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단풍은 풍요 아닌 가난의 산물이라는

김훤주 2009. 12. 6.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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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관룡사 갔다가 돌아나오는 길에 계성 어느 마을 들머리에 있는 은행나무가 눈에 띄었습니다. 멀리서 보니 아주 그럴듯해서 가까이 다가가 봤습니다. 아주 풍성했습니다. 노란색은 병아리 같아서 아주 따뜻하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은행나무 아래 시멘트 바닥에 누웠습니다. 드러누운 채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는데, 은행잎 노란 것들이 하늘하늘 조금씩조금씩 무너져 내렸습니다. 어떤 시인은 은행잎 지는 모습을 보면 발바닥부터 따뜻해진다고 했는데, 저는 얼굴부터 달아올랐습니다.

누가 옆에 서서 저를 두고 놀렸는지도 모릅니다. '저런 철없는 녀석, 아무리 은행잎이 예쁘기로서니, 저렇게 차가운 바닥에 누울 수 있나.' 그래도 저는 좋았습니다. 바닥으로 떨어졌다가 바람에 내몰려 한 쪽 구석에 오글오글 모여 있는 잎들도 나름 아름다웠습니다.



단풍은, 조금 거칠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엽록소가 없어지면서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머리 속에서 잎사귀는 초록색이기만 합니다. 초록색이라야 광합성이 이뤄지고 광합성이 이뤄져야만 나무가 나무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단풍은 그런 면에서 '가난'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무를 나무이게 하는 엽록소가 가난해진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엽록소가 가난해지면서, 잎사귀에서 초록색이 가난해지고 대신 붉은색이나 노란색이나 갈색이 풍요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엽록소=초록색이 나무를 자라게 만든다는 면에서, 우리 인간 사회에 비춰 말하자면 공장이나 원자재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단풍은 공장이나 원자재의 상실이고 그것은 바로 가난으로 이어집니다. 단풍은 이렇게, 가난의 아름다움을 온 몸으로 단박에 일러줍니다.

게다가 단풍이 들면, 잎에는 이른바 '떨켜'가 만들어집니다. 떨켜는 나무줄기에서 잎사귀로 영양분과 물기가 건너오는 것을 막습니다. 잎사귀는, 더욱 가난해집니다. 나무도 덩달아 가난해집니다. 단풍은 이렇게 해서 곧바로 낙엽(落葉)이 됩니다.



아름다운 단풍은,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엽록소를 버리고 초록색을 버리고 광합성을 버릴 때 이뤄집니다. 왜일까요? 추운 겨울에는 엽록소를 버리지 않고 초록색을 버리지 않고 광합성을 버리지 않으면, 나무가 얼어 터져 죽고 맙니다.

이처럼 나무가 추운 겨울을 나려면 광합성을 멈춰야 하듯이 인간 사회도 언젠가는 공장 원자재(자원이나 에너지) 같은 데서 벗어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나무가 몸 속 물기 때문에 얼어터지듯이 인간 사회도 넘치는 물질 풍요 때문에 부풀어 터질 수도 있거든요.

이미 징조는 나타나 있습니다. 아시는대로 공장 자원 에너지, 그리고 그것이 주는 풍요와 성장으로 말미암은 골병은 인간 사회가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풍요와 성장은 경쟁을 통해 이뤄지고, 경쟁은 욕망을 더 큰 규모로 만들어냅니다.

게다가 풍요와 성장의 달디단 열매는 경쟁에서 이긴 승자(勝者)가 독식(獨食)을 합니다. 절대 나눠먹지 않습니다. 나중에 다시 빼앗을 만큼만 남겨 줍니다. 대부분이 패자들이고, 패자들은 또 대부분 죽지 못해 사는 인생입니다.

이런 사회를 두고 아름다운 세상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무에 단풍이 들듯이, 사람도 단풍이 들어야 합니다. 나무에서 엽록소와 초록색과 사라지고 광합성이 멈추듯이 인간 사회도 공장을 멈추고 자원과 에너지 사용을 멈출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에게서도 저마다 가진 바 색깔이 뽐을 내듯이 나타나, 온통 다양함으로 울긋불긋한, 그리고 높낮이는 있지만 그에 따른 차별은 없는, 아름다운 세상이 될는지도 모릅니다. 나무가, 숲이, 해마다 우리 앞에서 저렇게 퍼레이드를 벌이는 것처럼 말씀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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