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동화 '신데렐라'는 조작된 가짜다

김훤주 2009. 11. 6.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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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는, 신데렐라가 아니다 

"야, 이것 봐! <신데렐라>가 <재투성이>라네요." "그래 맞아요.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로 나오지요. 동화에서 말입니다. 책도 안 읽어 보셨어요?"

이런 이야기가 나올 법합니다. 그런데 독일 동화 원문과 프랑스 동화 원문에는 '신데렐라'라는 낱말이 아예 없다고 합니다. 독일 동화를 영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런 작명이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작이고 가짜일까요?

"널리 알려진 것만도 둘이다.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가 지은 <재투성이와 작은 유리 신발>, 독일 작가인 그림 형제가 지은 <재투성이>가 그것이다. …… 두 이야기 어디에도 '신데렐라'란 낱말이 없다는 게 눈에 확 띈다. '신데렐라'란 낱말이 프랑스 원어나 독일 원어에 있는 말이겠거니 여기겠지만, 그렇지 않다."

"'재투성이'로 옮긴 프랑스 원전 낱말은 쌍드리옹Cendrillon이고 독일어 원어는 아셴푸틀Aschenputtel일 뿐이다. '쌍드리옹'도 '아셴푸틀'도 직역하면 '재투성이'이고, 이른바 의역하면 '부엌데기'다."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신데렐라는 재투성이와 어떻게 다를까 

"낱말 '신데렐라'는 어디서 온 것인가? '영어'에서 온 것이다. 영어 씬데르스Cinders가 프랑스어 쌍드리옹과 비슷한데, 마침 그 뜻도 '그을음'이어서, 소리와 뜻 모두 이야기의 주인공 이름에 거의 겹친다. 그래서 영어로 옮기면서 그 아이의 이름을 씬데뤨라Cinderella라 하였는데, 우리말로 되면서 아주 부드럽고 가벼운 발음, 신데렐라로 바뀌었다."

"신데렐라란 소리엔 아무런 뜻이 들어 있지 않다. 그렇기에, 그 소리가 만들어내는 울림에, 우리의 느낌은 고스란히 내맡겨진다. 우리 발음 체계에서 나오는 '신데렐라'란 소리는 아름답고 가볍다. 여기에 쌍드리옹과 아셴푸틀의 뜻인 재투성이, 부엌데기가 가지고 있는 슬픔과 무거움이 자리할 곳은 없다.'신데렐라'라고 소리를 내는 순간, 슬픔에 젖어 축 가라앉아 있는 인간은 사라져버린다."

그러니까 독일 동화에서 영어로 옮길 때에 씬데뤨라Cinderella라 적은 것은 조작이 아니고 오히려 창발적 적용이라 할 수 있겠지만, 영어에서 우리말로 독일 동화를 중역하면서 그대로 신데렐라라 한 것은 내용과 형식에서 모두 조작이고(의도했든 아니든) 가짜라는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독일 메르헨부루넨에 있는 재투성이상. 우리나라 신데렐라가 이런 식으로 표현될 수 있을까요. 슬프고 칙칙한. 글숲산책 제공.


이런 얘기와 아울러, 지은이 이양호는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에 1857년 출판된 그림 형제의 독일 원전 <재투성이>와 그보다 앞서 1697년 세상에 나온 샤를 페로의 프랑스 원전 <재투성이와 작은 유리 신발>을 모두 번역해 앞뒤에 붙여 놓았습니다. 몸소 견줘 보고 실체를 파악하라는 뜻이겠지요.

◇재투성이가 재투성이인 까닭 

그러나 이양호의 미덕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 너머에 있습니다. '청소년과 학부모를 위한 해설'인데요, 당대와 고대를 비롯해, 독일은 물론 유럽 전체를 아울러, 유럽 문화 속에 작품을 집어넣고 거기서 다시 끄집어내는 방식을 되풀이하면서 작품을 읽는 깊이와 너비를 더해준답니다.

게다가 우리 동아시아 문화까지 적용해 보여주기도 한답니다. 어지간한 사람에게는, 이 모든 것이 새로운 체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이를테면 이렇습니다. 유럽에서 '재'는 무엇일까요? 먼저, 사순절의 첫 날인 '재의 수요일'이 있습니다. 여기서 재는 덧없음, 슬픔, 속죄, 회개를 뜻한다고 합니다. 다음에는 무엇이 이어질까요? 깨끗해짐, 정화(淨化)가 있는 것입니다. 속죄로 잘못을 씻어내니까, 절로 정화가 되지요.

