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날개도 없이 어디로 날아갔나 - 정약용, 김려 서사시
'어엿브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쌍하다'의 옛말입니다. 말이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어엿브다는 '예쁘다'의 예스러운 말 '어여쁘다' 하고도 닿아 있습니다. 저는 이리 생각합니다. 이 둘은 원인과 결과로 묶이는 사이입니다. "불쌍하니까 어여쁘다." 동시에, "어여쁘니까 불쌍하다."
조선 시대 양반 사대부 남자들은 여자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은 줄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대를 지배한 시대 정신이 유교였으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지배집단에 밉보여 박해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당대 여자들을 '어엿브게' 여길 줄 알았습니다. 어엿브게 여기는 근본은, '여자도 같은 사람으로 보는 태도'입니다. 여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면, 여자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해도 불쌍하게 보일 까닭이 없지 않겠습니까?
귀양살이로 떠돌아다니면서 농민, 어민, 백정, 광대, 기생 따위 보통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그리됐을 것입니다. "여자도 사람이다." "백정도 동포고 백정의 딸도 동포다." 더 나아가서, "물고기도 생명이 있는 가여운 존재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도강고가부사'-'팔려간 신부'로 번역-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1801년 귀양살이를 시작해 1818년 풀려날 때까지 내내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한 집에 꽁꽁 갇히는 일은 면해 한 고을 안을 벗어나지만 않으면 되었다. 그러던 1803년, 우연히 이렇게도 안타까운 사연과 마주치게 되었다."
여성의 한맺힘이 뚝뚝 떨어집니다. 알마 제공.
'팔려간 신부'에서 다산은 주인공 여인의 혼인을 통해 당시 여성의 삶-아버지, 남편, 고을 원님 같은 힘센 남성에게 운명이 좌우됐던 여성의 이야기이며, 그래도 그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만은 않으려 했던 여성의 이야기를 펼쳐보입니다.
아버지는, "이런 사위 하나 얻기만 하면 다행히 늙어죽도록 고생이 없겠지. 당신과 나 우리 두 늙은이가 봉양을 받으며 편안하게 살 수 있을 테니 얼마나 든든한가" 합니다.
그렇게 혼인에 이릅니다. "신방에서는 신랑과 신부가 다정하게 소곤대는 소리 따위는 새 나오지 않았다. 들리는 소리란 그저 신부의 흐느낌과 신랑의 악다구니뿐이었다." 남자인 제가 봐도 참, 삭막하고 낯이 뜨겁습니다.
"(남편의) 소리만 들어도 다 토해 낼 것만 같은데 어떻게 제 정신으로 살겠어요." "첫 아내한테서 난 두 딸은 또 어떻고요. 나를 괴롭히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꼴이 꼭 늑대, 호랑이 같답니다. 밤낮없이 거짓말을 지어내서는 제 아비에게 일러바쳐 충동질을 해요."
둘째 아내한테서 난 아들또한 마찬가지였답니다. '여인이 자기 머리를 빗어주며 일부러 빗으로 뒤통수를 질러 상처를 냈다 하질 않나, 맛있는 반찬은 여인 혼자 다 먹어 치우고 제 아비의 밥상에는 상하고 문드러져 먹을 수 없는 것만 올려놓는다고 하지를 않나……'.
그래서 집을 나섭니다. "진작에 물에 빠져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지만 모질지 못해 그마저 쉽지 않네요. 보림사 북쪽 계곡에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다른 절이 한 채 있다고 들었어요. 저는 그리로 갈 거예요. 그러니 어머니도 제가 가려는 길을 막지 마세요."
남편의 신고를 받은 고을 원님이 붙잡아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여자가 어찌 그리 글러 먹었느냐? 지아비를 헌 버선 짝처럼 내팽개치다니! 집으로 돌아가 다시 머리를 기르고 지아비에게 정성을 다하라!"
