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전라도 사대주의와 경상도 사대주의

김훤주 2009. 10. 30.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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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여수에 사는 이들이 불러주신 덕분에 여수를 다녀왔습니다. 1992년인가 들른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 때는 남의 결혼식 축하하러 간 걸음이어서 둘러도 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하루 묵으면서 이곳저곳 다녀 볼 수 있었습니다.

오동도에 갔습니다. 뙤약볕을 쬐면서 콘크리트길을 걸어갔습니다. 때때로 시원하게 바닷바람이 불어오기도 했습니다. 나무그늘에 앉아 있으니 몸이 절로 시원해졌습니다. 토요일이고 휴가철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이리저리 거니는데, 쓰레기 모아놓은 뒤쪽으로 시비 비슷한 빗돌이 눈에 띄었습니다. 무엇인가 싶어 가까이 갔더니 麗水八景(여수팔경)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竹島淸風죽도청풍
봄바람에 푸른 물결 넘실거리는 오동도

姑蘇齋月고소재월

맑게 갠 가을 밤에 달빛 황홀한 고소대

寒山暮鐘한산모종

은은한 저녁 종소리에 밤이 깊어가는 한산사

鐘浦漁歌종포어가

만선의 고깃배들 뱃노래 흥겨운 종포 포구

隸岩樵笛예암초적

목동들의 풀피리 소리가 아름다운 예암산

鳳岡晴嵐봉강청람

아지랑이 나불나불 아른거리는 봉강 언덕

馬岫朝旭마수조욱

아침 햇살 찬란히 솟아오르는 마래산

遠浦歸帆원포귀범

경도쪽에서 돌아오는 어선들의 정취라


저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여기에도 지독한 사대주의가 있군.' 잘 아시겠지만, 여기 여수팔경은 중국 소상(瀟湘)팔경의 모방입니다.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저는 자기 고장 풍경 자랑을 남의 나라에 기대어 하는 것을 가장 한심한 노릇으로 여깁니다.

경상도로 치자면 이렇지요. 경상도에서 여수만큼 아름다운 항구로 통영이 있습니다. 통영을 자랑할 때 '일부 극소수 몰지각한 인간'들은 '동양의 나폴리'라 한답니다. 또 보기를 들자면, 우리나라에서 으뜸가는 상이라 자랑하려고 쓰는 '한국의 노벨상'도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일컫는, '한국의 만델라'도 있군요.

물론 여기 여수팔경은 소상팔경과 다른 대목이 꽤 있습니다. 죽도·종포·예암·봉강·마수 따위는 고유한 땅이름이고요, 재월·어가·초적·조욱 또한 소상팔경에는 없는 새로운 표현입니다.

하지만 틀이 같은데다 원포귀범처럼 표절한 대목도 있으니 누가 뭐래도 의식 또는 무의식의 사대주의입니다. 자기 고장 풍경을 남의 나라 풍경을 빌려 자랑한다는 것은, 상상력이 작동하는 시스템 자체가 그 쪽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에 빨려들어가 있다는 반증입니다.

한국의 나폴리, 한국의 노벨상, 한국의 만델라, 소상팔경 같은 아름다움,이라는 표현 속에는 우리에게 고유하거나 색다른 점은 무시하고 나폴리와 노벨상과 소상팔경을 으뜸으로 치면서 그렇게 닮아가려는 노예스러운 잠재의식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경상도에는 이보다 훨씬 더 지독한 사대주의도 있습니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에 있습니다. 악양팔경이 있는데, 소상팔경에서 글자 하나 다르지 않습니다.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만나는, 동정호(洞庭湖)와 악양루(岳陽樓) 따위가 있는 중국 악양이 여기서는 이상향입니다.

山市晴嵐산시청람
烟寺暮鐘연사모종
遠浦歸帆원포귀범
漁村落照어촌낙조
瀟湘夜雨소상야우
洞庭秋月동정추월
平沙落雁평사낙안
江天暮雪강천모설


게다가, 지금 악양(岳陽)이 원래는 악양(嶽陽)이었는데, 1350년 전 백제·고구려가 멸망할 때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여기 와서 보고 중국 악양과 같다고 얘기했다고 해서 이름까지 갈았다는 것입니다. 소설 <토지>에 나오는 평사리 일대가 바로 그 곳입니다.

여기에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동정호도 있습니다. 중국 선불교에 자주 등장하는 한산습득 고사로 이름나 있는 중국 절간 한산사가 여기에도 있습니다.(한산사는, 여수에도 오동도 가까운 어디 있는 것 같습니다만)

원래부터 이름이 동정호는 아니었겠고 절간도 처음부터 들어서 있지는 않았겠지만, 소상팔경이 형성된 중국 악양을 이상향으로 삼다 보니 후대 사람들이 이렇게 줄줄이 이름을 갖다 붙이거나 절을 지어도 남의 이름을 훔쳐오게 된 것입니다.

풍경에서 중국이나 미국을 으뜸으로 삼을 까닭이 없습니다. 중국이나 미국보다 크기가 작아도 우리 풍경은 그와 다른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어 색다른 즐거움을 안깁니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 나름으로 풍경을 바라보는 심미안이 있지 않습니까. 굳이 중국식이나 미국식 또는 유럽식 상상력을 빌려올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풍경은 우리식 상상력으로 즐기고 우리식 표현으로 자랑하면 좋겠습니다. 전라도 여수 오동도에 가서 경상도 하동 악양을 떠올린 까닭입니다.

김훤주
※ 월간 <전라도 닷컴> 11월호에 실은 글을 조금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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