두 번째로, 피닉스Phoenix가 있습니다. 태양의 현신(現身)인 피닉스는 불타는 아침 햇살에 몸을 다 태우고 남은 재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아니면 오시리스 신의 재에서 생겨나 500년을 살다가 불꽃에 휩싸인 뒤 알이 하나 생겨나게 한답니다. 그러니까, 부활과 불멸, 입니다.

어머니 무덤 위에 아버지 모자가 부딪힌 나뭇가지를 심어 눈물로 살리고 키우는 재투성이. 원전에 실린 그림. 글숲산책 제공.

다시 <재투성이> 속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서부터는, 되도록 꼭꼭 씹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지 않으면, 뜻을 온전하게 빨아들이기 어려우니까요.

"어머니의 죽음, 그 무덤 위에서 재투성이의 눈물을 먹고 자라는 개암나무, 어디선가 날아와 그 나무에 앉은 한 마리 새."


"쫓겨난 뒤 아름다웠던 아가씨는 잿빛 옷을 입고 재 속에서 살아야 했기에 재투성이가 되었다. 그 재투성이 아가씨가, 죽음의 무덤 위에 나무를 심고, 그것을 눈물로 키워내, 드디어 거기에 새하얀 새가 날아들었으니, <재투성이> 이야기에도 역시 죽음과 늬우침, 그리고 눈물이 어른거린다고 해야 하리라."

"먼지와 재로 범벅이 된 옷을 입고, 무거운 나막신을 끌고 살아가야 한다. 도움이 미칠 길은 다 막혔다. 딱 한 길이 뚫려 있었으니, 울음의 길. 날마다 그녀는 죽음의 무덤 앞에서 세 번씩 울었다. 잿빛 옷을 입고 온 몸에 재를 뒤집어쓴 채, 재 같은 삶과 죽음을 똑바로 쳐다보고 울었다. 그리고 가슴 깊이 소망을 품었다."

"어떤 사람에게 무엇이 이뤄졌을 때,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터무니없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이뤄진 것에 앞서, 품은 마음이 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날마다 세 번씩, 무덤 위에 솟아 있는 나무 밑에서 울며 기도한 마음이 그 마음 아니면 무엇이겠나. 죽음의 무덤 위로 한 생명이 솟아오르기 위해선, 한 생명의 눈물이 흘러내려야 했으리라.
눈물은 한 사람의 일부가 아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깊이 동감합니다. 눈물은 한 사람의 전부이고, 눈물은 한 사람 자체입니다. 따라서 눈물은 한 생명이 품은 우주 전체의 무게랑 똑같을 것입니다. 눈물은 그래서, 우주를 통째 담고 있는 씨앗, 입니다. 제 겪음으로 보자면요. 하하.


"게다가 재투성이 아가씨가, 환히 빛나는 옷과 신발을 위로부터 내려받아 임금의 아들과 짝을 맺기까지 했으니, 이것은 피닉스 새가 '죽음의 재' 속에서 솟구쳐오른 것과 비길만하지 않은가!"

참으로 눈이 부시는 순간입니다. 저는, 조작된 <신데렐라>를 읽었기 때문인지, 아주 비주체적인 스토리라고만 여겼는데.


◇재투성이 아닌 것들도 재투성이와 마찬가지
 
지평을 넓혀서 봐도 됩니다. "백설 공주는 새하얀 눈 아이며,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가시장미 아이고, 인어공주는 물고기 아가씨다. …… 제목을 이렇게 달리 달고서도, 내용만은 그대로 고스란히 둔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무엇보다도 글투가 바뀌게 된다."

담담하고 담백하고 평면적인 원문 글투가, 매끄럽고 화려한 글투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릇이 달라지면 담기는 음식도 달라지게 마련이지요.

이런 생각이 듭니다. 독일 대안 교육의 대표격인 발도르프에서는, 초등학교 1년 동안 담임 선생이 학생들한테 그림 형제 동화를 읽어준답니다. 그러면서 정확한 발음으로 이야기에 담긴 정신과 내용을 바탕에 깔 수 있도록 한다는 데 초점을 맞춘답니다.

이 낭독하는 발도르프 그 선생님들에게, 우리나라에 나와 있는 동화책 <신데렐라>를 안겨주면 어떻게 될까요. 과연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럴 개연성이란 개뿔만큼도 없겠다 싶은데요.

김훤주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 - 10점
이양호 지음/글숲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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