만들었습니다. 얼마 안가 다른 이들은 다 가 버리고 건널목에는 혼자만 건너고 있었습니다.

지팡이를 짚은 장애인이 걸으면서 쓰는 안간힘이 눈에 잡힐 듯 들어왔습니다. 갑자기 서두르지는 않았지만, 아니 오히려 처음과 똑같은 동작과 빠르기로 긴장이 일관되게 느껴지도록 걸었기 때문에 그 안간힘이 더욱 따가웠습니다.

자칫 잘못해서 늦어져서 자동차가 내달려 앞길을 가로막지나 않을까, 걱정도 속으로는 했을 것입니다. 그런 사나운 꼴을 여러 차례 당하기도 했을 테고요. 저도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있을 정도니까요.

제 차가 1차로에 멈춰 있었는데, 제 앞을 장애인이 지나칠 때쯤 자동차 달려도 된다는 신호가 들어왔습니다. 건널목 초록불은 이미 나갔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무 자동차도 달려나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부르릉 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정말 조용했습니다. '팔랑팔랑', 종이가 떨어져도 소리가 들릴 것 같은 그런 조용이었습니다. '다리 저는 사람'에 나오는 표현-"그 요란하고 기이한 걸음을/ 지하철 역사가 적막해지도록 조용하게 걸었다"와 맞아떨어지는 장면이었습니다.

물론 지팡이를 짚은 장애인이 작품 속에서처럼 요란하고 기이하게 걷지는 않았지만, 그 힘들게 움직이는 동작 하나하나가 묵직하게 누르는 느낌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지팡이를 짚은 장애인이 건널목을 다 지날 때까지 더 걸린 시간은, 고작 10초, 길어도 30초를 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 때 그 건널목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는 조용한 평화가 흘렀습니다.

안간힘을 써서 제 갈 길 걸어가는 장애 어르신을 말없이 지켜보는 적멸(寂滅)의 순간이었습니다. 찰나였지만, 집착과 무엇이 중요한지 가려 볼 줄 모르는 미혹과 자기 앞가림부터 하는 욕심이 사라진 열반(涅槃)이 창원의 한 건널목에서 이룩됐습니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고 아무도 대신해서는 안 되는 장애인의 걸음걸음을, 그냥 제대로 걸어갈 수 있도록 묵묵히 지켜보고 기다리는 극락(極樂)의 실현이었습니다. 무심한 가운데 피어난 인심이었습니다. 인심이 극락이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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