다산이 본 것은 여인이 두 번째 잡혀가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저렇게 끌고가서 다시 시집으로 돌려보내 줄곧 시달림을 받게 하면 결국 제 스스로 목숨을 끊지나 않을까." 다산은 어땠을까요? "나는 그저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산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김려(1766~1822)는 좀더 나아갑니다. 온정주의 느낌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그런 작품이 있습니다. '방주가'-'방주의 노래'입니다.
김려는 다산과는 달리 반듯하지 않게 살았습니다. 다산은 주류의 문체를 따랐지만 김려는 그리 하지 않았습니다. 다산은 나라와 세상을 앞장서서 생각하는 근엄한 문인이었지만 김려는 일상 생활 작은 일들에 더 관심을 두는 분방한 문인이었습니다.
김려도 다산과 마찬가지로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그것도 경상도 진해에서 했습니다. 당시 진해는 지금 경남 진해시가 아니라 경남 마산시 진동면 일대였습니다. 김려는 소금 굽는 집에 세 들어 살면서 낚시도 하고 어부들과 어울렸습니다.
그이는 물고기 일흔두 가지 이름과 잡는 방법, 요리법 따위를 기록해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라는 책까지 냈습니다. 정약용의 형 약전이 <자산어보(玆山魚譜)>-'자산'이 아니라 '현산'이라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지요-를 펴낸 1814년보다 11년 앞선 때입니다.
김려가 지은 '방주의 노래'는 다산의 '팔려 간 신부'보다 파격 정도가 훨씬 큽니다. 다산은 여인의 맵고 짠 한살이를 따뜻하게 바라볼 뿐이지만, 김려는 여성의 사람됨을 적극 인정할 뿐 아니라 신분 차별 철폐는 물론 생명 존중에까지 나아갑니다.
백정 딸 방주의 팔방미인스러움을 나타낸 그림. 어여쁩니다. 알마 제공.
'방주의 노래'는 천민 백정이지만 누구보다 사랑이 깊고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와 오빠들 사이에서 어여쁘게 자라난 방주가 '사람 사이의 인연에 빈부고 귀천이고 물을 것도 없고 따질 일도 아니'라는 양반 장 파총으로부터 자기 아들과 혼인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 이야기랍니다.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세상에 가득 찬 속된 유행을 따라 사는 삶이 어디 옳은 삶이겠는가." "사이좋게 혼인하기로 약속하는 데야 서로 마음만 통하고 뜻이 잘 맞으면 그만이지." 이런 양반 장 파총에게 김려는 한껏 믿음을 보냅니다.
장 파총이 고기 잡던 시절을 돌아보는 대목에서는 인간 세상을 넘어서는 경지도 보여줍니다. "제가 살던 물을 떠나 잡혀 올라온 물고기들은 저마다 혼이 빠진 모습이었다." "사람 입장에서는 밥벌이, 돈벌이가 되는 일이지만 물고기에게는 어찌 좋은 일이겠는가."
"하늘이 낳은 것을 모조리 죽이고 잡다니, 욕심이 지나친 게 아닌가. 언젠가는 하늘이 노해 살기가 온 세상에 넘치게 되지 않을까. 물고기를 잡았다는 기쁨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천지신명의 섭리가 저 물거품 속에 속절없이 스러지는 것만 같아 쓸쓸한 마음이 되었다."
김려 '방주의 노래'와 다산 '팔려 간 신부'는 귀양살이할 때 썼다는 점 말고도 또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행이기도 하고 불행이기도 한데, 둘 다 미완(未完)이랍니다. 문학성으로 보면 참 안 된 일이지만, 독자들이 저마다 다른 감수성으로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는 면에서는 복 받은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닌가요?
번역한 문체도 꽤 아름답습니다. 한참 쳐다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게 되는 좋은 그림도 많이 들어 있답니다. <날개도 없이 어디로 날아갔나>에 이 둘이 담겨 있습니다. 알마. 142쪽. 9500원.
김훤주
날개도 없이 어디로 날아갔나 -
정약용·김려 원작, 김이은 지음, 이부록 그림/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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