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도소는 기결수, 구치소는 미결수
교도소와 구치소의 차이를 아시나요? 교도소(矯導所)는 확정 판결을 받은 기결수(旣決囚)를 가두고 구치소(拘置所)는 재판이 진행되고 있어서 아직 형량이 정해지지 않은 미결수(未決囚)를 가둡니다. 구치소만으로 독립돼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구치소는 교도소에 붙어 있습니다.
교도소와 구치소의 구분은 엄격합니다. 수용되는 사람들의 법적 신분이 크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구치소에 있는 미결수들은, 현실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죄 없는 사람으로 대접받습니다.
반면 교도소에 있는 기결수들은 이미 유죄가 확정돼 수형(受刑) 생활을 해야 합니다. 형벌을 받는 사람이라는 얘기고, 그러면 강제로 하기 싫어도 시간과 규율에 맞춰 노역을 비롯해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 함을 뜻합니다.
2. 사형수는 재판이 끝나도 구치소서 미결수와 지낸다
사형수는 구분이 어떻게 될까요? 사형수는, 재판이 끝나 형량이 확정됐다는 면에서 기결수입니다. 그런데 사형수는 아주 별난 기결수입니다. 왜냐하면 형벌을 받는-형벌이 집행되는 바로 그 순간 사형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형수는 기결수이지만 기결수 전용인 교도소에 있지 않습니다. 법률상 무죄로 추정되는 미결수들과 함께 상대적으로 구속이 덜 심한 구치소에서 삽니다. 이들은 다같이 노역을 나가지 않습니다.
물론 구치소에서도 사형수에게는 특별한 제약이 있습니다. 24시간 양손에 수갑을 차고 있습니다.(그러나 교도관들이 대체로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고 양 손을 모두 쓸 수 있도록 한 손에만 채워 둡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홈페이지에 있는 이미지. 서울 구치소 정문이었습니다.
며칠 전 10월 10일이 사형폐지의 날이었답니다. 몰랐는데 10일 <한겨레>를 보고 알았습니다. "10월 10일은 사형제도를 없애자는 공감대를 세계적으로 확산시키고 여론을 환기하기 위해 세계사형반대연합이 2003년 정한 사형폐지의 날이다."(19면)
제가 겪은 사형이 생각이 났습니다. 별 다른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뒷날 '이런 일이 있었구나……' 알 수 있는 기록을 남긴다는 생각으로 한 줄 적어보겠습니다.(그런데 그 날이 제게는 이상하게도 생생하게 기억돼 있습니다.)
3. 평소에는 시끌벅적한 구치소 감방
저는 대학 4학년이던 1985년 7월 구속이 됐습니다. 국가보안법 위반이었습니다. <일보전진>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것을 두고 전두환 정권은 '이적 표현물 제작·배포'라 했습니다. 갇혀 있던 장소는 서울구치소(일제 강점기 서대문 형무소)였습니다.
저는 좀 일찍 잡혀들어간 편이었습니다. 제가 들어간 다음에, 이른바 시국사범이 물밀듯이 들어왔습니다. 당시 시국사범은 모두 독방에 가뒀습니다. 이른바 '사상'을 다른 사범들에게 '전염'시킬까봐 그랬던 것입니다.
당시 동료들이 들여넣은 책에 붙어 있던 '도서열독 허가증'. 어지간한 책은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불어학 개론'은 학과 전공 서적이라 쉽게 들어왔습니다.
제가 있던 사동(舍棟=3舍下)은 방이 모두 29개였습니다. 한 방 건너 하나씩 저를 비롯한 학생과 노동자들이 들어찼습니다. 우리는 안에서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면 단식도 했고 아침저녁으로는 크게 구호를 외치기도 했습니다. 구치소 처우 개선이 목적인 때도 있었고 정치·사회 현안이 쟁점일 때도 있었습니다.
요즘은 어떻는지 모르지만, 25년 전 그 때는 감방에서 신문 방송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또 아침 기상 시간이 되면 방송으로 노래가 울렸습니다. 잘 기억나지는 않는데 '하늘엔 조각 구름 떠 있고~' 어쩌고 하는 '아! 대한민국'이나 그런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노래가 나오면 우리(제각각 독방에 갇혀 있던 시국사범)는 이를 신호 삼아 딱딱한 물건을 들고 감방 문으로 달려가 쇠창살을 세차게 두드리며 구호를 외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보통은 한 30분 동안 어떤 때는 아침 한나절 그렇게 철창에 매달려 있기도 했습니다.
