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일 아침 텔레비전을 보다가 저는 전유성이라는 사람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제가 모셨던, 그리고 때로는 대거리도 했던(노조 지부장이어서리) 허정도 경남도민일보 전직 사장 출연하시는 프로그램이라 봤는데, 거기서 무슨 얘기를 제가 들었습니다.
엄용수라는 코미디언이 있지 않습니까? 전유성보다 후배인 모양인데요, 이 이가 허정도 사장 출연한, KBS1 TV 아침마당 <화요 초대석>에서 '약방 감초' 노릇을 맡고 있더군요. 이야기가 진행되는 도중에 군데군데 기름칠을 해 주고 너스레를 떨어줘서 지겹지 않게 하는 구실 말입니다.
우리 허정도 사장은 <책 읽어주는 남편>이라는, 책에 대한 책을 펴낸 계기로 <화요 초대석>에 초대받았는데 그러니까 엄용수가 책 이야기를 하게 됐겠지요. 전유성의 책 얘기를 했습니다.
전유성은 늘 이런 식입니다. 남들 웃을 때는 웃지 않습니다. 뉴시스 사진.
이런 식이었습니다. "아 그 선배는, 책도 많이 읽고 책 선물도 많이 해요. 언제나 책을 들고 다니면서 읽지요. 후배들한테 '야, 이 책 좋더라.' 하면서 던져 주고 '야, 이 책 아주 재미있더라.' 하면서 건네준단 말이죠."
책을 많이 읽고 다른 사람들한테 책 선물도 많이 하니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을 부러워 할 일은 돼도 좋아할 일까지는 못 되지요. 그런데 다음 대목에서 확 빨려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선배 집에 가면, 책이 하나도 없어요. 깨끗해요. 텅텅 비어 있어요. 왜냐고요? 책 보고 나서 집에 책꽂이에 꽂아두는 게 아니라 짚히는대로 후배들이나 다른 사람들한테 줘버리니까요."
물론 웃자고 한 얘기겠지만 제게는 전혀 우습지 않았습니다. 그냥 몸이 좀 서늘해졌고 머리는 좀 얻어맞은 것 같았을 따름입니다. 그러고는 빈틈없이 꽂혀 있는 제 책장 제 책꽂이가 순간 떠올랐을 뿐입니다.
거기에는 언제 읽었는지 기억도 희미한,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도 잘 모르겠는, 지금은 책으로서 값어치보다는 그냥 유물로서 값어치가 더 나가는 그런 책들이 잔뜩 있습니다. 제 욕심에 발목이 잡혀서 돌고돌아가는 세상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끄집어내어져 있는 것들입니다.
제 집이 작기도 하지만, 그러다 보니 책이 막 곳곳에 쌓여 있습니다. 책은 자꾸 생기는데, 원래 있던 책은 버리지 못하니까, 조금씩이라도 빈틈을 만들어 책을 자꾸자꾸 재어 놓습니다. 이런 저를 엄용수의 전유성 이야기가 돌아보게 했습니다.
전유성은 아주 제대로 된 실용주의자라 해야겠습니다.(이명박 같은 덜 떨어진 실용주의자가 아니고) 물론 공부가 업인 사람이면 다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보통 사람이야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보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책을 쌓아놓는 것은, 한편으로는 욕심이고 한편으로는 장식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사태를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게 보고 본질을 무서울 정도로 빨리 파악해 버리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책을 쌓아놓아 봐야 먼지만 날릴 뿐이라는 것을 아주 슬기롭게 꿰뚫어보고 있는 것입니다.
전유성은 책을 열심히 읽는다는 데서는 참 좋은 사람입니다. 이웃이랑 나눌 줄 안다는 면에서는 참으로 따뜻한 사람입니다. 욕심을 없앴다는 면에서는 아주 바람직하게 깨달은 사람입니다. 가져봐야 오히려 해코지만 된다는 진실을 직시했다는 점에서는 아주 현명한 사람이라 해야겠지요.
그렇게 하고 돌아봤는데도, 저는 여전히 제 책이 아깝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10월 20일부터 지금까지, 한 달 가까이 생각을 했는데도 그렇게 해 치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다시 읽어야 할 책들이 많은 편이기는 합니다만.
예? 전유성도 보고 나서 남 줘 버린 책 가운데 다시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고요?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만약 누구든 전유성만큼 자유로운 정신이라면, 한 번 읽고 남 준 책이 다시 읽고 싶거든, 그냥 책방에 가서 한 번 더 사도 뭐 그리 크게 아깝겠습니까.
그런 다음 다 읽고 나서 다시 다른 사람한테 '응, 이 책 아주 재미 있더라. 너도 한 번 읽어볼래?' 이러면서 툭, 선물해 버리면 그만일 테니까요. 하하. 아, 어쨌든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 더 늘어서 저도 참 좋습니다.
김훤주
전유성의 구라 삼국지 10 -
전유성 지음, 김관형 그림.사진/소담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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