4. 사형 집행되던 그 날은 종일 침울
날씨가 좀 쌀쌀해진 어느 때였습니다. 기상 시간이 지났는데도 조용했습니다. 저는 무슨 전기 고장이 났는 줄 알았습니다. 눈치가 발바닥이던 저는 그래도 일어나자마자 철창으로 달려가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랬더니 교도관이 달려와 눈짓 손짓으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또한 이상했습니다. 보통은 교도관들이 막지도 말리지도 않았거든요. 괜히 그래 봤자 더 시끄러워지니까, 제 풀에 지쳐 그만둘 때까지 내버려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교도관이 막았고,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저 혼자만 소리를 냈다는 데 있었습니다.
저는 이상한 기운 또는 분위기에 눌려 저절로 소리내기를 멈췄습니다. 그랬는데 교도관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은 채로 그냥 인상을 찡그리며 한 번 슬쩍 돌아보고는 왔던 길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저는 좀 멋쩍고 황당해졌습니다.
교도관이 가자마자 밥이랑 반찬 나눠주고 청소하고 심부름하던 소지(일본 말이지 싶은데 한자로는 아마 掃地, 기결수들이 노역 '보직'으로 맡아 했습니다.)들이 왔습니다. 그이들은 차마 말로는 못하고, 손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제야 알아차렸습니다. 그러고는 아침 한 때가 조용하게 넘어갔습니다. 점심도 조용하게 넘어갔습니다. 조용한 분위기에 몸과 마음이 좀 익숙해지려는 때였습니다. 저녁 때는 아직 안 됐지만, 해는 이미 많이 기울어진 시점이었지 싶습니다.
5. 형장으로 가는 길에 외친 "만세" 소리
커다란 소리가 갑자기 울려퍼졌습니다.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습니다. 웅변하듯 말하는 것이기는 한데, 크게 소리를 지르듯이 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누가 입을 틀어막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왜냐 말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는데 '만세!' 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 저는 그 때까지 구치소에 있으면서 그토록 큰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우렁우렁 쩌렁쩌렁 떨치는 소리였습니다. 이번에는 낱말 단위로 똑똑 끊어서 내는 목소리였습니다.
"남조선 민족 해방 운동 만세!!!",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만세!!!!", "김일성 수령 만세!!!" 이른바, '간첩'이었겠지요. 저랑 다른 사동에서 나와, 제가 있던 사동이 포함된 관구(管區)와 이어지는 복도를 지나면서 그렇게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6. 미리 알려줄 수 없는 탓에 모든 사형수가 공포
그러고 나서도 계속 조용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쨌든 밥을 먹거나 얘기할 때뿐 아니라 통방(通房=다른 사방 사람이랑 교도관 몰래 얘기를 나누는 일)을 하거나 심지어 투닥투닥 다투면서도 될 수 있는대로 목소리를 낮췄습니다. 사람 목숨이 밧줄에 묶이고 졸려서 끊어지는 날이었습니다.
그 날 서울 구치소에 있던 모든 사형수는 특별 관리를 받았습니다. 사형이 집행되는 날, 사형수들은 극도로 예민해진답니다.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사형을 집행한다 해도 직전까지 해당 사형수에게 사실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사실 알려준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오히려 바로 자포자기 심정이 될 테니까. 또 관리하는 쪽에서 보자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알 수 없겠지요.)
제가 있던 사동에도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거기 사형수들에게 그 날은 입술이 타고 손이 오그라드는 불안과 초조와 공포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한편으로 비정하기는 하지만, '간첩' 사형수 외치는 소리가 그이들에게는 해방의 종소리였을지도 모릅니다.
이는 물론, 사형이 주는 '간접' 공포를, 그것도 멀찌감치 떨어져 느낀, 별로 절실하지 않은 얘기밖에 안 됩니다. 저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일상(감옥에도 일상은 있습지요.)으로 곧바로 돌아갔습니다. '사형일랑 잊고서' 빵살이를 하다 이듬해 1월 징역 2년6월 자격정지 3년에 집행유예 4년 선고를 받고 나왔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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